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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

바람이 분다. 서늘한 기운이 양 뺨과 코끝을 스치고, 꼭 다물린 입을 통해 비로소 언어가 된다. 폐부까지 시린 차가운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본다. 위쪽의 어둠과는 달리 아래의 빛은 저토록 찬란하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저 아래는 이곳보다 훨씬 더 뜨겁고 무더울 지도 모른다.

  란지에는 빙판 위에 모양을 덧그리며 전진하는 스케이터를 눈으로 좇았다.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잔뜩 날이 서린 듯 매서운 빛은 그의 눈동자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본분을 잊어도 되는 때였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움직임을 수용했다.

 

 

  “열심이네.”

 

 

  같은 자세로 앉아있던 세 사람 중 가장 안쪽에 앉은 이가 조각 같은 움직임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응. 곧 시즌이잖아. 전지훈련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그림 같이 앉아있던 이가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맞장구를 쳤다. 가장 바깥쪽에서 조슈아와 티치엘을 차례로 흘깃 쳐다본 란지에는 각자가 말한 대상이 서로 다름을 곧 알아차렸지만, 이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쪽이 더 나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게 더 나았다.

 

 

  “끝까지 확인해! 원, 앤, 쓰리, 턴, 끝까지! 앤, 둘, 점프!”

 

 

  가슴에 검은색 끈으로 된 하네스 재킷(harness jacket)을 입은 선수가 활주로 얻은 속력을 죽이지 않은 채 빠르게 코너로 향했다. 코치의 지시대로 끝까지 프리 레그를 뒤에 두었다가, 도약하는 순간에 무릎을 굽히며 앞으로 가져온 스케이터는 힘차게 팔을 감았다.

  도약한 그 순간, 관중석에 나란히 앉아있던 세 사람의 표정은 모두 같았다. 회전축만 봐도 온전히 랜딩하기 어려울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선수는 코치의 말을 ‘끝까지’ 기억해낸 덕인지, 불안정하긴 하지만 저렇게 뒤로 빠진 축에 있어서는 최선의 플로우로 기어코 착지를 해냈다. 토픽부터 떨어지며 굵게 자국을 내는 소리가 한쪽 구석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저 정도면 허벅지와 발목 힘으로 버텼다고 봐도 무방했다.

 

 

  “체크(check) 더 끝까지 아웃으로!”

 

 

  그 말에 중립을 지키며 두 줄로 마크를 남기던 엣지가 바깥으로 기울어지면서 작은 반원을 그렸다. 계속해서 끌린 토픽으로 인해 저항이 커지며 속도가 줄어든 탓이었다. 가죽, 혹은 합성피혁으로 만든 부츠 아래에 달린 날은 짧고, 곡선형을 띠고 있었다. 날의 가장 앞쪽에는 뾰족한 토픽이 있어 적절하게 쓰기만 한다면 점프를 높이 뛰거나 속력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스피드 스케이팅용 날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단언컨대, 엣지(edge)였다. 손가락 끝으로 날을 가만히 쓸어보면 날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수평과 수직 방향으로 날을 쓸어도 두 갈래로 갈라지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면, 날을 연마해야 되는 때였다. 적절하게 엣지를 활용할 수 없을뿐더러, 쉽게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의 오목하게 들어간 가운데를 기점으로 몸의 중심과 가까운 쪽은 인사이드 엣지, 먼쪽은 아웃사이드 엣지라고 부른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점프인 러츠의 깊은 아웃 엣지 때문인지, 깊은 엣지를 써야만 엣지를 잘 쓰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플립은 중립에 가까운 인 엣지로 도약하는 것이 규정이다. 오히려 깊은 인 엣지로 도약하면 롱 엣지(wrong edge)나 어텐션과 같은 엣지 콜(edge call)을 받기 십상이다.

  엣지 콜을 받은 점프는 잘못 뛴 점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뛰기 쉬운 점프는 아니다. 다만 규정집에 기재된 6종의 점프로부터 아주 약간 빗나갔을 뿐이다. 잘못 뛴 점프는 선수의 의도가 아니고, 편법이 아니며, 중죄가 아니다. 스케이터가 점프를 잘못 뛰었다면 그 잘못을 인지하고 수정하면 되는 일이다. 습관은 관성이기에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매우 어렵고 고되지만, 끝내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을 겪어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마침내,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코치와 오피셜이 있을 것이다.

