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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Were There

데친자

“거참,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

  막시민은 투덜거리며 골목을 돌았다. 막시민과 조슈아는 골목 하나를 끼고 근처에 살았다. 예전엔 함께 걸었던 골목길인데, 해가 바뀌고 처지가 갈리니 함께 걸은 지 오래(?) 된 거리이기도 했다. 막시민은 조슈아네 집에 이르러 초인종을 두 번 꾹꾹 눌렀다. 그래도 1학기엔 만나서 각자 학교를 가곤 했었는데 2학기 되고서는 영… 빠져가지고…….

  엥? 이래도 안 나와?

  막시민은 주먹으로 양철 문을 쾅쾅쾅 두들겼다. 너 나오는 거 보고 학교 갈란다. 이거 안 깨우면 틀림없이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에 한 표.

“아, 막시민… 하아암…….”

  조슈아가 문틈으로 덤불처럼 우거진 머리를 내밀었다. 답지 않은 민소매 차림에, 한쪽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막시민은 석연찮음을 감지했다. 얘가 늦잠 자던 애가 아닌데 왜 지금까지 못 일어났지? 왜 이런 헐벗은 차림으로……?

“뭐야……, 조슈아, 누구 왔어?”

  갑자기 문틈에서 조슈아 위로 머리 하나가 쑥 나왔다. 조슈아도 키가 큰 것을 감안하면 껑충하게 큰 키에, 역시 민소매 차림으로. 막시민의 위화감이 기어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 새끼는 뭐야-!!!”

 

  그러니까 조슈아는 막시민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고등학교를 빠른으로 들어간 까닭에 막시민과는 두 학년 차이가 났다. 그것도 초•중은 모종의 이유로 검정고시로 한 큐에 뚫어버리고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결과적으로 막시민과 2개 학년 차이가 났던 것이다. 초등학교는 뭐, 초중고 다 있는 사학재단 초등학교였다는데. 그다지 말할 거리가 없는 시절인지 타인 중에서는 조슈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막시민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것이 지금까지는 어떤 문제로도 불거진 적이 없었고.

  그러나 막시민이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조슈아는 대학생이 되면서 둘의 격차는 벌어졌다. 등교시간은 막시민에게 조슈아가 맞춰서 함께 집을 나선다 하더라도 대학생은 시간표가 들쭉날쭉했고, 학과 행사도 잦았다. 조슈아를 이틀이나 앗아간 새터와 저 골목 어귀에서 잔뜩 취한 채 비틀비틀 나타나게 만든 신환회인지 남자 대면식인지 뭔지, 막시민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평하게 술을 권하는 악습 따위가 남아있냐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놈의 대학교. 노트북을 옆에 끼고 잔디밭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족속들. 스터디니 캠퍼스 커플이니 소개팅이니 하하호호 남녀 섞여서 몰려다니기나 하고 말이야. 누구는 아직도 (잘만 피해다니긴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교복 단속이나 받고, 정해진 점심시간에 메뉴 선택권이라곤 없는 점심을 먹고, 9교시까지 갇혀서 안 듣고 싶은 수업도 들어야 한다고. 진리의 상아탑은 개뿔.

  하기야 다 좋아보이지는 않더라만. 2학기 극초반에 조슈아가 다소 처져 보였을 때가 있었다. 물어보니 새쭉 웃으면서 ‘놀다보니 갑자기 개강해서 적응이 안 된다’는 호강에 겨운 놀림이나 듣고 짜증이 나서 대걱쓸 대걱쓸(대학생 걱정은 쓸모없다) 주구장창 외치고 다녔던 기억이나 나지만.

  그러더니 말도 없이 다른 놈을 집에 들여놓고 같이 살고 있어?

“……설명해.”

“너 학교 안 가?…….”

“이래놓고? 내가 원래 그런 거 신경 쓰더냐? 빨리 보내고 싶으면 설명 빨리 해.”

  야단맞는 것 마냥 얌전히 무릎까지 꿇어앉은 조슈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쪽은 토미손이야. 토미손 구겔호퍼. 이번 학기에 조과제를 같이 하게 된 사이야.”

“무슨 팀플을 같이 살면서 해?”

“작곡을 잘 가르쳐주신다고 유명한 교수님 강좌를 듣고 있는데, 이번 학기 내내 팀으로 최종 결과물 포함 여러 번 곡을 만들어야 해서. 토미손 집이 학교에서 무척 멀길래, 그냥 우리 집에서 머물면서 같이 하기로 했어.”

  그럼 학교에서도 얼굴 보고 집에서는 당연히 같이 지내고? 근데 같이 과제하는 사람을 이렇게 덥석 집에 들여놓을 정도로… 친해졌다고? 조슈아 폰 아르님이 그렇게 친화력이 좋았나?

  침묵을 살피던 조슈아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오늘 나 강의 하나였는데 휴강 됐고 토미손은 오후에 강의 있거든. 오늘은 나 쉰다고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어제 늦게까지 이야기한 바람에 뻗어서 늦잠을 자 버렸어. 토미손, 이쪽은 막시민이야. 막시민 리프크네.”

  마르고 키가 멀대 같이 큰, 연한 밀짚 색깔의 머리를 한 토미손이 선뜻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막시민. 조슈아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

“너 저놈하고 내 이야기를 했어?”

“막시민…….”

  자기는 야 너 등으로 불러도 남까지 저놈으로 부르는 패기에 조슈아가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토미손 나랑 두 학년 차이인데 내가 빠른이라 세 살 많아. 너랑은 4살 차이야…….”

“거 미안하게 됐수다. 내가 쟤랑 야자튼 사이라 조슈아랑 말 놓으면 나랑도 놔야 하는데.”

“아, 상관없어. 편하게 해줘.”

  싱글싱글 웃는 상판대기가 더 더 마음에 들지 않는 참인데, 조슈아가 너무 늦겠다며 일어나 손을 잡아끌었다. 학교 끝나고 와서 더 이야기하잔다. 아니 잠깐. 쟤랑 내 이야기를 했냐니까 은근슬쩍 반말이나 지적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조슈아 2학년 아래, 쟤는 조슈아 2학년 위고, 둘은 조슈아 초등학교 시절 같은 합창단이었다 이거지. 그래서 둘이 그렇게 빨리 친해졌구만.

  고2지만 야간자율학습 같은 걸 할 리가 없는 막시민은 학교가 파하자마자 일찌감치 조슈아네 집에 들어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사람 앞에 앉아 있었다.

“얘가 얼마나 웃기는 꼬맹이였는지 너도 봤어야 했는데.”

  조슈아가 옆을 돌아보며 곤란한 눈빛을 보냈다.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아니, 얘가 열 살 때 뭐랬는지 알아? 뭐랬지, ‘난 노래 그닥 안 좋아해.’ 이런 뉘앙스였는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어버린 조슈아 대신 짜게 식은 눈으로 듣기만 하던 막시민이 놀라서 묻고 말았다.

“자기 입으로 노래를 안 좋아한다 했어?”

“그렇다니까! 열정도 없고 잘하지도 않는대. 몇 번 들으면 질리는 목소리라나. 내가 그때도 하도 어이가 없어서 기억이 난다.”

