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bbatical
눈화
무엇 하나를 위해 움직이지도 않던 몸이 움직이기 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흐레정도였다. 조금씩 물을 마시고, 미음을 넘기고, 움직여지지 않는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넘길 수 있는 책을 한 장씩 넘겨가며 또렷한 정신에 비해 미동하지 않던 몸을 천천히 회복했다. 겨우 그러고도 지쳐 움직일 수 없을 때엔 작은 창에 난 바깥을 바라보았다. 인적이 드물고 평화로운 농가의 작은 밀밭, 들풀과 나무들, 그리고 시간마다 바뀌는 하늘. 물론 하늘의 빛은 밝고, 구름은 희고, 태양은 따사롭고, 달은 낮에도 뜨고, 별이야 말로 밤에만 비치는 것이라 해도 란지에가 그것을 실제로 바라본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인 동시에 오랜만의 일이기도 했다. 한 숨 돌릴 여가야 많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쉴 여가는 없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이제는 할 일도 없다.
「좋아져야지요, 할 일도 많은데.」
어째서 인지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싶은 이유로 만연하게 번진 지스카르의 표정이 잊혀 지지 않았다. 말을 잃을 만한 일을 당한 것은 자신인데 순간이나마 지스카르가 상실해버리게 한 것이 착잡했다. 곧, 그것이 들키지 않도록 부러 엄한 표정을 짓는 것에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란지에는 나이답지 않게 조급하지 않다. 그만큼 상황을 잘 이해하고 기다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은 찰나가 필요하고 큰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긴 시간이 아닌 삽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염두 역시 할 줄 알았다. 세간의 인식과 제 선택에 의한 현 몰골에 따르면 자신은 그저 어린애가 아닌가. 하지만 할 일이 많은 어린애이기도 했다.
호화스럽게도 란지에의 왼손에 마법사 몇 명이 붙어있을 동안 뒷골목의 아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죽는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굶어 빌어먹는 것으로 연명하다가 병에 걸려 아무 것이나 손에 닿는 대로 주린 배를 채우다가 죽는다. 저가 오늘 차마 다 삼키지 못한 미음 한 그릇이면 두어 명이 오늘을 살 수 있는데도. 인간은 모두 동등하며 같다는 사실을 갈구해 제 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뜻하지 않게 호화로웠고, 뒷골목의 아이들은 비루먹어갔다.
지스카르는 정말 철저하게 란지에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아무 생각보다는 ‘놀고 먹게’라는 말에 더 가까웠다. 가져다주는 책은 전부 평화롭고 아름다운 환상 속의 꾸며낸 이야기여서 깊이 생각할 맛이 나지 않았고 란즈미는 먼저 로사 알브로 향해 몸이 멀쩡해지기 전엔 만날 일도, 걱정할 일도 없었다. 함께 겪어온 세월 탓에 온 세상을 선심善心으로만 바라보지는 않겠지만 몸만은 여즉 약한 아이가 지금의 란지에를 보면 쓰러질지도 모른다. 란지에 역시 어린 여동생에게 제 몰골을 보여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스카르가 잘 보호할 것이다. 자신보다 더.
그래서 란지에는 할 것이 창밖을 바라보며 꾸준히 회복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일 중독이라고 놀리던 지스카르처럼, 자신의 할 일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회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란지에는 잘 먹고, 잘 쉬고, 잘 잤다. 해야 하는 일이고, 유일하게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조금 열려있는 덧창 사이로 부는 차가운 바람에 한껏 약해진 폐가 들썩였으나 닫고자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면 세상이 멈추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지금까지 한 일의 결과는 오지 않을 걸세. 앞으로 해나갈 일은 없을 걸세. 이제부터 시간은 흐르지 않네. 자네는 아주 오랫동안 쉴 수 있을 걸세.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원한다면 영원히 쉬고 나서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세.」
당한 무게와 힘에 부쳐 언젠가 다가올 다디단 안식을 기다리고 갈망하는 사람은 아니다. 란지에가 굳이 올려다보지 않더라도 하늘의 빛은 밝고, 구름은 희고, 태양은 따사롭고, 달은 낮에도 뜨고, 별이야 말로 밤에만 비치는 것처럼 그것은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 때에 란지에에게 찾아오겠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쉬는 동안 하늘의 색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못내 아까워하는 것조차 지스카르는 용납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도모할 일에 대해 걱정하다보면 감사하고도 따스한 염려의 상징과도 같은 두터운 이불 덕분에 더워져 몸에 땀이 흘렀다. 살아있다. 란지에는 눈을 감았다. 영원히 감지 않고, 몇 시간 후면 다시 뜰 것이다. 며칠 후엔 란즈미도 볼 수 있을 테고, 보나 마나 웃다가도 펑펑 눈물을 쏟을 이엔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것도 없었다. 덧창 너머에서 아주 더디게 움직이는 달도, 별도 제 모습을 감추었다.
시간이 멈춘다.
어쩌면 찰나와도 같을지 모를 시간이 아주 오래 멈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