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시안은 사랑을 사랑해
영하
네냐플에 사랑의 수호 성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게 무슨 약 파는 소리야? 그런 게 있으면 모든 커플들은 다 안 헤어지고 잘만 살게?”
막시민이 오늘도 자연스럽게 맥 빠지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오늘도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인 건지 아닌지 모르겠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마 사실은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걸으면서 몸이 흔들려서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맨틱하다고는 생각해.”
티치엘이 막시민의 말에 대꾸했다. 그 말에 막시민은 진심이냐는 듯이 눈썹과 눈 사이를 넓히고 티치엘을 바라봤다.
“근데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걸.”
사뿐한 몸짓으로 계단에서 내려온 조슈아가 자연스럽게 무리에 끼며 말했다.
“너는 어디 있다가 이제 오냐?”
“연습. 그 사랑의 수호 성인 말이야, 막군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이야.”
“뭐?”
막시민은 조슈아가 건네주는 무대의상을 떨떠름하게 받아 들었다. 조슈아가 물건을 넘겨 주어서 그런 건지 문제의 수호 성인이 자신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슈아는 셔츠를 정리하고서 막시민의 품에서 무대의상을 빼내 들었다.
“그게 누구지?”
웬일로 보리스가 질문을 했다. 그는 이런 가십에 흥미를 보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다들 고백을 주고받는 철이 다가온 탓인지 아니면 같은 빌라에 사는 학우들도 모르는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지, 그것도 아니면 역시 오늘 아침 메뉴가 이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보리스! 막시민! 티치엘! 어, 조슈아도 있었구나!”
1층에서 한 쪽 팔을 휘휘 흔들며 환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햇살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과도 같은 금발은 흐린 날에도 여전했다.
“저기 있네, 네냐플 사랑의 수호 성인.”
“뭐?”
조슈아의 말에 세 사람은 한 마음인 것마냥 동시에 말했다. 조슈아는 세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루시안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장난해? 쟤가 사랑의 수호 성인이라고?”
“이게 무슨…”
“루시안이 왜…?”
조슈아를 제외한 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 말을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워 하거나 말거나 루시안은 성큼성큼 계단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곧 올라올 테니까 직접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조슈아는 계단의 난간에 가볍게 몸을 기댄 채 웃었다. 어떻게 우리 중에 조슈아만 알고 있는 거지? 싶다가도, 생각해보면 조슈아는 연극을 준비하며 교내의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있었다. 그곳은 필시 시장바닥만큼 소문이 모이기 좋은 곳일 테였다.
“루시안, 아침부터 바빠 보이네.”
“응, 1학년의 레아 알지? 그 붉은 머리카락이 아주 긴 애 말이야. 그 애의 고민을 좀 들어 주고 왔어.”
설마.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질문을 건넨 조슈아는 빙글빙글 웃고 있고 두 사람은 아연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워 했으며, 한 사람은 표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내심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루시안은 그 고민 상담의 대가인지 레몬 파이를 몇 개 들고 있었다.
“이거 먹을래?”
그는 아주 명랑하게 품에 들고 있던 레몬 파이를 권하기까지 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루시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안이라면 그럴 수 있다. 루시안이라면 연애 상담을 해 주다가 성사까지 시켜 줬을 거고, 그러다 사랑의 수호 성인이라는 별칭까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주 간단한 추리였다. 납득 완료. 세 사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창한 별명이 생길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큰일은 아니었나 보네. 그래, 루시안이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다행이네. 분명 조슈아를 포함한 네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루시안이 그 별명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몰라도 그에게 좋은 추억이 하나 더 생겨서 다행이라고.
*
“어, 왔냐. 아니, 왜 둘이 같이 들어오냐.”
도토리 빌라 거실에 놓인 소파에 누워 있던 막시민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란지에와 루시안을 향해 말했다. 저녁 식사 시간과 자정 중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란지에는 평소에도 종종 이 시간에 들어오곤 했지만 루시안이 이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보리스와 함께가 아닌 점에서 더 희한했다.
“요 앞에서 루시안이 곤란해 하고 있기에 내가 데려왔어.”
샤워를 마친 보리스가 머리의 물기를 털며 거실로 나오다 상황 파악이 안 된 건지 멀뚱히 서 있었다.
“아니, 다들 나더러 회장을 해 달라잖아.”
루시안이 힘이 빠지긴 하지만 기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변명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도 묘한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회장?”