  막시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쭉쭉 마른세수중인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저거 얼굴만 보면 비주얼 몰빵으로 끼 없게 생겨서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이었고, 자기 소질에 자부심도 매우 높았다. 그런 녀석이 노래를 싫어하고 잘 못한다고 말했다고?

“아무튼 쪼그만 게 날은 또 살벌하게 세워가지고. 얘가 그때 여섯 살 많은 학교 체스 챔피언을 끝내버렸거든. 그러고 딱 하는 말이-”

“거기까지. 너 얼른 가. 빨리 씻고 숙제하고 자.”

  듣다 못한 조슈아가 일어나 막시민을 떠밀었다.

아 왜 사람을 쫓아내고 그래? 너 요즘 손님 대하는 태도가 왜 이 모양이야? 막시민은 꽥꽥 소리치면서도 조슈아에게 떠밀려 현관 밖으로 나왔다. 킥킥킥 웃던 토미손이 손에 가방을 들려주고 문이 닫혔다. 숙제라니, 니가 내 엄마냐! 난 아직 미자고 넌 어른이다 이거야? 서러워서 못살겠네. 너 작년까지는 내가 키우다시피 했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시민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자리가 불편했던 탓이었다.

  여태까지 조슈아를 소개하는 것은 막시민의 몫이었다. 조슈아가 어떤 애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막시민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때로는 막시민은 설명하고 조슈아는 옆에서 박수를 쳤다(그러면 막시민은 왜 니 이야기에 박수나 치고 있냐고 성질을 냈다). 그런데 막시민보다 앞서 조슈아를 만난 사람이, 네가 모르는 조슈아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말 안 하기로 하지 않았냐’니. 자신을 배제한 둘만의 이야기란 굉장히 낯설었다. 아니 생각하다 보니 화가 나네. 가방을 한 쪽만 메고 돌아가는 막시민의 발걸음이 쿵쾅거렸다. 말하는 주둥이를 틀어막을 것이지 왜 나를 쫓아내? 어이가 없네.

 

 

 

“여기 와서 너를 처음 봤을 땐 정말 놀랐어. 내가 기억하는 너는 되게 음… 작고 까만 밤송이 같았는데, 지금의 너는 키도 엄청 크고 뭔가… 회색 모자 방울이 된 느낌이야. 자신감도 생기고. 보기 좋다.”

  둘 다 바닥에 누워있던 중 조슈아는 말없이 웃었다.

“그 엄청 경계하는 안경 친구 덕분인 거지?”

“응.”

“다행이네.”

“너는… 괜찮았던 거야?”

“어, 다행히, 옮긴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학교 그만뒀어?”

“어.”

“캐스팅되어서 학교에서도 엄청 좋게 봤었다며.”

“그랬는데, 아무리 봐도 너만큼 노래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꾸 실망하게 되더라. 나 혼자 버티기엔 좀 힘들어서, 얼마 뒤에 그만뒀어.”

“…미안해.”

“됐어, 너 탓하려는 말이 아니었는데. 그냥 그랬다고. 너도 큰 결심 한 거였잖아.”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조슈아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 합쉬다~”

“합쉬다~”

 

  무슨 노래 좋아해?

  글쎄. 요즘에는 포크송이 좋더라. 미리 말하지만 내 고향하고는 상관없어.

둘 다 웃었다.

  난 그냥 목가적이고 진솔한…? 분위기가 좋은 거라고. 아, 종교음악도 괜찮아.

  종교 있어?

  아니.

  나란히 웃었다.

  그래? 포크송 재밌겠다. 이번 최종 프로젝트 그걸로 한 번 해볼까?

좋지.

 

  막시민은 조슈아네 집에 들락날락하다 본의 아니게 토미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시는데 금전적인 여유가 많지는 않았던지라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돈을 벌었다. 틈틈이 음악 공부를 놓지 않다가 진학을 고민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모이자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교수님을 알아보고 연구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 결과 허락을 받아 지금 이 수업을 청강하고 있다는 것까지.

“정말 대단하다. 나는 그렇게 못했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의 표정은 진심이어서 막시민은 속으로 픽 웃었다. 저 자식은 누구에게서든 부러울 거리를 뜯어내는 데 소질이 있었다. 평범해서 부럽고, 공감을 잘 해서 부럽고, 열정이 넘친다고 부러워만하다가 제가 가진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 일면식도 없는 노련한 사업가 극장주를 독대하더니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다 내 마음대로 할 테니 당신은 돈만 대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납득시킨 사람이 누구시더라.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으니 돈 벌 생각을 안 한 거고, 안 배워도 노래를 잘만 만드니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던 거지.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친해지겠어? 게다가 조군 녀석하고 같이 일하는 게 절대 쉽지는 않을 걸. 문득 입안에서 느껴지는 듯한 쓴 맛에 막시민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다 자기 처지에 맞는 적극성이 길러지는 거지 또 옆집 잔디가 푸르댄다. 엔젤릭 같으니.”

“뭐가?”

  반응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토미손이었다. 막시민은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설명을 했다.

“아예 상황이 다른데 남 부러워만 하는 고질병을 알면서 못 고치니까 엔젤릭이지.”

“토미손…… 막시민은 내가 바보라는 뜻이야.”

  빨갛게 굳어버린 조슈아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옆에서 토미손이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알아듣게 빨리 말해.”

  조슈아가 말없이 자리를 뜨고, 배를 끌어안고 킬킬거리다가 눈가를 훔치던 토미손이 말했다.

“너랑 나랑은 용법이 다르구나. 조슈아 노래에 내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엔젤릭이라고 말해도 되냐고 물어봤었거든.”

  아, 그래. 그러시구나. 막시민은 홀로 짜게 식었다. 그러게 처음 말했을 때 움찔 하더라니. 어쩐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누구는 천사 같다는 뜻으로 쓰는데 누구는 돌려 돌려 멍청이라고 말하는 데 써서 미안하구만. 조군은 좋겠수다.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저렇게 지고지순하게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짝퉁은 갑니다.

 

 

“너 모나시드 시절 발매된 음원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절대. 넌 들어봤어?”

다사로운 가을 햇빛을 받으며 둘은 오늘도 거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도 아니. 댓글창을 보면 이 앨범의 비하인드를 아시냐고 손가락이 근질근질할까봐.”

둘은 산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엔 그런 이야기 올라오면 필요 이상으로 뒤집어질 걸.”

“맞아. 그런데 어릴 때 생긴 몹쓸 취향은 어디 가질 않네.”

하하 웃음이 흩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네 노래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못 할 것도 없었다. 조슈아는 머릿속으로 음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Wherever I go

Far away and anywhere

Time after time you always shine

Through dark of night calling after me

 

And wherever I climb

Far away and anywhere

You raise me high beyond the sky

Through stormy night lifting me above

 

Venite Spiritu et emitte caelitus

Venite Spiritu et emitte caelitus

Venite Spiritu

Venite Spiritus

 

Far away beyond the sky

 

“이야…… 너 여태까지 변성기가 안 온 거야? 아니지, 말할 때 목소리 보면. 클라스는 영원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여전하다는 말로는 좀 부족한데.”