 

 

  “끝까지 버티는 건 잘했어! 지금까지 하네스 풀고 혼자 뛰었던 점프 중에서는 괜찮았는데, 응. 프리 레그 가져와서 찰 때 몸이 계속 말리네? 다리를 가져왔으면 그대로 위로 뛰어야 되는데, 방금도 보면 돌려서 차고 있잖아. 쓰리 턴(three turn) 돌고 끝까지 중심 잘 잡았어도 막판에 돌려서 차니까 도약하는 순간에 중심을 잃고 축이 휘게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옆이 아니라 위로, 앞으로 뛰는 거야. 악셀 뛸 때처럼.”

 

 

  루시안은 조금 전 점프를 뛰었던 선수가 지나왔던 자리에서 그대로 쓰리 턴을 한 뒤 오른쪽 다리를 힘껏 위로 올리며 뛰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넘어지는 거, 속도 내는 거 무서워하지 마. 방금도 들어갈 때 속도가 너무 나니까 감당 안 될까봐 무서워서 그런 거지? 쿼드는 속도 안 나면 비거리도 안 나오고 높이도 안 나와서 못 뛰어. 공중자세랑 버티는 힘은 좋았으니까, 돌려 차지 않는 거! 신경 써서 런 스루(run through) 하기 전에 쿼살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혼자 해보자.”

 

  “네.”

 

 

  루시안은 싱글 선수 치고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현역에 있었다. 3번의 올림픽을 경험했고, 마지막 무대에서까지 모두에게 흐뭇한 웃음을 주며 은퇴했다. 지금은 전지훈련지로 유명한 네냐-야플리아 FSC에서 점프 코치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루시안은 지금까지 메인코치로 이름을 올린 적은 없지만, 요즈음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선수들의 경기성적을 제 온몸으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하네스 훈련을 할 때 루시안이 줄을 잡고 선수들을 들어올리기 때문이다.

하네스 훈련은 점프를 뛰는 감각을 익히고자 할 때 시행하는 훈련이다. 보통은 회전이 필요한 새로운 점프를 익힐 때, 부상 예방 차원에서 시행된다. 빙상에서 하는 하네스 훈련은 실전에 필요한 감각을 익히고 부상 위험을 낮추기 위해서, 지상에서 하는 하네스 훈련은 빠르게 공중에서 회전하는 동안의 공중자세를 바로잡고 균형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행해진다.

 

 

“딱 봐도 누구 제자인지 알겠다. 숯가마네 팀 전훈 왔냐?”

 

“막군! 오면서 보니까 페어 대관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던데 일찍 왔네?”

 

“링크에 ISU 오피셜 떴다고 소문나서 와봤다.”

 

 

너네 다 지금 여기서 뭐하냐? 난 또 클럽에 무슨 일이라도 터진 줄 알았네.

계단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던 막시민이 괸중석 안으로 들어와 란지에 옆에 앉았다. 정말 어디에서 소문이라도 듣고 바로 온 것인지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슬리퍼를 질질 끄는 모습이 나란히 앉은 세 사람과는 확연히 대비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미나 끝나고 바로 가기 아쉬워서 구경 왔어! 그나저나 우리 여기 온지 1시간도 안 됐는데 소문 진짜 빠르다. 막시민 잘 지냈어?”

 

“나야 항상 똑같지 뭘. 셋이서 정장 쫙 빼입고 와서는 소문이 안 나게 생겼어? 어떻게 조합도 저지(judge) 셋이 아니라 너네냐. 지금 저 위에 창문에 사람들 다 달라붙어서 구경 중인 거 보이지?”

 

 

막시민이 뒤도 안 돌아보고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열댓 명은 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저들을 보며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금세 곤란한 표정이 된 조슈아가 문밖의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우리, 사진 찍혔어?”

 

“아마도. 그래서 그거 알려주려고 왔다.”

 

“우리 진짜 구경만 하러 온 건데. 고마워. 잠깐 지나갈게.”

 

 

가장 안쪽에 앉아있던 조슈아가 곧장 일어나 세 사람이 앉아있어 더욱 좁아졌던 관중석을 긴 다리를 휘적거린 끝에 겨우 빠져나갔다. 덕분에 티치엘과 란지에, 막시민은 차례로 파도를 타는 것처럼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앉아야만 했다. 매체 노출과 관련한 건은 레프리(referee)인 조슈아 선에서 처리할 문제였다. 비시즌이고, 대회나 승급 심사 중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특히 경기 후 시상식에 참여해야만 하는 레프리와 테크니컬 컨트롤러(technical controller)는 이미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물론, 조슈아와 란지에는 노비스 시절부터 유명했으니 이제는 더 알려질 곳도 없기는 했다. 그건 그 시절부터 시니어로 은퇴할 때까지 꾸준하게 성적을 내온 티치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셋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이렇게 대낮부터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클럽을 찾은 것이 무모했다는 뜻이다.