막시민이 보리스를 힐금 살피며 물었다. 보리스의 머리와 손 사이에는 아직도 수건이 있었고, 막시민은 아직도 보리스의 표정이 어떤지 읽을 수 없었다. 묘하게 바뀌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뭔 줄 알아야지. 보리스의 표정은 인지는 가능하지만 해석이 불가능한 고대 문자 같은 것이었다. 막시민은 몰랐지만, 보리스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불안이나 귀찮음이 아니었다. 다만 계산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사랑은 사랑이다’ 모임…”
루시안이 쑥스러운 티를 버리지 못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몸을 배배 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 이름 네가 지었어?”
란지에까지 물어볼 정도였다.
“아아니! 다들 이름까지 미리 지어 왔더라고…”
“도대체 왜 그렇게 수줍어하는 거야!”
루시안 덕택에 빌라 내에 감도는 간지러운 기분을 견디다 못한 막시민이 대놓고 물었다.
“그치만 이런 건 처음인 걸!”
루시안의 외침에 빌라 내부는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이어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로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막시민이었다.
“네가 모임의 대표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너는 늘 뭔가 하고 있잖아.”
“그건 다들 계획을 마치고 나를 부른 거였어! 블루벨 파티 같은 것도 돌아가면서 하는 거였고.”
드러누워 있던 막시민은 그제서야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큰 상단의 자제면서 실질적으로 뭔가 주도한 적이 없었다니. 아니,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새삼스러웠다. 정말 곱게만 자랐잖아. 부럽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 따윈 없고, 새로운 정보가 흥미로웠다.
“애들이 몰아붙여서 거절하기 어려웠던 아니었구나.”
란지에는 그 얘기를 듣고서 왜 루시안이 거절하기 어려워했는지 납득했다. 그의 의문은 루시안이 어째서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는가, 였다. 보리스는 루시안이 그 제안을 왜 좋아하는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일단 루시안이 좋아서 둘러싸여 있었다는 걸 알았으니 한 가지 걱정은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남은 걱정은 왜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혼자 있었냐는 것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
“응! 다들 부탁하느라 모인 것 뿐이었어.”
“다음부턴 나랑 꼭 같이 가.”
“응!”
루시안은 보리스가 화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명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질문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걔네는 왜 네가 회장을 해야 한다는 거야?”
막시민은 아무 것도 들은 적이 없다는 양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루시안은 말을 고르는 건지 눈을 굴렸지만 두 뺨은 여전히 상기된 채였다.
“음… 내가 사랑을 만들어서?”
도토리 빌라 안에는 다시 정적이 맴돌았다. 이번에는 아까의 그것보다 조금 더 길었다. 네가… 사랑을… 만들어…? 이 얼마나 거창한 말인가. 위대한 마법사들조차 고작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데에 그쳤는데 정식으로 마법사가 되지도 않은 루시안이 사랑을 만들었다니. 꼭 그런 것이 아니라도 그게 만들어질 수 있는 개념인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너무 경악스러운 나머지 막시민은 친히 몸을 일으켜 테이블 앞에 앉기까지 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어 주기도 했고, 또 꼭 이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도 했고!”
말없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세 쌍의 눈길에서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않는지, 루시안은 정말 가볍고 산뜻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행보는 전혀 위대한 업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꼭 이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사랑을 만들었다고 볼 수 없지 않아?”
막시민의 말에 루시안은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반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혼자만의 마음에도 사랑은 있잖아!”
“그 모임은 뭘 위해 만들어지는 건데?”
“아! 음…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보리스가 묻고, 루시안이 답했다. 루시안의 대답에 세 쌍의 눈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걸 왜? 심지어 그걸 왜 루시안이?
“그렇다면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뭘 하는 건데?”
란지에가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곤 의자를 끌어당겨 그 위에 앉았다. 루시안을 직시하며 건넨 질문에 루시안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사람들은 각자만의 고민이 있으니까 고민의 분류를 나눠 담당자를 나눠서 상담해 주자고 했어! 제일 어려운 고민은 나한테 오는 거고! 어, 근데 그 파이 안에 뭐 들었어? 피칸이면 내가 먹어도 돼?”
“어어, 그래라, 그래. 근데 그럼 네 고민은 누가 상담해주냐?”
막시민이 성의 없이 피칸 파이가 담긴 그릇을 루시안 쪽으로 밀며 물었다. 아까 티치엘이 두고 간 건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던 파이였다. 루시안은 주변에서 그나마 쓸 만한 포크를 집어 들어 파이를 자르고 찍어, 입에 넣었다.