“자꾸 비행기 태우지 마, 얼굴 터지려고 해.”

고개를 돌린 채 뺨에 손가락 등을 댄 조슈아가 웅얼거렸다.

“지금도 노래한다며?”

“비공식적으로이긴 하지만, 응.”

“다행이다. 네가 노래를 계속해서.”

조슈아의 고개가 느리게 천장을 보았다. 긴 속눈썹이 두어 번 깜박거렸다.

“그러게…… 노래 그만둘 거라고들 했었는데…….”

이번에는 토미손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 합쉬다.”

“그럽쉬다.”

 

어떻게 시작하고 싶어?

소박하게 흥얼거림으로, 반주 없이 단선율.

그게 더 귀를 끌 때도 있지. 생각해둔 멜로디가 있어?

토미손이 짧게 흥얼거렸다.

괜찮다. 여기에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함께 노래하는 것처럼 독립적인 멜로디가 하나 둘 합류해서 포크송 느낌을 주면 어떨까.

아, 대위법으로 포크송을? 가능할까?

가능할 것 같은데. 방금 메인 멜로디 다시 해볼래?

토미손의 흥얼거리기 시작하고 몇 초 후 조슈아가 허밍을 덧붙였다. 두 멜로디가 따로 또 같이 진행되며 묘한 어울림을 자아냈다. 둘이 눈짓으로 적당한 길이에서 끊자 토미손이 녹음된 구간을 다시 재생했다. 이윽고 두 머리통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여기에 시차를 둬서 세 번째로 빠른 템포의 아이 목소리가 합류를 하고…….

네 번째로 어르신들처럼 약간 쉰 저음으로 느릿하게 깔아줄까?

좋아. 이렇게 가다가 중간쯤에서 모두 하나의 멜로디로 합쳐지면 되게 벅차겠다.

여기에 가사를 넣으면 전부 안 들리겠지?

아무래도? 그렇다고 아카펠라로 가기엔 목소리를 효과음으로 쓴다는 데서 우리 지향점과 다르고. 다성부 보칼리제처럼 갈까?

그런데 가사가 없으면…… 어떻게 의미를 전달하지?

보칼리제에서 성악 발성을 덜어내는 건 어때?

무슨 뜻이야?

나는 아까 네가 흥얼거릴 때 그 자체로도 좋았거든. 그런 것처럼 멜로디 하나 하나가 공들인 노래라기보다 가락을 가진 소리들이 되면 어때? 그 편이 감정이 더 잘 살아서 메시지 전달하기에도 좋고, 포크송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

믹스 보이스보다 더 편하게? 좋은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잡힐 듯 말 듯 해.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녹음한 걸 발성만 바꿔서 샘플 한 번 만들어볼게.

그 전에 우리 뭐 좀 먹자. 출출하지 않아?

뭐 먹고 싶은데?

토미손과 조슈아는 서로 마주 보았다.

맥주에 안주……?

장 보러 가야겠네.

 

 

막시민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갈림길에서 잠시 생각을 좀 했다. 이쪽 길로 가면 집이고, 저쪽 길은 조슈아네 집이다. 조슈아네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다. 올 여름까지만 해도 주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집 문을 따고 들어가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 다음, 커다란 TV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긴 소파에 안방에서 꺼내온 이불을 덮고 누워 냉장고에 있는 간식을 깨작대면 거기가 바로 극락이었는데 지금은 함부로 그럴 수가 없다. 둘 다 없는 집에 가 있어도 좀 그렇고, 조슈아만 있으면 좀 낫지만 만에 하나라도 토미손만 있으면 면전에서 문 닫고 백스텝 하기도 같이 앉아있기도 껄끄럽기 때문이었다. 둘 다 있어도 요즘엔… 좀 그렇고. 하여튼 어금니 맨 뒤에 왕건더기가 껴 있는 느낌이라니까. 토미손 그 자식도 은근 끈질겨.

“막시민!”

부르는 목소리가 퍽 살가웠다. 뒤를 돌아보니 조슈아와 토미손이 먹거리를 4:6 정도로 나눠 들고 오는 참이었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우리 맥주 마시면서 작업하려고 안주 거리 좀 사 왔거든. 토미손에게 뭐 먹을지 물어보면서 너 좋아하는 훈연 소시지랑 치킨 플래터도 포장해 왔어.”

아직까진 내가 안중에 있나 보구만.

“또깍 부러질 것 같은 팔로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와. 이리 내놔.”

“고마워.”

조슈아는 들고 있던 음식 봉투를 막시민에게 넘겨주고, 토미손의 짐을 반쯤 덜어 들었다. 막시민이 흘러내린 안경을 중지로 슥 밀어 올렸다.

집 앞에 도착하자 조슈아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손이 남는 토미손이 그 사이 도착한 택배 박스를 들어올렸다. 셋은 식탁 위에 가져온 음식을 놓고, 토미손은 조슈아 책상 위에 박스를 올려 놓았다.

“노래도 둘이 불러야 하니까 수음률 괜찮은 걸로 마이크 하나 더 샀는데 그건가 봐.”

조슈아가 막시민과 식탁을 차리면서 말했다.

“네가 시킨 거 맞구나. 수취인 이름이 요슈아 로트마이어라고 되어 있어서.”

막시민과 조슈아가 동시에 대답했다.

“조군이 본명 드러나는 게 좀 그래서 가명을 쓴다.”

“막시민이 예전에 미성년자 경제활동을 할 때 내 이름을 따서 썼더라구. 그래서 그거 끝나고 원래 이름 주인이 다시 가져와서 쓰고 있지.”

조슈아가 혼자 쿡쿡 웃더니 말을 이었다.

“물론 막군 말도 맞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네가 나한테 궁금해 했던 거 말이야. 왜 요슈아가 아니고 조슈아냐고 했었지.”

“맞아, 기억나네. 남부에서 시작한 집안이라 남부식으로 읽는다고 했었지?”

“응. 누가 나한테 개인적으로 질문하는 게 처음이라, 그런 게 궁금하구나 재밌었어.”

“그 와중에 그런 걸 물어봤던 걸 보면 속으로 계속 왜 조슈아지……. 했나봐. 아무튼 내가 필요한 건데 네가 사줘서 고마워. 가격 알려주면 송금할게.”

“됐어, 어서 먹자. 막시민, 왜 그래? 음식 냄새가 이상해?”

“아니.”

막시민이 짧게 대답했다.

“미간이 팍 구겨졌는데. 어디 불편해? 맥주 작은 캔 줘서 그래? 너 3일 뒤면 중간고사라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그런 건데. 정 그러면 내 거랑 바꿀래? 나 어차피 많이 못 마시니까.”

“그러든지.”

표정을 채 풀지 못한 막시민이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있던 일은 이야기하지 말지. 너는 이미 나를 너무 잘 알아. 좋아하는 음식이나 습관 같은 거. 난 너란 놈을 다 알려면 몇십 년은 걸릴 것 같은데. 요즘엔 여기 올 때마다 나에게만 낯선 네가 나와.