가벼운 소란을 뒤로 한 채 먼저 입을 연 것은 란지에였다.

 

 

“오를란느에서 여기로 온 지 꽤 됐나 봐.”

 

“그닥? 이제 1달 됐다.”

 

“…….”

 

 

란지에가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자 막시민이 뭔가를 알아차린 듯 붉은 눈동자를 한동안 응시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봐. 코치 일에 미련 있지?”

 

“…….”

 

“티치엘, 얘 아직도 그러냐?”

 

“음...조금? 스포츠 이사님은 란지에가 그러는 거 오히려 더 좋아하시던데.”

 

“그러셨겠지. 오피셜의 의무를 아주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셨겠지.”

 

 

오피셜 중 테크니컬 컨트롤러와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technical specialist)는 대회 준비를 위해 연습 세션에 ‘충분히’ 참여해야 한다. 이 때 연습 세션에 어느 정도로 참여를 해야 충분하게 참여를 한 것이라는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테크니컬 패널은 그럭저럭 적당히 참관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내 경기인 경우에는, 국가에 따라 공식연습 기간 동안 테크니컬 패널이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연습 세션에 참가하지 않은 경우에는 평점이 깎이며 오피셜에서 제명당할 수도 있었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충분한’ 참여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잡혀있지 않다보니 이와 같은 사유로 제명당하는 오피셜은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란지에는 기술위원회나 스포츠 이사가 보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의무를 이행 중인 오피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이쪽 업계에서는 공식 연습 시작 전부터 선수 퇴장 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목석 같이 앉아있는 오피셜로 유명했다. 켈티카가 낳은 자랑스런 테크니컬 컨트롤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지만. 란지에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의도적인 침묵을 깨지 않은 채 막시민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막시민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나랑 패트릭,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 나간댄다.”

 

“너무 잘 됐다! 이제 계속 아이스댄싱 하는구나.”

 

“...벌써 그럴 나이가 됐나?”

 

“야, 너도 올해 32살이거든? 네가 나이 먹은 만큼 걔네도 나이 먹거든?”

 

“처음 봤을 때는 애나가 2살이었는데.”

 

“나도 기억나. 란지에가 매일 스케이트 신겨주고 헬멧 씌워서 락커룸에서부터 안고 다녔잖아. 정말 많이 크긴 했다.”

 

“그건 또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데?”

 

“아, 란지에 코치였을 때 란지에 팀 아이들 타임 레슨 해주러 간 적 있거든. 작품 주러. 그 때 란지에 싱글 선수들도 가르쳤잖아.”

 

“발도 넓다. 프로그램 주러 거기까지 가?”

 

“몰랐어, 막시민? 내 발 압축성이 좋아서 선수시절에 스케이트화 발볼만 프레스기로 계속 넓혔었잖아. 그 때 같이 넓어졌나봐.”

 

“…….”

 

 

막시민이 떫은 표정으로 제 옆에 앉은 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란지에조차도 쉽게 맞받아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란지에는 괜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그 루비 같은 눈동자만 도로록 굴려 양옆에 앉은 이들을 차례로 보다가, 갑작스럽게 차게 내려앉은 기류를 애써 무시한 채 먼저 입을 열었다.

 

 

“지스카르 선생님은 잘 계시지?”

 

“오냐. 언제 물어보나 했다. 기다리다가 홀랑 다 까먹을 뻔했다.”

 

 

란지에는 아노마라드 국적의 선수였고 지금도 아노마라드 국적의 오피셜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선수 시절 주 훈련지는 오를란느의 로사 알브였다. 피겨 학교 등의 인프라가 이미 탄탄하게 갖춰진 아노마라드에서 타국으로 팀 이동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매우 드문 사례였다. 심지어 란지에는 싱글 스케이터로 주니어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아이스댄스로 출전 종목을 바꿨음에도 로사 알브에 남아있었다.

