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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광인

 

손목을 가볍게 털며 노을로 붉게 물든 한산한 거리를 나른하게 걷기 딱 좋은 시간. 보리스는 잔뜩 구겨져 앉아 있었던 탓에 찌뿌둥한 몸을 털었다. 초대석은 가장 앞자리인데, 관객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던 탓이다.

 

“이번 연극은 좀 특이하던데?”

“포도원에서 본 자료에서 착상을 좀 얻었어. 주인공의 이름도 그렇고 말이야.”

“포도원?”

“걱정하지 마, 티치엘. 아직까진 아무 문제 없었거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허락받은 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극이 무대에 오른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네냐플 측에선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티치엘은 더 말하지 않고 입술을 삐죽이는 선에서 대화를 끝냈다. 평소라면 한 마디 끼어들 막시민이 말이 없자 다음 화제를 꺼낸 건 루시안이었다. 괜찮다는 보리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찌그러져 관람했기 때문에 보리스와 마찬가지로 뻐근한 목을 돌리고 있었다.

 

“근데 슈퍼맨은 왜 바지 위에 팬티를 입은 거야?”

“어…. 파격적이라서?”

 

조슈아는 예상외의 질문을 받았는지 눈을 꿈뻑였다. 언제는 도전적이지 않았냐만, 이번 연극은 조슈아로서도 처음 시도해보는 실험적인 장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예를 들면 주 고객층을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으로 삼은 점이 그랬다.

 

“속옷은 속에 입는 옷이잖아. 겉에 입은 시점에서 이미 속옷이 아니야.”

“하지만 그건 팬티라고!”

 

란지에의 말에 티치엘마저 턱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붉은 색 삼각형 모양의 천이 어째서 속옷이 아닌지 생각해봤고, 리체는 아까 본 연극 속 주인공의 복장을 복기해봤으며 조슈아는 ‘아이들이 연극을 본 뒤 속옷을 겉에 입으려 들면 어쩌지’라는 새로운 고민거리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리스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을 보며 어째서 이 대화를 멈춰줄 사람이 없는지 고찰해봤다. 정작 자신도 아무 말 않고 있으면서.

 

“속옷은 가장 안에 입는 옷이 맞고 안과 밖은 상대적인 개념이잖아? 들판에 금이 그어져 있다고 생각해봐. 오른편에 서 있는 나는 금 오른편에 서 있는 내가 금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왼편에 서 있는 사람이 금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내가 금을 건너서 왼편에 서면 금 오른편이 밖이 되잖아. 금을 놓고 생각할 때 안과 밖은 내가 금 오른편에 서 있나 왼편에 서 있나에 따라 바뀌지. 그러니까 주인공 중심으로 보면 삼각형 모양 하의는 속옷이 아니야. 하지만 관객 중심으로 보면 분명 속옷이지. 분명 다른 옷들에 비해 가장 안에 입었잖아.”

“그건 또 무슨 궤변이냐.”

“누굴 중심으로 보냐에 따라 안과 밖이 바뀐다는 말이야.”

 

조슈아는 막시민의 타박에 살짝 웃었다. 어째 어릴 때와 정반대의 대화를 나누게 된 셈이었다. 오른편, 왼편, 금, 오른편, 왼편, 안, 밖, 안, 밖….

 

“안과 밖이 어쨌든, 이번 연극에선 네놈이 왜 연출만 맡았는지는 확실히 알겠네. 누더기를 입고 다니는 네놈도 그런 파격적인 옷은 소화할 수 없었구나?”

“내 연극엔 언제나 리체가 보러오니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건 맞아.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야. 이번 연극엔 시도해보는 것도 많고 좀 떨어져서 보고 싶었어.”

“맞아. 어떻게 관객에게 말을 걸 생각을 했어?”