막시민은 이렇게 누군가의 조악한 모조품 같은 느낌이 든 적이 없었다. 물론 조슈아가 막시민을 그렇게 대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조슈아가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스스로 받는 느낌이 그랬다. 조슈아의 어지간한 처음은 토미손이 모두 가져갔고, 자신은 뒤늦게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느낌. 알고 보니 나에게만 새로웠던 사이.

게다가 숙제나 술처럼 그들과 자신의 차이가 도드라질 때마다 울컥하고 마는 것이다. 둘은 가능하고, 자신은 불가능한 것. 그런데 맞잖아. 교복 입은 애송이가 아득바득 끼워달라고 우기면 얼마나 웃기냐.

자꾸… 지는 것 같다.

 

 

 

 

“샘플로 직접 들어보니 생각보다도 선율들이 괜찮게 어울리는 것 같아. 그리고 노래보다 소리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음악적으로 덜 다듬어져서인지 더 느끼는 대로 나오는 것 같고. 그런데…… 다른 목소리는 어떻게 섭외했어? 창법도 특이하고, 우리 즉석에서 되는 대로 불러서 음정이며 박자 완전 제멋대로잖아.”

조슈아가 스르륵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어…… 주변에 목소리 좀 빌려달라고 부탁했어.”

“주변에 음악 잘 하는 사람이 많나 봐. 저기, 혹시 더 섭외할 수도 있어? 이건 내 생각인데, 듣다 보니 멜로디 하나 하나마다 목소리도 다르고 해서…… 각각 하나의 인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러면 슬프지만 어떤 사람과는 오래 함께 할 수도 있고, 일찍 헤어질 수도 있고, 뒤늦게 만날 수도 있으니까.”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잠-깐만. 목소리 외에 뭘로 사운드를 더 채울까 생각하느라, 좀 더 설명해 줘.”

“그러니까 각기 다른 가락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차례대로 합류해서 우리가 들은 곳까지 4명이 노래하고 있잖아. 그런데 합류가 있다면… 이별도 있지 않을까. 이유도 제각각이겠지. 불화도 있고,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어서일 수도 있고, 죽어서일 수도 있으니까. 헤어졌던 사람을 다시 만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고. 그러니까 내 말은, 목소리들에 좀 더 하차와 등장을 주자는 말이야.”

조슈아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따가닥 따가닥 두드렸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목소리들로 나타내자는 말이지?”

활기차게 말하던 토미손이 갑자기 폭 수그러들었다.

“어어, 그런데 방금 말하면서 생각해보니 새 목소리마다 새 멜로디도 짜 줘야겠고, 하나씩 들고 날 때마다 누가 남고 어떤 느낌을 만드는지도 고려해야겠고… 추가로 필요한 작업량에 비해 좀 산만할 것 같네. 에잇, 잊어줘.”

“아냐, 가능할 것도 같아. 멜로디를 확실하게만 짜 놓으면, 목 빌리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고.나는 우리 노래가 벌스나 후렴도 없으니까 지금은 좀 심심하지 않나 싶었는데. 좀더 다채로워질 것 같아.”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주제가 무척 마음에 들어.”

 

 

“잠깐 쉬었다 하자.”

둘은 노트북과 커피를 쭉 밀어냈다.

“결국 처음 시작할 때 다시 혼자로 돌아왔네.”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헤어졌던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

헤어졌던 사람, 조슈아는 입 안에서 한 번 되뇌어 보았다. 저 세상에서야 만날 수 있는 사람, 지금 만나러 가고 싶은 사람, 그리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사람. 눈앞에서 흩어지는 것 같은 체스말들.

“저, 조슈아.”

“응.”

“너는 그때……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란 생각… 해본 적 있어?”

어차피 토미손과 다시 만난 이상 언젠가는 나올 이야기였다. 짧은 순간 무수한 생각을 거쳐 대답이 떨어졌다.

“…응.”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무수히, 너무나 선명하게. 마음 속이 고요해지는 때가 두려워질 만큼.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이걸… 안심된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경계가 모호한 물음이었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이어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로운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재를 보건대 진작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든, 참고 부드럽게 넘겨야 했든 그 질문의 답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원인은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내상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

가는 곳마다 작은 먹구름이 따라다녔다. 운 나쁘게 실패가 이어질수록 먹구름은 더 넓고 짙어져 어딜 가나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 살았다. 나는 세상과 화해할 수 없어. 스스로 관계를 맺을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느낌이 들기까지는.

그 터널을 벗어난 지가 얼마 안 됐다.

 

“우리, 모나 시드에 한 번 가볼까.”

“어, 어?”

“혼자라면 좀 그렇지만, 간만에 둘이잖아. 내가 그날 스케줄 뺄게.”

토미손이 눈을 찡긋 했다.

 

막시민의 중간고사가 끝이 났다. 특별히 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아예 없는 것처럼 지내기엔 가슴을 짓누르는 이벤트가 또 한 차례 넘어가니 후련해졌다. 시험 첫날에 얘기했으면 조군 자식이 남은 시험 괜찮겠냐고 잔소리를 했겠지만, 이젠 끝났으니 할 말 없겠지.

“진심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아빠랑 테마파크랑 얘기가 잘 돼서 같이 가면 특별 입장이라 뭘 하든 전액 무료야. 시험 끝난 기념으로다가 다음 주 수요일! 어때?”

“진짜? 고마워, 루시안. 너희 아빠께 어떻게 감사를 전하면 될까?”

늘 그렇듯 티치엘이 예의바르게 화답했다. 보리스가 무던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민 생각에도 이건 일정을 빼야 마땅했다. 볼 것 할 것 먹을 것이 넘쳐나고 외국에서도 놀러온다는데.

“막군이 조슈아한테도 좀 전해주라. 오랜만에 같이 놀자.”

옆에서 란지에가 그런 정신 산만한 장소는 불편한지 헛기침을 하려는 순간, 막시민이 선수를 쳤다.

“그래, 까짓 거 다 가자. 이런 날이 얼마나 온다고.”

 

 

 

“나 다음 주 수요일에 ○○ 테마파크 가는데. 너도 올래.”

-음… 어떡하지, 그날은 선약이 있네.

물어보고서나 다 가자 말자 할 걸. 하는 줄도 몰랐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하긴, 너는 원한다면 언제든 갈 수 있겠지. 이렇게 너와 나의 차이를 또 확인하게 된다.

“선약? 누구랑? ……토미손?”

-어, 응, 미안해. 저… 목요일은 어때?

안 돼, 루시안이랑 가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첫머리에 다른 사람 이야기를 안 해서 그런지, 루시안 덕분에 가는 거라 그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선뜻 나오지 않았다. 가서 알게 되면 몰라도.

“됐고. 뭐 하러 가는데?”

-음… 별 일은 아냐. 나중에 말해줄게.

“왜? 뭔데 말을 못해?”

-그런 거 아냐, 어, 교수님이 출석 불러. 다음에 보자.

막시민은 끊긴 전화를 들고 한참 말이 없었다. 어쩌면, 어금니 뒤 왕건더기는 자신일지도 몰랐다.

 

 

저기압을 달리는 막시민 주변에서 같은 반 여자애들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우리 집 분위기 쓸데없이 엄해서 짜증나. 저번에 수학여행 따라오겠다는 거 간신히 뜯어말렸잖아.