지스카르 드 나탕송은 당대 패기 넘치던 싱글 스케이터로, 트리플 악셀 랜딩 후의 부드러운 착지 플로우로 이름을 날린 선수였다. 그러니 아노마라드 국내 피겨 팬들은 경기장에서 점프를 뛰지 않는 종목으로 전향한 란지에가 로사 알브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자국의 많고 많은 아이스댄스 코치진들을 남겨두고 세보 남매에게로 팀 이동을 하자, 세간에서는 오를란느 빙상 연맹이 로젠크란츠 남매를 귀화시키려고 한다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그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정작 오를란느로 귀화한 건 란지에가 아니라 막시민이었다. 막시민이 시니어 데뷔를 코앞에 두고 페어스케이팅으로 종목 변경을 한 것도 모자라, 오를란느 국적을 취득하였다는 소식은 아노마라드 피겨 팬들을 대혼란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시니어 데뷔 예정인 국가대표 싱글 선수를 무려 두 명이나 동시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선생님 이제 은퇴하신대?”

 

“은퇴 생각이 있는 양반이었으면 진즉에 하셨겠지.”

 

“...또 이번 올림픽까지만 봐주고 은퇴하겠다고 하시는구나.”

 

“어. 아직 스케이트 벗을 생각도 없으신 것 같더라.”

 

“그래도 건강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

 

“히스 할아범이나 네 스승님이나 다 왜들 그러시냐. 나였으면 환갑에 은퇴해서 잠이나 실컷 자고 맛있는 거 실컷 먹으면서 노후를 즐겼을 거다.”

 

“어머, 현역 선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동감이야, 티치엘. 그래서 너는 ‘또’ 이번 올림픽 시즌까지만 하고 은퇴할 거라고?”

 

“...드디어 너희가 생사람을 잡는 데에 도가 텄구나. 그렇지. 그러니까 테크니컬 패널을 하지.”

 

“고마워. 요소 확인을 잘 한다는 칭찬으로 알아들을게!”

 

“…….”

 

 

막시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두 오피셜을 바라보고 있을 때 즈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뚝 끊기듯이 멈추었다. 곧 선수들이 각자의 작품을 맞춰볼 예정이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음악이 멈추자 링크장에서는 오직 얼음을 빠르게 가르는 소리만이 가득 울렸다. 은퇴한지 벌써 몇 년이나 됐건만, 티치엘은 아직도 이 순간을 가슴 뛰어했다. 그의 눈에서 물안개가 싸늘하게 피어오른 새벽의 은반이 언뜻 비치는 듯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루시안이 각자 연습 중이던 선수들을 부르며 말했다.

 

 

“얘들아, 프로그램 맞춰볼 거니까 이제 준비해! 오늘 누구부터 한다고 그랬지?”

 

“저요!”

 

“밸런스 게임 시작! 쇼트 4번 연속으로 하기 대(對) 프리 3번 연속으로 하기! 셋, 둘, 하…….”

 

“프리 3번 연속으로 하기요!”

 

“그래, 프리부터 하자? 보리스, 들었지? 프리 먼저 세 번 한대!”

 

“어...?”

 

 

얼떨결에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는 프리 프로그램을 세 번씩이나 연속으로 하게 된 선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안은 태연하게 다른 선수들을 링크 밖으로 내보내고 본인까지 나간 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는 동안 관중석에 자리한 세 사람, 아니 이제 다시 막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조슈아까지 네 사람은 웃느라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조슈아는 계단 난간을 부여잡은 채로 거의 쓰러져있었다.

뒤늦게 현장을 목도한 조슈아가 바람인형 같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바람인형의 침입으로 세 사람은 다시 때 아닌 파도타기를 해야만 했다.

 

 

“어떻게, 흐윽, 하...루시안은 저렇게 20년 동안 한결같을 수가 있지. 오자마자 다리에 힘 풀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난 아직 프삼쇼사가 먹힌다는 것도 너무 웃겨. 저거 정말 우리 때 코치님들이 써먹던 훈련 수법이잖아!”

 

“아무래도 저 선수, 방금 루시안이 했던 질문이 조삼모사인 거 이제야 이해한 것 같은 표정인데.”

 

“아 진짜, 웃긴 자식일세. 결국 이렇게 또 프리 세 번에 쇼트 네 번 하는 걸 보겠구먼. 쟤네 팀 런(run) 오래 하겠다. 란지에 너 무릎 안 시리냐?”

 

“아직은 괜찮아.”

 

“있어봐. 연마실에 지금 이스핀 있는데 담요 가지고 오라고 할게.”

 

“이스핀도 여기 있어?”

 

“내가 소문을 어떻게 알고 여기에 왔을 거라 생각하냐. 발 빠른 정보원이 있으니까 온 거지.”