“나? 나는 너희가 있잖아! 물론 말하다 보면 저절로 풀리는 일도 많지만! 근데 이거 좀 짜네…”
“뭐? 그럼 우리도 같이 일하는 거잖아.”
막시민은 내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보리스가 보기에는 조만간 흐지부지 될 모임인 것 같아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고, 란지에는 어차피 바빠서 저 모임과 엮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너 연애는 해본 적 있어?”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의외로 막시민이 아닌 란지에였다.
“연애 안 해봐도 상담은 할 수 있지.”
보리스가 루시안을 대신해 대답한 것 같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시안이 말했다.
“음… 아마…? 근데 데이트 몇 번 하고 나면 다들 내가 연애에 흥미가 없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다들 몰랐겠지만 보리스는 나름 꽤 충격 받은 표정으로 루시안을 바라봤다. 설마 내가 봤던 것 중에도 ‘연애’가 있었던 건가?
“결국 다 차였다는 거네. 뭐, 차인 쪽이 연애는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막시민은 두 다리를 쭉 뻗어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연애에 흥미가 없는데 연애 상담을 해주는 거야?”
“음… 이상한가? 그치만 나는 사랑이 좋은 걸!”
“아니… 그거야 알겠어. 그치만 우리가 보기엔 그 모임이란 건 결국 네 추종자들 밖에 안 되는 것 같고, 결국 흐지부지 될 것 같단 말이야. 애초에 네 이름을 빌려서 만든 모임에 상담을 하러 온다는 건 네게 직접 상담하고 싶어서 그런 걸 테고. 그럼 그 모임이란 것 자체가 위험하다면 위험하기만 했지 뭔 의미가 있냐, 이거지. 그냥 각자 잘 살다가 필요할 때 네게 상담이나 받으면 안 되는 거냐?”
막시민이 주변에 놓인 컵을 테이블 클로스로 슥슥 닦곤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물론 시선은 루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시안은 잠시 눈을 데구르륵 굴리며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애들한테 모임은 하지 말자고 해야겠다! 대신 스케줄을 조정해 줄 조수가 필요하겠어!”
루시안은 박수라도 칠 기세로 말했고, 마지막 말에 모두가 안도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어지간한 고민은 현관문 앞에서 끝내고 들어와라.”
나름대로 쾌적한 휴식 공간을 침해 당하고 싶지 않았던 막시민의 말에, 란지에와 보리스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도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고민 끝. 이번에도 문제 해결. 막시민은 그새 포도주를 한 잔 다 마셨기에 한 번 더 컵에 따랐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쉬었고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한 나에게 한 잔 더 줘야지.
그땐 그렇게 잘 해결된 줄로만 알았다.
*
“너희 거기서 뭐해?”
며칠동안 매일 늦던 란지에가 간만에 일찍 돌아온 날이었다. 빌라 앞에선 루시안과 막시민이 서성이고 있었다.
“야, 마침 잘 왔다. 어쩐지 너라면 이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빌라 문이 또! 안 열린다.”
“보리스가 해봤어?”
란지에가 소지품을 복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자리에 없으니 안 해봤을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보리스는 아직 검술 훈련 중이래!”
“그러니까 문짝이 아직 멀쩡한 거지.”
“… 손잡이 자체가 안 돌아가네?”
“내 말이! 얼마나 됐다고 문고리도 벌써 반질반질해져서는…”
막시민이 말을 쭉쭉 뽑아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루시안을 바라봤다.
“너 혹시 네 추종자들에게 뭐라고 했어?”
“웬만한 건 현관문에서 해결하라고…?”
루시안의 그 대답에 문고리를 들여다보던 란지에조차 훽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현관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 아냐! 막시민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추론할 것도 없었다. 루시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그의 추종자들은 정말로 문고리를 해결책으로 삼은 것이었다.
“남의 빌라 문고리를 잡고 소원이라도 빌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네냐플을 지성의 장이라고 해도 되는 거냐?”
“그건 나도 동감.”
란지에가 문고리에 올려둔 손을 은근슬쩍 떼며 동의했다.
“내일 당장 도토리 빌라 문고리는 남의 연애사는 물론이고 우리의 연애사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려야 할 거야. 아니라면 못해도 2주에 한 번은 이런 꼴이 될 테니까.”