헉, 진짜? 보통 분들 아니시네.

이런 집이 어딨어. 왜 자꾸 별 것도 아닌 걸 틀어막으려고 해. 그런다고 내가 안 노나 봐라. 나만 그런 것도 아냐. 이거 봐, 딸을 엄하게 키우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으로 큰다잖아.

맞아, 나 아는 언니도 신입생 때 엠티도 술 마시고 나쁜 짓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안 보내주실 정도로 집안 분위기 엄청 엄하거든? 지금은 낮에 남친이랑 대실 잡잖아.

엄한 집안 분위기… 낮에 남친이랑…….

 

갑자기 눈앞에 풍경이 펼쳐진다. 환한 창가에서 기다리던 토미손이 뒤를 돈다. 샤워실 문이 열리고,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종아리 위로 샤워가운을 걸친 조슈아가 나오고 있다.

드디어 우리 둘만의 시간이네. 토미손이 속삭였다.

조슈아가 배시시 웃는다. 응, 떼어놓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

조슈아가 눈을 맞추고 그렇게 말하며 다소 높은 토미손의 어깨에 시냇물 같은 두 팔을 둘렀다. 손이 가운 속에 들어가 하얀 살갗을 느리게 어루만진다. 점차 여린 호흡이 거칠어지고… 이윽고 가운이 스르륵 떨어졌다.

“에이… 싯팔!”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은 어느 새 체육복을 입고 있고, 보리스가 군더더기 없는 포스베리 뛰기로 220cm 수평대를 매끄럽게 넘는 데 성공해서 모든 이의 박수를 받던 참이었다.

“에이 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막시민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어이를 잃고 만 나우플리온 앞에서 보리스가 드물게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리프크네 쟤 요즘 왜 저러냐? 올해 들어 저거 점점 이상해.

 

모나 시드 졸업생들은 자기소개에 모나 시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면 반응이 최소 ‘부모님께서 교육에 관심 많으셨네.’ 였다.

그러나 둘은 모나시드 졸업생이 아니었다. 합창단 이름으로 나온 음원에 목소리는 있지만, 거기에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올해 황금연휴라서 가을 단기 방학 중이라더라고.”

“내부 도장 공사를 이럴 때 놓칠 수야 없겠지. 역시 돈이 너무 많다니까.”

“준비 됐어?”

“응.”

토미손과 조슈아는 쇼핑백 대신 공구상자에 챙겨온 작업복 망사 조끼와 쿨토시 등으로 갈아입고 인원이 추가된다는 언질을 들은 적이 없는 인부들의 의아한 눈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온 작업 지시를 받아 공구를 챙겨 올라갔다. 할당된 곳에 적당히 일하다 쉬러 간 것처럼 공구를 부려놓고 돌아다니다 페인트칠을 해본 토미손에게 배워 바짝 일할 셈이었다.

둘은 함께 학교 곳곳을 돌아다녔다. 초대형 전자칠판과 예전보다 넓어진 새 개인 책상들이 들어찬 강의실과, 야트막한 무대와 반주용 피아노만 그대로인 음악실을 거쳐 모나 홀에 도착했다.

“새삼…….”

불을 켜자 공연장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더 나은 음향을 위해 천장이며 벽의 구조가 달라지고 최신 음향 설비도 여럿 생겨 있었다. 그러나 단차를 두고 놓인 벨벳 의자들과 종이컵 옆면을 갈라 펼쳐놓은 듯한 무대는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토미손이 스위치를 여럿 껐다 켜며 무대에만 주백색 등을 밝히고 자신은 객석 중 한 자리에 걸어가 앉았다. 조슈아는 천천히 통로를 따라 내려가 무대 앞쪽 정가운데에 섰다. 불빛에 머리카락이 번지듯 희게 타올랐다.

“잊을 수가 없지.”

여기서 처음으로 들었었는걸.

조슈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카타르시스로 도움닫는 선율이 예고도 없이 터져 나왔다.

 

어둠 속에 머무르던 세월

저주 가운데 몸서리친 때

 

나아갈 내일 없는 줄 알았고

나의 손 잡을 이 없다 여겼네…….

 

“이렇게 선명한데.”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 나날들을 지나와야 했을까.

 

“여기 그만 둘 때,”

토미손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생각했었어. 이 길 앞엔 무엇이 예비 되어 있나요?

그것이 웃음일지, 더 큰 눈물일지 지금 나는 알 수 없어서.”

 

무대에 서 있던 조슈아가 걸어 나와 토미손의 손을 잡아끌었다. 차가운 하얀 손이 가칠하고 단단한 손으로부터 온기를 나누어 받았다.

 

“가자.”

 

 

둘은 모나 홀을 빠져 나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토미손이 중간에 문을 열려는 것을 조슈아가 한 층 더 위로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둘은 쿠키 홀이 내려다보이는 위층 복도 벽의 좁은 단면에 팔짱을 괴었다. 한쪽에 놓인 간식, 찻잔, 자판기, 가운데 놓인 원형 테이블.

“기억보다 작네.”

벽은 점점 멀어지고 발 딛고 선 자리는 점점 좁아들어 없어지는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조슈아는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한 광경과 소리, 감정들이 그를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화질 사진처럼 바꿀 수 없는, 그러나 그 자리에 멈춘 과거들. 이제는 그 기억에 액자를 씌울 수 있었다.

한참 뒤 토미손이 말문을 열었다.

그날 너 나섰던 거 말이야. 체스.

응.

나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당하는 걸 보고 화가 났던 거지?

나 때문에 당하는 건데, 더 이상 모른 척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네가 당한 건?

어?

왜 내가 당하기 전엔 스스로를 위해서 화를 내지 않았어.

글쎄. 나중에 보니 그때의 나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우리 부모님도 데모닉이란 걸 숨기고 싶어 하셨으니까, 누구라도 나 같은 애를 만나면 싫을 것 같다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알아.

그건 네 탓이 아냐.

그래.

그 모든 건 너 때문만은 아니야.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도 분명 있어. 네가 어울리기 좋다고는 말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나서서 공격하지는 않아. 장점도 뒤집으면 단점이 되는데, 어울리기 좋은 면만 가진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너라는 사람이 싫고 좋고를 떠나, 잘하는 걸 잘한다 하고 내 취향인 걸 좋다고 말할 수는 있는 거잖아. 모두가 싫어한다고 해도 모든 걸 부정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어.

조슈아는 잠시 후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게 네가 가진 힘인가 봐.

사실 그땐 평범하지 못한 걸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별 것 아니라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땐 솔직히 꿋꿋이 나에 대해 좋게 말하고 다니는 네가 곤란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어. 자기가 힘들어지니까 말을 바꾼 애들도 있었거든.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닐 걸. 그 상황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야. 분명히.

그랬을 수도 있겠지.

조슈아가 쓰게 웃었다.

너도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돌아서지 않아줘서. 나도 아니었던 유일한 내 편이었어서. 그래서 더 참을 수 없었나봐.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고맙더라고.

 

한 명의 주동자와 몇 명의 동조자. 대부분의 방관자와,

한 명의 방어자.