 

 

 

 

 

*

 

 

 

 

 

“계속 이러고 앉아만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난 아직 은퇴하기에는 멀었나 보다.”

 

“그게 무슨 깜찍한 소리야. 우리 나이에는 ISU 성인 아마추어 대회도 나갈 수 있는 거 몰라?”

 

“그거 28살부터 37살까지 같은 연령대 그룹으로 묶이더라. 우리 38살에 은퇴하고 연령 그룹 Ⅱ로 대회 나가볼까? 여기 같이 앉아있는 애들만 안 나가면 우리가 무조건 금메달인데. 아 참, 얘네 오피셜이라 대회 못 나가지. 딱 좋다.”

 

“좋긴 뭐가 좋아. 그 나이까지 트리플 뛰라고?”

 

“못할 건 또 뭐야? 생각해봐. 지금 우리가 서른둘인데, 솔직히 5년 뒤에도 트리플 감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난 장담 못한다.”

 

“못하면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5년 그까짓 거,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는 거 알잖아. 쉰에도 더블 악셀 뛰는 거 못 봤어?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봐야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이날 막시민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스핀의 ‘할 수 있을 때까지’는 71살 혹은 그 이상까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ISU 성인 아마추어 대회에서 분류하고 있는 연령대 기준의 마지노선이 71살이기 때문이다.

꽤나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어낸 이스핀은 뿌듯한 미소를 한 번 지어보이고는 그 옆에 앉은 이에게 물었다.

 

 

“란지에, 네 동생 요즘 컬링 한다고 했었나?”

 

“란즈미 요즘 컬링도 해? 양궁 하는 거 아니었어?”

 

“둘 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얘 동생 사격 선수잖아.”

 

 

세 사람이 일치되지 않는 정보로 인해 혼란스러워할 때 즈음, 란지에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 종목 다 해.”

 

“뭐라고?”

 

“란즈미, 컬링, 양궁, 사격 다 한다고.”

 

 

로젠크란츠 남매의 선수생활은 이른 나이에 막을 내렸다. 한철, 짧게 피었다 져버린 이름 모를 꽃처럼. 그건 비극적인 사고 때문이었다. 란즈미는 외상으로 인해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란지에는 지금도 종종 링크장에 오래 앉아있으면 온몸의 관절에 시린 듯한 통증을 느끼고는 했다. 은퇴 후 코치로 오래 활동하지 못했던 궁극적인 이유도 통증 때문이었다.

난방 시스템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온종일을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 위를 누비며 어린 선수들을 가르친 뒤에는 잠 못 이룰 통증으로 며칠 밤을 꼬박 새야만 했다. 그러다 겨우 눈을 붙였다 뜬 어느 날, 란지에는 극심한 통증으로 걸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잘 떨어지지도 않는 걸음을 이고서 꾸역꾸역 택시를 타고 빙상장으로 간 그는, 그날 펜스 밖에 앉아서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스케이트를 신고는 있었지만, 팔과 손으로 대부분의 것을 설명하려니 답답했다. 그래서 펜스의 문 하나를 열어둔 채 병 매직으로 빙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부족한 설명을 보충했다. 그는 아직 파랗고, 빨갛고, 검은 선들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 시즌이 끝나고, 한 팀의 코치로서 비시즌을 맞이한 란지에는 어느 날 아침, 일어날 수 없었다. 서있는 것이 힘들었다. 그 날 란지에는 코치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로 인하여.

 

 

“취미로 댄스스포츠도 해.”

 

“뭐라고?”

 

“은퇴한 아이스댄스 선수가 댄스스포츠를 못할 이유는 없지. 오히려 경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더 잘하는 것 같아.”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간 란지에는 쓰게 미소를 지었지만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는 본래 선수수명이 길지 않았다. 이스핀과 막시민과 같은 페어스케이팅, 그리고 로젠크란츠 남매와 같은 아이스댄스 선수들만이 간혹 서른을 넘겨서도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싱글 스케이터들의 선수수명이 약간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많아도 20대 중후반에는 은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피겨스케이팅의 세대교체는 여느 종목보다도 빨랐고, 어린 선수들은 무섭게 성장했다. 거기에 더해 최근 몇 차례 규정이 개정되면서 관록만으로는 자라나는 어린 선수들을 당해낼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티치엘은 ISU 등급의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 점수만을 중시하는 이 세대를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단순히 기술요소 자체를 중시했다면 이렇게까지 안타까워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개정된 규정의 대표적인 희생양이 플립과 러츠, 그리고 타노 점프였다. 트리플 이상의 플립과 러츠 점프는 이제 기본점수가 같았다. 아웃 엣지로 뛴 플립 점프는 이제 러츠로 호명될 것이고, 인 엣지로 뛴 러츠 점프는 이제 플립으로 호명될 것이다. 도약 시 선수의 의도를 읽어내지 않는 이상 둘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웠고, 엣지 콜을 받지 않는 이상 점수에는 차이가 없으니 코치들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선수들은, 은퇴할 때까지, 혹은 이를 신경 쓰는 코치를 만날 때까지 본인이 어떤 점프를 뛰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을 것이다.

