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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귀기담 (暗鬼奇談)

빗물

막시민 리프크네의 하루는 아침부터 통 재수가 없었다. 시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잠들어 있다가 어쩐지 싸한 느낌에 상체부터 벌떡 일으키고 보니 지각을 넘어 F학점이 날아오기 직전이었고, 후원자의 성질머리가 떠올라 허겁지겁 뛰쳐나가려다가 지난밤에 대충 내던져놓은 옷을 밟고서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깨질 뻔했고, 역시 안하던 짓을 하려니 이 사달이 난다며 짜증스레 빵 봉투나 뒤적거렸더니 빵이 바싹 말라있었고, 그거라도 씹으며 슬리퍼를 죽죽 끌고 자취방을 나섰더니 몇 걸음 걷지 않아 정수리께가 축축해졌다.

불운하게도 막시민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막시민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빵을 한입에 삼켰다. 입가에 묻은 빵가루까지 야무지게 털어낸 다음에야 핸드폰 카메라를 거울로 삼아 머리를 살펴보았다.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흰 새똥이 주륵 묻어있었다. 막시민은 머리카락을 다급하게 더듬어 보는 대신, 숱한 경험으로 빚어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주머니와 가방 속부터 열심히 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쓰다만 휴지나 구겨진 영수증, 전단지, 유인물 같은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길 건너 편의점에 가서 휴지를 사기에는 어쩐지 좀 아까웠다. 휴대용 휴지나 물티슈는 길바닥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거 아니었나? 막시민은 단 한 번도 그런 걸 제 돈 주고 사본 적이 없었다. 결국 막시민은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막시민에도 희망과 낙관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새똥에 맞았으니 복권이라도 한 장 사야하나 싶어 설레는 마음을 붙잡고 편의점이며 온갖 복권 명당을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복권 1등도 2등도 3등도 하다못해 5천원도 당첨되지 못하는 나날이 삼사 년쯤 반복되다보면 불타던 희망도 벼락부자의 꿈도 천천히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당첨되지도 않을 당첨금보다는 복권을 사느라 지금 당장 손에서 빠져나가는 돈이 아까웠고, 복권 시스템과 새똥과 미신과 하여튼 온갖 확률이라는 것들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으며, 눈에 불을 켜고 복권 추첨 방송을 지켜보다가 똥 씹은 표정을 하는 막시민을 보고서 깔깔대며 웃는 조슈아의 낯짝도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복권을 살 이유보다 사지 않을 이유들만 빠르게 늘어났다.

집에 도착한 막시민은 새똥이 묻은 머리카락을 물과 비누로 대충 비벼 닦았다. 이왕 집에 들어온 김에 마른 빵도 하나 더 집어 들었고,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나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멈춰 서서는 낡은 옥색 신발장 위로 손을 뻗었다. 원래 양말 따위가 담겨있었을 상자 안에는 붉은 팥과 굵은 소금이 봉지 가득 들어있었다. 막시민은 팥을 한줌 가득 쥐고서 신발과 다리, 몸, 그리고 정수리 위에 신경질적으로 흩뿌렸다. 다음은 굵은 소금이었다. 현관에는 이미 그런 식으로 쌓인 팥과 소금들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막시민은 스마트폰에도 야무지게 액땜을 마친 뒤 거칠게 머리를 흔들며 현관을 나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있던 소금 알갱이들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신발 밑에서 소금이 까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막시민의 자취방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걸어서 십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오 분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동안 막시민은 차창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다. 그 사이에 경미한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다른 학생들이 전부 지각을 면하러 뛰쳐나가는 통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그새 아주 깊이 잠이 든 막시민은 미동조차 없이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던 버스 기사님과 구석진 자리에서 잠들어있던 막시민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버스는 차고지에 이미 도착해있었다. 팥하고 소금은 사실 전혀 효과가 없는 거 아닐까, 민간신앙 대체 뭐냐, 이건 그릇된 민간신앙을 대대손손 전해온 조상님들이 문제 있는 거 아니냐……. 막시민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조상님들에 대한 원망을 잇새로 꼭꼭 씹어가며 버스에서 내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수업이 시작하고도 삼사십 분은 훌쩍 넘었을 시간이었다. 이정도면 강의실에 들어가도 별 의미가 없다 못해 교수의 모난 시선만 잔뜩 받을 게 분명했다. 막시민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발을 질질 끌었다.