 

“그때 정말 끔찍했는데.”

이 말을 하기 까지 십 년이 걸렸다.

그 말을 이해할 상대를 찾지 못했던 탓이었다.

“이제라도 만나서, 말이라도 고마웠다고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 오길 잘했지? 앞으로는 너도, 나도 좀 더… 자유롭게 살아.”

토미손이 환영한다는 듯 양 팔을 벌렸다.

조슈아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토미손, 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그래도 될 만큼 나는 이제 무고하지 않아.

그 해 졸업생이 되지 못한 건 우리만은 아니야.

부모가 다들 물갈이 되었으니까.

그 계획을 처음 짠 사람이 나였다는 걸 알아도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해줄까.

아니, 아니다.

토미손의 대답이 무엇이든 그것은 대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네 너그러움에 기댈 문제가 아니고, 너에게 번민만 안겨주고 끝낼 수는 없으니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 낙엽이 지고, 사람들은 두툼한 옷에 몸을 말았다. 막시민도 까만 소라빵이 되어 예의 그 골목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오늘 최종 프로젝트 발표하고 종강한다고 했지. 사정이 되면 종강파티도 간다고 했고.

“…조군 자식 또 꽐라 돼서 오는 거 아니냐.”
가슴 한 켠에서는 어차피 토미손이 데려올 텐데, 싸했지만 이제 둘의 동거 프로젝트도 끝이라는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아 막시민은 하교 후 집에 들러 두툼하게 싸매고 나온 참이었다. 오늘 같으면 그 늘 태연하기만 한 면상도 웃으면서 넘겨줄 수 있다.

어느덧 하늘에서는 포슬포슬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방수 좀 되니까, 막시민은 조슈아네 집 앞이 보이는 골목 모퉁이의 헌옷수거함 옆 낮은 담벼락에 앉았다.

멀리서 조슈아의 차가 다가와, 집 앞 가로등 밑에 멈췄다. 운전석이 열리고, 뜻밖에도 토미손이 내린다. 빙 돌아간 토미손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조슈아를 간신히 받아 안아 일으킨다. 그때 조슈아가 웃었다. 그게 막시민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몸도 잘 못 가눌 만큼 취한 탓에, 안긴 채 가슴에 코가 닿을 거리에서 살짝 고개를 틀어 올려다보면서 웃는다. 유하게 풀린 눈꼬리를 따라 결이 고운 눈꺼풀이 깜박, 깜박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머리카락과 속눈썹은 희게 빛나고, 눈동자는 검고, 뺨은 상그레 달아올라서. 몇 초간 두 입김이 부옇게 번졌다. 순간 팔에 힘이 풀렸는지 조슈아가 휘청거린다. 토미손이 얼른 조슈아를 추슬러 올리고…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넘겨주었다. 부축하더니 다소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모든 과정이 왜 그다지도 느리게 보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막시민은 꼼짝 못한 채 헌옷 수거함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나서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문이 닫히고부터 못 나선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막시민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 조슈아네 집을 못박힌 듯 한참 바라보다가…… 눈발에 젖은 패딩 차림으로, 걸은 기억조차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분명… 분명히 무슨 일이 났어도 났을 텐션이었어.

 

“오빠, 눈 오는데 우리도 치킨 시키자.”

“어”

“두 마리 시켜도 돼?”

“어”

평소 같았으면 무슨 돈이 있냐고,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막시민은 자기가 대답한 줄도 몰랐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문이 닫힌 뒤 두 사람의 모습이 영화처럼 돌아가는 중이었다.

닫힌 문에 기대어 키스를 퍼붓고 있는 둘. 조슈아가 손을 올려 토미손의 턱선을 어루만진다. 토미손은 한 손으로는 그런 조슈아의 뒷목을 당겨 더 깊게 혀를 얽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옷을 하나하나 끌러 내린다.

숨소리가 거칠다. 맨몸으로 토미손의 벗은 어깨를 껴안은 조슈아. 틈이 벌어질라 싶으면 애타는 신음을 흘리는 조슈아의 옆구리를 넓게 편 손으로 감싸 어루만지며 허리를 놀린다. 조슈아가 가슴을 뒤틀며 탄성을 올린다. 조슈아의 벌어진 입술을 황급히 막는 토미손. 조슈아의 두 무릎 뒤를 붙잡아 당기면 아랫배 속에서 올라온 깊은 쾌감을 토하는 조슈아, 날씬한 두 허벅지 사이를 거침없이 드나드는…….

불쌍한 막시민 리프크네는 고장이 나 버렸다. 그는 멈춰버린 컴퓨터 본체를 다루듯 자신의 양 옆머리를 두 손으로 팍팍 때리다 급기야 머리카락을 한 줌씩 잡아 뜯으며 아-으-아-으-아으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저거 왜 저래??”

“치킨 두 마리 시킨 거 후회막심인 듯? 조용히 빨리 먹기나 해…….”

…, …… ……, ….

패딩만 벗어던진 교복 차림으로 이불을 홱 뒤집어쓴 막시민의 밤이 깊었다.

 

대학교는 방학보다 개강도 늦으면서 종강도 빠른 거냐.

퀭한 눈으로 늦은 등교를 준비하는 막시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조슈아였다.

“…….”

뿌연 안경알 너머 눈이 쉴 새 없이 굴러가는 사이 휴대폰이 꺼지자 막시민이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또 쥐어뜯었다.

왜 안 받았냐고 하면 뭐라 하지?

니가 그 새끼랑 자서 안 받는다고?

걔가 그 새끼랑 자면 내가 왜 전화를 안 받는데? 내가 뭐라고?

까지 생각했을 때, 막시민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 설마 그 자식을 조… 조… 조……

“조지고 싶냐…….”

이마 끝까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뒤늦은 자각은 후회만 더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수비를 했었어야지, 이제 와서 어쩌자고, 어쩌자고.

그러면 앞으로 아예 쌩깔 건가.

이대로? 아니?

그러면 언제든 연락을 하긴 해야지…….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꺼내보니 부재중 전화가 4통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연락이 안 되네ㅠㅠ 무슨 일 있어?]

[토미손이 할 말이 있대]

[셋이서 밥 한 번 먹자.]

 

겨우 안정을 되찾은 막시민의 심기가 또다시 용틀임치기 시작했다.

할 말? 셋이서 뭔 할 말?

 

‘우리 둘이 사귀어. 앞으로 더 자주 보자.’

테이블 맞은편 왼쪽에 앉은 토미손이 오른쪽에 앉은 조슈아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같은 색깔 반지가 반짝였다. 조슈아가 수줍은 얼굴로 웃는다.

‘막시민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니까, 꼭 먼저 말해주고 싶었어.’

 

“하!”

추워서인지 이가 따닥 따다닥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막시민 리프크네, 할 말 있나요?”

지스카르 수업이구만…… 얼레. 자기 최애쌤 수업이라고 토끼 눈 치뜬 거 봐라. 그러거나 말거나 막시민은 하던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그 자리에 내가 굳이 필요하냐. 둘이서 행복하면 되지.

쫌생이라 미안하다. 얼굴 보고 행복은 못 빌어주겠다.