타노 점프도 마찬가지였다. 점프 중 한 팔이나 양 팔을 들어 올리는 타노 점프는 본디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자, 점프를 잘 뛰는 선수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여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세대의 선수들은 오직 GOE(가산점)를 위하여 팔을 들어올린다. 그렇게 조급하고 성급하게 들어 올린 팔은 아름답지 않았고, 여유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팔을 들어 올리고도 회전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팔을 드는 것이 아니다. 회전수가 부족하더라도 팔을 들어야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팔을 드는 것이다. 그렇게 뻗은 팔은 수직에 가깝게 굽어 있기에, 세간에서는 이를 헬리콥터 점프라고도 불렀다. 잘못 뛴 러츠는 플립의 엣지와 유사하다고 하여 ‘플러츠(flutz)’라고 불렸지만, 이 세대에서 플러츠는 플립과 러츠를 총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티치엘은 이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레프리를 포함한 저지와, 테크니컬 패널이 바로잡지 못한 기술요소의 부정확함은 과도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과열된 경쟁은 어린 선수들의 부상으로 이어진다. 만약 정말로 이 세대의 코치들에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쳐낼 수 있는 자정능력이 부족하다면, 흐름을 쥐고 뒤바꿔놓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근간은 ISU 오피셜 뿐이다. 내셔널 등급의 오피셜로는 안 된다. 국제 단위의 변화, 즉, 제가 속한 국제 연맹에서부터 변화가 이뤄져야 모두가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티치엘을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한 절대적인 신념이자 사명이었다.

 

 

“...오늘 빙상훈련도 고생 많았고, 힘들어도 스케이트 벗고 스트레칭 하고 쉬어. 저녁 먹고 안무연습실에서 보자. 수고하셨습니다.”

 

 

세 명의 오피셜이 관중석에 앉은 지 2시간 남짓 지났을 무렵, 정빙기가 아이스링크 펜스의 큰 문을 열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리스 팀의 공식 대관 시간 종료를 알리는 행위였다. 보리스와 루시안은 팀 선수들이 전부 날집을 챙겨 펜스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링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네스 폴(pole)을 펜스에 적당히 기대게 해두고 블레이드에 날집을 끼우던 루시안은 그제야 관중석에 나란히 앉은 다섯 사람을 발견한 듯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뭐야, 너희 왜 다 모여 있어? 언제 왔어? 온다는 말 못 들었는데!”

 

“2시간 전에 ISU 세미나 끝나고 놀러왔댄다.”

 

“헐! 그 때부터 있었어? 그러면 보리스네 아가들 대관하는 거 거의 다 봤겠네? 온다고 미리 말해주지!”

 

 

화면으로는 항상 봤지만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인지 루시안은 더욱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는 동안, 보리스가 루시안이 잠시(?) 두고 간 하네스 폴을 챙겨 관중석으로 향하는 층계를 올라왔다.

 

 

“루시안, 이번주에 네냐플에서 ISU 세미나 한다고 프론트에 붙어있었잖아.”

 

“아, 정말? 나 왜 못 봤지?”

 

“오피셜이 링크장이나 훈련장을 대관해서 세미나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크게 신경 안 썼겠지. 모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보리스는 조슈아, 루시안과 같은 시기에 포디움에 나란히 섰던 싱글 스케이터였다. 정석적인 엣지와 토픽의 사용, 높은 랜딩 성공률로 트라바체스에 올림픽 출전 티켓을 안겨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피겨스케이팅 전용 아이스링크를 포함하여 제대로 된 훈련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트라바체스의 남자 싱글 올림픽 출전 티켓 2장은 그 어느 종목보다도 값진 출전권이었다.