 

막시민에게 한 말이었으나 맞장구는 티치엘에게서 나왔다. 티치엘은 동의를 구하는 듯 제 왼편에 서 있는 루시안과 보리스를 쳐다봤고 루시안은 열성적으로 여러 번, 보리스는 침착하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는 얘기가 이쯤 진행되자 조금 부끄러워져 귀를 붉히며 말을 이었다. 이미 여러 투자자에게 받은 질문이었지만 친구들에게 설명하자니 꼭 처음 연극을 만들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한 관객에게 무대 위에서 외쳤던 말이 있었거든. 물론 그땐 직접 말하지 않고 노래로 불렀지만. 거기서 영감을 받은 거야. 아이들을 위한 연극이니까 집중을 도울 장치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지나간 시간을 더듬는 말에 막시민과 리체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루시안이 멋지다며 자기도 다음에 보러 갈 땐 열심히 대답해서 사탕을 받을 거란 말이 끝날 때까지 풀어질 줄 몰랐고 조슈아는 그때서야 둘에게 작게 웃어주었다. 그렇게 흩어지는 듯했던 주제를 붙든 건 보리스였다.

 

“근데 배우가 말을 건 관객이 꼭 협조적이란 보장이 없잖아.”

 

아까부터 작게 웃기만 하고 별말이 없던 보리스가 말을 걸자, 란지에가 보리스를 힐끔 쳐다봤다. 이번엔 새로운 주제에 언제나 진지하게 생각해보던 루시안뿐 아니라 티치엘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반면 리체는 연극 준비 과정에서 자신이 이미 물었던 질문이 보리스에게서 똑같이 나오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관객들만 배우를 보는 건 아니야. 배우도 연극 중에 관객을 본다고.”

“반응이 좋았던 관객을 점찍어둔다는 거야?”

“맞아.”

 

보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조슈아가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막시민에게 눈으로 인사했다. 막시민은 그 인사를 어색하게 받아주곤 휙 옆 골목으로 가버렸다. 그림자가 순식간에 막시민의 몸을 삼켜버리는 것까지 끈질기게 눈으로 좇던 리체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기 무섭게 루시안이 손으로 양 볼을 누르며 외쳤다.

 

“아! 나도 슈퍼맨한테 사탕 받고 싶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참여했는데!”

“아이들을 위한 연극이니까 아이들을 우선하기로 했거든. 네가 일곱 살만 어렸어도 받을 수 있었을 거야.”

“..그렇다면야.”

 

실망스러운 듯 입술을 쭉 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루시안은 로글랑탱 파이 집으로 달려갔다. 루시안이 파이 집에 도착했을 즈음, 보리스는 멀어지는 막시민의 기척을 훑는 걸 멈췄다. 아니, 예기치 못한 구석으로 들어온 자극에 기척을 놓쳤다는 것에 가까우리라. 모두가 잠든 새벽에 깨어난 듯한 적막. 또. 또 이런 기시감이다.

 

“그럼 난 리체랑 이만 가 볼게. 다들 이번에 내 연극 보러 와줘서 고마워.”

“재미있었어.”

“나야말로 초대해줘서 고마워.”

 

모임은 파장 분위기였다. 란지에는 조용히 근처 주점으로 걸음을 옮겼고 티치엘은 사야 할 물건이 있다며 상점가로 들어갔다. 루시안의 손짓을 따라 파이 집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보리스는 꼭 붙어 멀어지는 조슈아와 리체의 뒷모습을 봤다. 이곳에 한 사람이 더 있었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

 

 

 

 

“근데 보리스, 대체 어떻게 포도원 출입 허가를 받은 거야?”

“말해줄 수 없어.”

“요즘 따라 포도원 문이 자주 열리는 거 같단 말이지.”

 

티치엘은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기왕이면 빨리 찾고 싶어서 일손을 티치엘 외에도 더 데려오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란지에같이 속 검은 놈을 함부로 포도원에 들여보낼 순 없다는 말을 되감으며 보리스는 아쉬워졌다.

하지만 몸이 안전한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입을 연 값으로 얻은 포도원 이용 허가는 지나치게 자비로웠다. 보리스는 새삼 자신이 지닌 지식의 무게가 체감됐다.

 

“티치엘, 세계의 차원이나 세상에 겹쳐져 있는 공간을 조사해 줘. 나는 그동안 다른 걸 찾아볼게.”

 

조슈아가 영감을 받았다는 자료가 어디서 온 자료인지 좀 알아볼 생각이었다. 논리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보리스는 자신의 잘 벼려진 감각을 믿었다. 분명 조슈아의 연극을 볼 때 평소보다 기시감이 심했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자료를 이용해 기시감을 자극한다면 기시감을 만들어내는 존재와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조슈아에게 그 자료의 출처가 기억나냐고 물어봤지만, 티치엘이 건네줬던 자료라 출처를 알 수 없다는 답을 들은 뒤였다. 조슈아가 아쉬운 대로 자료 전체 내용을 복사해 준 내용은 아쉽게도 쓸모가 없었고.