란지에가 몸을 일으키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바닥에 놓인 소지품들을 줍더니 도움을 청하고 오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막시민은 이 추위에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때 요상한 모임을 말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기세였다면 분명 루시안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휘말렸을 테니까. 이 녀석은 폭풍처럼 남을 휘감아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다.
“너무 시무룩할 필요 없어. 다들 한창 때니까 사랑 고민이 많은 탓이고 네가 사랑을 사랑하는 것도 어디 네 탓이겠냐.”
어색하게나마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루시안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란지에 녀석이 칼 같이 말하긴 했어도 울 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설마 진짜 우는 건가? 막시민은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 루시안의 표정을 살폈다.
“뭐야. 울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그럼 이제 어디서 소원을 빌라고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어!”
루시안은 울기는커녕 나름대로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대단한 녀석이었다. 추종자들도 만족시키면서 빌라 구성원들의 요구도 들어 줄 수 있는 방안이 당연히 존재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 보통내기의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로 할 거냐?”
“기숙사 입구에 있는 나무!”
“그 나무는 그러다 손 타서 죽는 거 아니야?”
“아, 그럼… 교문으로 할래!”
“그 정도면 괜찮겠네. 이 놈의 등록금 그런 데에라도 써야지!”
“그래? 괜찮아? 그럼 거기로 해야지! 근데 란지에는 언제쯤 올까? 슬슬 눈썹이 얼고 있는 것 같아.”
루시안의 말에,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 싶어서 쳐다보니 눈썹이 얼기는 무슨, 입술이 떨리지도 않았다.
“허풍이 너무 심한 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막시민이 말을 끝맺지 못한 이유는 보리스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계단을 걸어 올라왔을 테니 느닷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루시안과 막시민은 추위에 고통받느라 시야가 좁아진 상태였기에 보리스가 불쑥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다.
“보리스! 잘 왔어! 빌라 문이 안 열려! 하지만 보리스가 나서면 저번처럼 되려나…?”
“아서라, 저번처럼 될라. 아까 란지에가 도움을 청하러 갔어.”
“그렇다면 오래 걸리지 않겠네.”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문 근처에는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란지에가 도움을 줄 만한 사람과 나타났다. 문은 순식간에 고쳐졌고, 빌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란지에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조슈아한테라도 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막시민은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렇지만 그걸 떠올리지 못한 본인의 탓일 뿐이었다.
“그러게! 티치엘이나 조슈아라면 들여 보내줬을 텐데!”
루시안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남부 출신에게 겨울은 더 춥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
8년 뒤, 네냐플의 교문은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자꾸 닳던 것을 보수하다 못해 아예 새 것으로 교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토리 빌라에 입주하게 되는 학생의 사랑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루시안 다음에 살게 된 학생은 네냐플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함께 살던 다른 학생은 현재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도토리 빌라에는 사랑의 수호 성인이 가호를 내렸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연구생 몇몇을 제외한 학생들은 그들이 자못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사랑의 수호 성인’은 또한 막대한 장학금을 기부하는 ‘황금 까마귀 재단’의 소유자이며,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썽꾼 도토리 빌라 입주자들’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교수들과 몇 안 되는 (아직도 졸업을 하지 못한) 연구생들이었는데, 그들은 학생들에게 굳이 사랑의 수호 성인의 정체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다. 학생들의 환상을 지켜 주기 위함은 아니었고, 그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냐플의 연구생들은 여전히 논문을 쓰느라 바빴고, 교수들은 원래도 바빴고 네냐플의 또 다른 말썽들을 처리하느라 더더욱 바빴다.
“사랑의 수호 성인의 연애사는 아주 성공적이었겠지?”
이번에 도토리 빌라에 입주하게 된 헨릭은 문가에 서서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세 명에게 물었다.
“모르지. 연애보다는 레몬 파이가 더 좋았던 사람일 수도.”
마르틴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헨릭은 “그랬으려나. 그럼 레몬 파이에게도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겠네.”라고 말하며 빌라의 문을 닫았다.
그들은 그 문고리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들이 사랑에 빠져 교문으로 달려가는 와중에도, 꿈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수호 성인이 누구인지, 그는 연애보다 레몬 파이가 더 좋은 사람이지만 당연히 사람과 사랑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은 그들의 선배인 루시안 칼츠라는 사실도 영영 밝혀지지 않고 도토리 빌라의 빌라 전쟁처럼 전설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