그는 노비스와 주니어 시기에 걸쳐 아이스댄스 선수로 전향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결국 트라바체스 빙상 연맹과의 협상 실패 및 귀화 실패로 인하여 좌절되었지만. 당시 보리스는 국가나 연맹으로부터 그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자비로 전지훈련을 다니고, 국제 대회 출전을 했었기에 트라바체스의 피겨 팬들은 “연맹이 재능 있는 선수 하나 책임지고 육성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못 가게 붙잡아두느냐”라며 분개했었다. 실제로 보리스는 그 어떠한 선수보다도 다양한 도시와 국가에서 전지훈련을 했던 선수로 유명했다. 코치가 된 지금까지도 그의 팀은 1년 중 8개월 이상을 트라바체스 밖에서 훈련하며 지낸다. 트라바체스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가 추운 링크는 아니지만,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 상태로 사진을 찍으면 도대체 지금이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없을 것 같군.”

 

“조군, 다음 대관 누구라고?”

 

“네냐플 학생들 엣지 스킬 강화 수업. 정규레슨이던데.”

 

“너희 정규레슨도 보러 온 거 아니냐?”

 

“아, 코치 락커룸에서도 문만 열어놓으면 링크장 상황이 보여! 지금 정빙기 들어왔으니까 아마 학생들 스케이트 신고 있을 것 같은데 빨리 안으로 가자. 이제 너희 감기 걸리면 어렸을 때보다 훨씬 더 고생한다?”

 

 

 

 

 

*

 

 

 

 

 

“어, 보리스 새 부츠네? 이거 전에 신었던 모델 아니지?”

 

“응. 코칭도 하고 작품도 주다 보니까 생각보다 금방 무너져서. 원래 신었던 브랜드에서 새 선수화 모델이 나와서 바꿔봤어.”

 

 

코치 락커룸에 들어온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보리스와 루시안의 스케이트는 끈이 풀리고 닦이고 털날집까지 씌워진 상태였다. 보리스는 사물함에서 제습제를 꺼내와 바닥에 가지런히 두었던 제 스케이트 안에 넣었다. 선수시절에는 웬만해서는 제습제를 쓰지 않고, 끈을 끝까지 풀어 부츠의 혀(tongue)를 노출시킨 뒤 그늘진 곳에서 자연건조시키는 방법으로 부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제 코치가 된 두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코치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부츠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보리스가 스케이트를 보관함으로 옮기기 위해 신발을 신으려고 했던 그 때, 막시민이 말했다.

 

 

“둘 다 어떻게 그렇게 20년 동안 한결 같냐.”

 

“아까 프삼쇼사를 말하는 건가?”

 

“그건 본인도 잘 아네. 그건 그것대로 그렇고, 너 아직도 양말 그렇게 뒤집어 신냐?”

 

 

막시민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봉제선이 밖을 향하도록 양말을 뒤집어 신은 두 발이 있었다. 보편적인 방법으로 양말을 신으면 스케이트를 타는 동안 양말의 봉제선이 발가락과 발톱을 눌러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양말을 뒤집어서 신고는 했다.

물론, 이건 옛날 얘기였다.

 

 

“양말을 이렇게 안 신으면 어떻게 신는다는 거지?”

 

“왜, 요즘 무봉제 양말도 많이 나왔더구먼. ‘피겨 전용 양말’이라고 아예 이름을 붙이니까 용품점에서는 고작 양말 한 켤레를 비싼 값에 팔지만.”

 

“우와, 막시민 왜 이렇게 잘 알아? 막시민 혹시 요즘 유행 따라서 날집도 시즌별로 새로 장만하고 그래?”

 

“그건 요즘 애들이나 하는 거고. 난 그런 거에 관심 없다. 자고로 구관이 명관인 법이지.”

 

“그렇구나. 어, ‘요즘 애들’ 이제 링크장 들어간다.”

 

 

루시안이 반쯤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특정 단어를 강조했음을 알아차린 막시민은 한숨을 푹 쉬고는 루시안을 따라 아이스링크로 시선을 옮겼다. 막시민 옆에 앉아 작게 키특거리던 조슈아가 보리스에게 물었다.

 

 

“아노마라드로 다시 온지 얼마나 됐어? 5월에도 잠깐 한 달 정도 왔다갔던 것 같은데.”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어. 훈련 시작한지는 오늘이 닷새째고.”

 

“선수들은 시차적응 어느 정도 됐겠네.”

 

“…….”