이 기시감이 만약 유령의 것이라면, 그래서 가나폴리 유령들의 공간이 이곳까지도 이어져 있다면 자신도 길이 막힌 바다 위에 겹쳐진 유령들의 공간을 통해 잠시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잠시라도 바라볼 수 있기만 한다면.

 

“근데 이건 왜 찾아보는 거야? 교수님도 궁금해하시더라.”

“그냥 궁금해서.”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자료를 넘기기 위해 움직이는 소매가 탁상에 스치는 소리 외에 온전한 정적이 감싼 방에서 티치엘과 보리스는 끈질기게 시간을 보냈다.

 

“티치엘, 이 자료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까?”

“운이 좋으면.”

 

티치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리스의 손에서 자료를 넘겨받았다. 티치엘이 자료를 훑는 동안 보리스는 생각에 빠졌다. 요즘 느끼고 있는 기시감은 꼭 무형의 무언가를 느끼는 느낌이었다. 아주 어릴 적 느낀 나무에 꽂히는 벼락처럼 순식간에 뇌리를 훑고 지나갔던 예지에 가까운 감각과는 달랐다. 달의 섬에서 본 유령들보다도 옅은 존재감의 존재. 마치 허공에 존재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듯.

처음엔 이것 또한 티그리스가 가져다주는 이지(理智)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묘한 감각이 검술에서 비롯되었다면 적이나 아군에게 반응해야 할 것 아닌가. 자신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허공이 아니라.

혹 자신이 윈터러에게 휘둘리고 있는 걸까. 하지만 자신은 최근 전례 없이 검을 훌륭하게 다루고 있었다. 몸이 성장하고 네냐플에서 질 좋은 교양을 쌓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검을 더 다룰 수 있게 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어디라곤 할 수 없지만 어떤 경로로 들어오는지는 알 거 같아. 같은 경로로 들어온 자료들을 찾아줄게.”

“고마워.”

“나는 내일부터 수업에 나가야 해. 자료 목록만 뽑아둬도 충분하지?”

 

보리스는 티치엘의 선의가 쌓아 올린 거대한 목록을 보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가늠해봤다. 포도원지기로선 꽤 파격적인 이득을 준 셈인만큼 다음 자비는 없을 게 뻔했다. 이번 열흘 안에 목적을 모두 해결해야 했다.

 

티치엘이 자리를 뜨자 가냘픈 기시감과 함께 따사로운 햇볕이 보리스의 옆자리를 채웠다. 이 기시감은 자신이 지금 그들의 존재에 대해 자신이 찾아보고 있다는 걸 알까. 보리스는 혹시나 어떤 단서라도 있을까 싶어 촘촘히 읽던 자료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눈이 건조했다.

 

[맞아, 너무하지! 내가 사려는 쪽이라면 3존드 이상은 절대 안 줬을 거야. 하지만 난 파는 쪽이잖아? 최선을 다해 값을 깎을 의무는 당신 몫이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 상대는 큰사슴 잡화의 파비안이거든. 일명 ‘뱃속부터 타고난 점원’.]

 

대체 이런 자료 어디에서 기시감의 출처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길거리에서 흔히 파는 소설로 보이는 게 어째서 포도원에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보리스는 방향을 돌려 차원과 겹쳐진 공간에 대한 자료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남아있는 몇 개를 다시 이공간으로 돌려놓고 대충이나마 뜻을 짐작할 수 있는 글들을 훑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다 아십니다.]

 

앉은키만큼의 자료를 읽었을까, 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중력의 한계가 온 탓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해선 답을 찾을 수 없을 거 같다는 직감 때문일지도.