느슨해졌던 마음도 잠시, 막시민은 굳은 얼굴로 메시지들을 삭제했다.

그래, 어른은 어른끼리 어울리는 게 맞는 것 같다.

 

사흘 동안 친구들은 막시민의 눈치를 살폈다. 조슈아로부터 연락을 받았지만 심란한 일이 있으니 당분간 내 앞에서 조슈아의 조도 꺼내지 말라는 막시민의 서슬이 퍼런 탓이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조슈아의 옆에 있었던 나날들이, 토미손이 나타나고 나서 겪었던 모든 감정들이.

나흘 째 되던 날, 막시민은 하교하다 교문 앞에서 토미손과 마주쳤다. 못 본 척 경로만 꺾어 지나가려다 백팩 고리를 붙들렸다.

“…놔!”

“할 말 있어. 우리 뭐 좀 먹을까?”

“너랑 나랑 뭘 먹어!”

“그럼 마시든지.”

 

그리하여 둘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카페에 앉게 되었다. 토미손이 주문한 음료 두 잔을 결제하고 돌아와 앉으며 한 마디 던졌다. 자기 걸로 라떼 한 잔, 막시민 앞으로는 니트로 커피.

“조슈아가 혼자 늙어 죽으면 그건 네 탓일 거야.”

“뭔 소리래.”

“네가 원격 미사일 격추 시스템처럼 굴고 있잖아.”

“당최 1도 모르겠습니다만.”

휴. 토미손은 일단 휴대폰을 꺼냈다. 돌아 돌아 가야겠다.

“일단 나랑 조슈아랑 최종 완성작 좀 봐줘.”

막시민은 기껏 사람을 불러놓고 상관도 없는 둘의 과제 결과물 이야기에 눈썹이 꼬일 뻔 했지만,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한 사람이 우주 공간처럼 메아리도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곳에서 외마디 외침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아니, 노래라기보단 가락이 있는 소리 같다. 다소 단조롭게 진행되던 소리는 점차 새롭게 흘러들어오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함께 하며 경쾌해졌다가, 뜻을 같이하며 여럿이 웅장하게 하나로 합쳐졌다가, 불화로 헤어지고, 배신을 당해 노도와 같은 분노를 쏟아 붓기도 한다. 반음보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음정과 함께 즉흥적으로 뛰놀며 부르는 듯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박자, 감정의 격랑을 보조하며 어떤 상황인지 정보를 주는 느슨한 비트 같은 효과음들. 토미손은 그 효과음들을 포토몽타주 같다고 표현했다. 이를 테면 잡지에서 이미지를 오리고 의도를 가지고 조합하여 붙임으로써 미적 효과와 함께 맥락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소리는 이윽고 다시 혼자 남는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는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쓸쓸함과 처참한 외로움에 울며 울며 가늘게 이어진다. 고막이 시린 느낌에 막시민은 닫힌 창문에 힐끗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소리는 다시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 모든 걸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끝이 난다.

막시민은 음정도 박자도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되먹지 못한 이 노래가…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좋다고 느꼈다. 이 듀오가 마음에 안 드는 것과는 별개로 결과물은 어딘가 뭉클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을 말하려 입을 열었는데, 토미손이 잠시 기다려 보라는 듯 손을 들어 저지했다.

“……?”

막시민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어릴 적에 딱 한번 겪어본 그 느낌이었다. 히스 노인네 집 천장에서 사카린이란 걸 발견하고 한 숟갈 입에 넣었는데, 단맛은 안 나고 이상하게 텁텁해서 퉤퉤 뱉은 다음 물로 입을 헹궜었다. 놀라운 일은 바로 그 다음에 벌어졌다.

수돗물이 달았던 것이다.

카페 안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돌아다니는 소리, 음료가 제조되는 소리들이 모두 생명을 얻은 듯 음악적인 울림을 띄었다. 소리가 통째로 음악이 되고, 보이는 것은 악기가 되고, 움직임은 연주가 되었다. 저 밖에서 빵빵대는 경적소리조차 감미로웠다. 노래가 정확한 음정과 박자에 구애받지 않아 효과음도 음악적으로 다듬어질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일상의 소리들이 모두 음악의 맥락 속에 포함된 탓이었다.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토미손을 보고 차분하게 기다리자, 무슨 음악 나라의 시골 축제에 초대받은 듯 비현실적인 느낌은 차차 가라앉아 10분쯤 뒤 막시민은 다시 카페 안에 앉아있었다.

둘이서 노래에 뭔 약을 친 거야.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아니 이게 왜 진짜지.

“프로젝트 발표 날 다른 사람들 반응도 딱 그랬어. 교수님 포함. 제목은 ‘회자정리 거자필반’이야.”

“무슨 노래 이름이 그러냐?”

착실하게 의도대로 흘러가준 것 같아서 막시민은 속으로 심술이 났다.

“원본은 완벽하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루프 구조로 만들어서, 어디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회자정리 버전이 있고 거자필반 버전이 있는데……. 아무튼, 원래 종강파티를 안 갈까 생각했는데 학우들도 엄청 좋아해주셔서 같이 어울리게 됐어. 교수님께서도 아는 작곡팀에 들어오라고 좋은 제안 주셨구.”

그 마냥 기쁜 얼굴을 보자 막시민도 내내 궁금했던 한 마디를 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식이랑 같이 작업하면서 너는 아무렇지도 않았냐?”

“음… 우리 아버지가 나 어릴 때 이런 말씀을 해 주셨었지. 신이 내린 재능을 만나면 먼저 보내줘라. 그들은 재능에 맞는 역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였나. 그런데 살다 보니 천재를 떠나서 다들 자기만의 고민이 있더라구. 그리고 최고 인기 음악가가 될 거야! 같은 목표는 누군가에게 밀려날 수 있지만, 즐겁고 모두가 함께 춤추기 좋은 소박한 노래를 써 보고 싶다는 목표는 밀려날 일이 없으니까.”

“천재랑 겹치면 어떡해?”

“그럼 같이 하지 뭐. 나는 뭔가 정말 멋지고 딱 맞아 떨어지는…? 아무튼 그런 걸 만났는데 같이 하게 되면 좋더라. 사람이 2명 이상 같이 하면 내 자리는 분명히 생기는데 그건 찾기 나름이라,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지.”

너는 네 몫의 고민을 끝낸 사람이구나. 막시민은 조슈아가 보리스나 토미손을 부러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스스로 괴롭히지 않고, 남의 괴로움을 배부른 소리라고 비웃지 않는다. 그들의 문제는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도 많은가봐. 내가 아는 친구에게 추천받아서 이번 강의를 듣게 됐다고 했잖아. 사정이 있어서 두세번째부터 출석하게 됐는데, 그 전에 과대가 조슈아 보고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혹시 데려갈 팀 없는지 공개적으로 물어봤었다더라고.”

막시민은 대번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돌았나? 사람으로 경매해? 아니지. 본인 있는데서 폭탄 취급을 해? 어른씩이나 되어서 나이 처먹고 무슨 개같은 매너야? 교수는 뭐하고?”