 

 

조슈아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아차린 보리스는 그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코치로서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가르치는 거, 생각보다 힘들지? 아마 내가 우리 누나를 가르치거나 네 형이 너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 거야. 누나는...내가 가르칠 필요가 없었으니 논외로 칠까."

 

"레프리로서 조언하는 건가?"

 

"'레프리인 나'는 조언할 수 없어. 함부로 개입해서도 안 되고. 빠른 시일 내에 깨닫기를 바랄 뿐이야."

 

"……."

 

"어려운 거 알아. 하지만, 네가 시작하게 했다면, 무사히 끝내게 하는 것 또한 너의 몫이야. 혹은, 무사히 마치게 하거나. 나는 네 판단을 믿어."

 

 

조슈아가 싱긋 웃으며 보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한 번 쳤다. 그러나 결코 그 내용만은 가볍게 흘려들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코칭은 책임이다.

피겨스케이팅의 기원은 피겨(figure), 즉 형태를 따라 스케이팅을 하는 것이다. 빙판에 다양한 직선과 곡선을 그려놓고 그 형태를 따라 얼마나 정확하게 스케이팅을 하였느냐를 기준으로 승자를 가르고는 했다. 이를 컴퍼서리 피겨(compulsory figure)라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형태의 경합 방식은 각 국가에서 치러지는 승급 시험의 컴퍼서리 요소 심사, 그리고 스페셜 올림픽의 예선격인 스킬 컴피티션(skills competi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피겨, 즉 점프를 뛰고 스핀을 돌고 스텝을 밟는 형태의 경합 방식은 공식적으로 치러진지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다.

 

 

“공주님, 쟤네 지금 설마 챡토(chocktow) 하는 거야?”

 

“브라켓(bracket)도 하는데?”

 

“다시 우리 선수시절로 돌아간 것 같고 너무 좋다! ‘요즘 애들’은 저런 스텝 트랜지션(transition)에도 잘 안 넣는데.”

 

“란지에, 지금 저기 빙판에 그리고 있는 저게 카운터(counter)인가?”

 

“아니, 저건 로커(rocker).”

 

“...그게 구분이 되냐? 하여간 아이스댄싱 했던 애들은.”

 

“…….”

 

 

문 밖으로 보이는 어린 선수들이 그러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꿈나무 선수 시절이 있었다. 일어나서부터 잠에 들 때까지, 혹은 꿈에서까지 그들이 사랑하는 것만을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내일은 발목에 힘을 주고 점프를 뛰어야지, 내일은 카멜 포지션(camel position)에서 머리와 다리를 조금 더 위로 들어야지, 내일은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끝까지 공중자세 유지해야지, 내일은 무게중심을 너무 앞으로 두지 말고 깔끔한 일(一)자 선이 나오게끔 엣지를 써야지, 내일은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전력을 다해 연기해야지, 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내일은 더 잘해야지. 정신없이 곯아떨어지면서도 그렇게 속으로 주문을 외며, 다리를 찢고 허리를 늘려가며 잠을 잤던 것 같다. 그렇게 잠에 빠지면 꿈속의 자신은 그토록 어려워했던 스핀을 수십 바퀴를 돌고, 그토록 무서워했던 점프를 두려움 없이 훨훨 뛰었다. 그렇게 다짐하고 꿈꾸었던 수천, 수만 날의 밤이 모여 지금의 그들을 구성했다. 설령 이 길을 몇 날 밤만을 지새우며 왔다갔대도, 그 길을 가기 전과 후의 그들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다를 터였다. 그러니, 이 길을 마치지 못하고 끝내버린 이들에게도 박수갈채가 쏟아져야 마땅했다. 결단을 내린 이들은 용기 있는 자이다.

빙판을 빠르게 가르는 것만이 피겨스케이팅은 아니다. 높이 뛰어오르는 것만이, 더 유연하게 다리를 드는 것만이, 가속력을 얻어 회전하는 것만이, 중력에 저항하는 것만이 피겨스케이팅은 아니다.

우리는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갈 것이다. 챡토, 브라켓, 쓰리 턴, 모흐크 턴, 토 스텝, 버니 홉, 백 턴, 쓰리 스텝, 크로스, 써클 에이트, 루프, 로커, 카운터, 트위즐, 스파이럴……. 그렇게 아웃에서 인으로, 다시 인으로, 인에서 아웃으로, 인으로, 다시 아웃으로. 그리고 인 엣지로.

마침내 우리는 언젠가 각자가 남긴 형태를 뒤돌아볼 것이다.

피겨인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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