아무튼 포도덩굴을 따라 땅에서부터 하늘로 눈을 움직이며 걷자니 조금 환기됐다. 꿈과 현실에 반 걸친 듯 몽롱했던 정신이 몸에 안착하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손길이 뚜렷이 느껴질 즈음, 보리스는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이것은 제 삶에 아주 끈끈하게 붙어있다. 이건 호기심도, 탐구심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미련도. 아니, 미련은 아예 없었다곤 못하겠지만. 친구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껴지는 출렁임이 신경을 갉작였다. 이쯤 되자 분명해졌다. 제 삶에 달라붙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있을 수 있는가. 매일 밤 느끼는 고요와 매일 아침 느끼는 소요 속에서? 그런 무의미한 삶은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기시감이 다른 차원에서 오는 것 같다면 시도해보면 될 것 아닌가. 자신은 이미 여러 번 원하는 이공간으로 가서 무사히 돌아왔었다. 설령 무사히 돌아올 수 없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리스는 성큼성큼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이공간이 시작되는 곳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흰 서리가 내려앉은 듯 차가운 윈터러를 꺼내 햇볕에 한 번 비춰 날 선 검신을 확인하곤 품에 끌어안았다.

보리스는 눈을 감고 벽에 기대었다.

 

장대비가 내린 새벽을 지나 맞는 아침 바다처럼 뿌연 길을 보리스는 걸어갔다. 가장 최근의 일부터 지나가는지 네냐플 교정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부터 로글랑탱 파이를 신나게 던지는 모습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하얀 연기가 자신의 다리를 감아 안내하듯 흔들거렸다. 다음으로 나타난 건 루시안이 챙겨줬던 생일선물과 부닌아저씨와 보냈던 시간.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윈터러를 꽉 쥐었다. 하지만 갈 길은 멀었다. 보리스는 연기가 안내하는 길로 계속 걸어갔다. 저 바다 건너에 있을 그리운 사람들이 보였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자신이 웃고 있었다. 나우플리온과 검을 다퉜던 언덕, 이솔렛과 별을 헤었던 그 날 밤의 오두막. 보리스는 제 가슴을 파고드는 뭉툭한 시간을 묵묵히 받아냈다.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렘므의 마을, 벨노어성 도서관의 란지에, 철부지 같았던 로즈니스, 그리고 마침내 롱고르드 초원에서 목검을 들고 웃는 형.

 

모든 추억에 바다의 짠내가 배 있었음에도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시간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환상은, 이상하리만치 친절했다. 나우플리온의 파편을 봤을 때도 나우플리온의 삶 전체를 구다 본 건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곳엔 모든 시간이 기록되어 있는 걸까.

보리스는 윈터러를 고쳐잡았다.

단어로 정리할 수 없는 두루뭉술한 직감이 보리스의 가슴 속에서 몸을 말았다. 예지와도 같은 직감과 아흐레 동안 살펴본 자료들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누구인지 알겠어요.”

 

최근 이 기시감이 막시민과 가까워지면 거세지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또 조슈아에게도 강하게 반응했다가 최근 잠잠해진 이유도.

 

화가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위에 떠 오른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마치 환상과도 같아서 자신조차 의심하게 되는 시간이 존재하는 걸 똑똑히 아는 증인이 생겼다. 그 모든 추억이 오로지 둘의 것도 아니게 되었지만, 오롯이 존재하게 된 셈이다.

 

보리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셨다. 관객만 배우를 보는 게 아니라 배우도 관객을 본 댔던가. 어쩐지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유령이 아니다. 신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쭈욱 지켜봐왔다. 트라바체스의 별 볼 것 없는 롱고로드 초원에서부터 쭉 쫓아왔다. 저택이 무너졌던 밤과 텅 빈 상자가 놓인 전시실에서 샜던 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청동 그릇에 묶어두기로 결심한 밤까지. 그들은 신도 아니고 자신과 연이 닿은 유령도 아니기에 자신을 만질 수 없었지만, 계속 지켜봐왔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꿋꿋이 해왔다. 자신조차 눈 돌리고 싶은 순간을 모두 지나 자신과 함께 왔다. 마침내, 이곳까지.

 

보리스는 말을 골랐다. 술렁이는 가슴이 복잡해서 목구멍이 껄끄러운 탓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동안 그 흙탕물을 갈퀴로 몇 번 긁고서야, 보리스는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찾아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보리스는 그치고 드물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이야기는 끝이 났다. 또 이 거대한 연극도 끝이 날 예정이었다. 퇴장한 주인공은 이제 다시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으리라.

 

보리스는 제 곁을 맴돌다 사그라드는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시선, 그러니까 당신의 시선이 사그라들었을 때 눈을 떴다.

 

옛 바람과 새바람이 보리스의 뺨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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