“교수님이 협업할 줄 알아야 한다고, 혼자는 안 된다고 했대. 대학생들도 고등학생이 몇 살 더 먹은 정도라서…… 듣기로는 1학기 끝나고 조슈아가 소문이 쫙 났대.”

“나 이해가 안 돼.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데? 안 하고 꿀 빨면 좋은 거 아니냐?”

“보통 과탑도 웬만해서는 무임승차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 있지……. 나는 조슈아를 이미 알고 있고 다시 만나니까 반가워서 덥석 같이 하겠다고 했는데, 내 친구는 같이 하면 어떨까 했는데 다른 조원이 반대했대. 그 상황이 내내 마음에 남았는지 나한테 말해주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말을 해야지 또또 혼자서…….”

토미손이 갑자기 조금 웃었다.

“그런데 너도 되게 특이하다. 너도 조금은 조슈아가 버거운 것 같은데 바로 조슈아 편이 되어주네.”

“아…… 뭐…… 역치가 높아졌다 칩시다.”

“너 바이올린 하지?”

막시민이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그건 왜?”

“내가 보기에도 조슈아는 작곡을 배울 필요가 없어보였거든. 그냥 마음 가는대로 쓰면 평론가들이 이론을 만들어서 좋은 이유를 분석해줄 텐데 말이야. 그래서 물어봤더니 원래는 바이올린 독주곡을 하나 쓰고 싶었대. 피아노는 반주 정도만 하는 걸로. 그래서 독주곡의 문법을 좀 배우고 싶었는데 컨템포러리 작곡일 줄은 몰랐다나.”

“…….”

막시민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이제 꼭 물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왜 해주는 거야. 너네, 사귀는 거 아니었어?”

하하. 토미손이 웃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안 사귀어. 조슈아를 보면 해결되지 않았던 옛날 문제가 생각나. 그래서 안쓰럽고 마음이 가지만, 서로를 보고 계속 그 일이 생각나면 좀 힘들지. 그래서 나랑 조슈아는 실수할 수는 있지만, 네가 말하는 의미로 잘 될 수는 없는 사이야.“

막시민이 눈을 치떴다.

“그럼 가로등 밑에서. 나흘 전, 설명해.”

“실수할 뻔 했지.”

 

조슈아를 데리고 들어온 현관등 밑에서 둘은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토미손은 머리를 흔들었다. 조슈아, 많이 취했어. 조슈아가 웃었다. 그닥 많이 안 취했어. 어지러웠다.

들쳐 메다시피 하여 간신히 침대 위에 조슈아를 뉘어 놓았다. 나가려는데 옷자락이 붙들렸다.

“……옷 좀 벗겨주라.”

이 집에서 석 달을 살았는데 왜 손가락이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양파 껍질을 까듯 옷 속에서 조슈아가 한 겹 한 겹 모습을 드러냈다. 분홍빛이 도는 복사뼈, 날씬한 종아리, 또렷한 쇄골,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납작한 배. 그도 경고등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불만 덮어주고 도망가야 해. 얼른.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서려는데 두 팔이 목에 감겼다.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릴 적 그 때처럼 속을 들여다보는 듯 유심한 까만 눈. 목을 끌어당기며 조슈아가 그대로 솜사탕처럼 웃었다. 입술이 따끈하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파묻혔다. 살내음이 아찔해서 조슈아의 맨 어깨를 붙들었다.

그때 머리 뒤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흩어졌다.

“막시민…….”

그리고 조슈아는 곯아떨어졌다.

토미손은 마른 세수를 하고, 불을 끈 후 방문을 꽉 닫아주었다. 다음날 조슈아는 블랙아웃으로 판명이 났다.

 

 

“…….”

“더 입증해야 하니…?”

“아, 아니.”

“그리고 조슈아가 나한테 완전히 털어놓지는 못하는 그런 게 있나봐. 전에 뭔가 말을 하려다 말던데, 말하고 싶지 않다는데 캐물을 수는 없잖아. 그런 건 네가 잘 봐줘.”

막시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하, 그거구만. 알게 되고 꽤 속 시끄러웠던 그거.

-자기가 한 짓을 모르지도 않고, 아는데 입 싹 씻을 놈도 아닌 거 알잖냐. 난 당분간 지켜보려고.

막시민 리프크네는 데모닉 조슈아의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을 너무 잘 알았다. 예전에 유일한 내 편이었던 사람에게 내쳐질까봐 무서운 거겠지.

“아무리 많은 걸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대도-내 얘기는 아니지만-특정 사람에게만 받으려는 사람도 있어. 그래서 짚신도 짝이 있다고 하나 봐. 그런 점에서 너희 둘, 되게 잘 어울려.”

막시민은 헛기침을 했다.

“너 되게 어디 가는 사람처럼 말한다.”

“어. 교수님이 처음에는 전업 작곡가를 말씀하셨는데, 내가 생계 때문에 그건 안 될 것 같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음악 선생님을 하면서 겸업을 하면 어떠냐고 하셨어. 그래서 나는 가.

조슈아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인 것 같아서 좀 마음이 쓰이네.”

“아마 평생 현재진행형일 거다.”

“다행스럽게, 조슈아도 예전 같지는 않네. 조슈아 말로는 너 만나서 그렇다고 하더라. 나 나오기 전에 개 엄청 불안해했어. 막시민이 자기한테 화가 나서 일부러 연락을 안 받는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얼른 가봐. 우리는 여기서 헤어지자.”

 

 

 

조슈아는 펜을 쥐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토미손과는 아까 인사를 나눴다.

우린 서로 곤란하게 할 일은 하지 않기로 한 사이지. 그래도 조사 생기면 연락해. 잘 지내라.

너도.

든 자리도 조슈아는 모를 수가 없지만, 그래서 난 자리는 더욱 눈에 밟혔다. 토미손의 물건들이 사라진 집안이 그렇게 비어보일 수가 없었다. 그전엔 어떻게 살았지.

조슈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전엔…… 막시민이 있었는데.

토미손이랑 있을 때 막시민을 더 많이 챙겨줄 걸.

볕이 딱 의자 밑으로만 떨어졌다. 점점 적막이 무거워져 띄엄띄엄 노래가 새어나왔다.

 

You were there

In everything I knew

From the moment I began

Always there

In every way I go

Saved me falling

Held my hand

 

You are shelter from the storm

The shadows fade away

All cares pass away

 

…And when the end of day is come

Stay with me through the dark

And bring me home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들어보니 막시민이 착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 막시민. 마침 잘 왔어. 지금 쓰고 있는 바이올린 독주곡인데, 네가 한 번 봐줄래.”

  연락도 안 받다가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조슈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눈을 깜박였다. 막시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일단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네가 오랫동안 안 와서, 노래가 조금. 슬퍼졌어.”

  깜박 깜박. 기어이 속눈썹에 물방울이 묻어 올라왔다. 그게 대체 왜 눈에 띄는지 알 수 없지만, 왜 손이 먼저 나가는지 알 수 없지만. 엄지가 상냥하게 눈꺼풀을 쓸었다.

“어휴. 어휴…….”

  꽉 안아준 등 뒤에서 킁, 코 마시는 소리가 났다.

“이 엔젤릭아…….”

“오랜만에 들으니까 되게 좋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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