괜히 강의실 주변을 얼쩡거리다 교수의 눈에 띄면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점심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 텅 빈 식당에서 콩나물라면을 한 그릇 시켜먹던 막시민은 기어코 또 다른 불행에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평소에는 쉬는 시간까지 빈틈없이 꽉꽉 채워 수업하는 바람에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하던 교수가 하필이면 오늘 30분이나 일찍 수업을 끝내준 것이다. 마침 막시민은 식판을 반납하고 나가려던 참이었고, 교수는 동료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라 막시민의 목덜미를 당장에 잡아챌 수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식판을 급하게 밀어놓느라 그릇 안에 남아있던 라면 국물이 막시민의 한쪽 손과 소맷자락을 잔뜩 적셔놓았다. 그 순간에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좀 문제가 되기는 했다. 막시민은 그날 하루를 완전히 라면 냄새와 함께 보내야 했다.

그밖에도 수강신청에 장렬하게 실패하는 바람에 혼자 듣게 된 교양수업 강의실이 어쩐지 텅 비어있더라니 오늘 휴강이었다던가, ‘999+’ 숫자를 굳건히 유지하는 메신저 알림 사이에 때 아닌 쪽지시험 공지가 숨어있었다는 걸 시험지를 받고서야 알았다거나,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기에 대놓고 면박을 주며 쫓아내버렸던 윗 학번 누구를 복도에서 마주쳤다거나 하는 불행한 일들이 몇 개 더 연이어 일어났다.

막시민이 아무리 재수가 없는 편이라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조슈아가 옆에 있었더라면 ‘너 오늘 완전 재수 옴 붙었네, 옴.’하고 큰 소리로 낄낄댔을 것이다. 조슈아는 막시민과 반대로 운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조슈아의 옆에 철썩 달라붙어있을 때면 막시민이 겪는 불행도 절반 이하로 눈에 띄게 희석될 정도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슈아는 몇 주 전 집안사정으로 인해 중도 휴학을 신청한 상태였다. 히스파니에며 막시민도 면면을 아는 집안사람들까지 분주한 것을 보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남의 집안일을 자세히 캐묻기도 그래서 막시민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물대기만 했다.

그래도 휴학 직후에는 일 없이도 종종 막시민의 자취방에 들르곤 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정말로 바빠졌는지 조슈아의 연락도 조금 뜸해졌다. 혼자 남겨진 막시민은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는 TV 채널을 한참이나 돌려보았다. 어젯밤에는 조용한 방이 이상해서 괜히 집안 이곳저곳을 들쑤셔보다가 베란다 구석에 교묘하게 숨겨진 맥주를 발견하기도 했다. 아마도 시험 전날 조슈아가 숨겨두었던 맥주일 것이다. 술을 발견하니 신이 나서 들이켜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 이 모양이 되기는 했지만…….

운수 더러운 날에 설상가상으로 비라도 쏟아질 셈인지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가방에 휴지나 필통조차 없는데 우산이라고 들어있을 리가 없었다. 막시민은 정 필요하면 머리 위에 옷을 뒤집어쓸 생각으로 주섬주섬 겉옷을 벗었다. 순간 막시민의 시야 속에 익숙한 사람이 스쳐지나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반 뼘은 훌쩍 큰 키에 비 오기 전 하늘처럼 흐린 회색빛 머리칼을 한 사람이었다. 막시민은 외투를 벗다가 굳은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막시민이 조슈아를 잘못 볼 리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조슈아가 막시민에게 연락 한 번 주지 않고 학교에 올 리 없었다. 막시민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조슈아는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조슈아를 찾아 헤매는 막시민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클라리체 데 아브릴은 학교 앞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따로 아르바이트 장소로 이동하느라 시간이나 돈을 크게 쓸 필요가 없고, 사람을 많이 뽑는다는 점에서 제법 인기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그만큼 손님도 일거리도 많았다. 누군가 말도 없이 흘리고 간 커피를 대걸레로 박박 문질러 지우고, 쟁반과 접시가 크레이프 케이크마냥 겹겹이 쌓인 반납대를 정리하고, 학교에 왔으면 수업을 들어야지 왜 강의실이 아니라 여기에 줄을 서있는 건지 모르겠는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고……. 정신없이 일을 하다 잠깐 짬이 생겨 시계를 보면 퇴근시간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보면 눈앞에 뱅글뱅글 돌고 손에 들린 게 초콜릿 시럽인지 캐러멜 시럽인지 구분이 되는 게 그저 감사할 지경이고 그렇다. 그래서 리체는 카페 안의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다는 걸 다소 늦게 깨달았다. 언젠가 생크림과 시럽을 잔뜩 올린 아이스 캐러멜 마끼아또를 받아드는 순간 떨어뜨려버린 손님이 내질렀던 비명처럼 커다란 소리도 아니었고,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와 정신없이 떠드느라 생겨나는 소란스러움도 아니었고, 이어폰도 없이 소리를 켜놓고 인터넷 강의를 듣는 극악무도한 짓도 아니어서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사람들은 어느 한 곳을 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대고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어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기도 했다. 카운터에서 슬며시 몸을 내밀어 보았지만 워낙 손님들이 빼곡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리체는 그동안 숙달된 아르바이트생의 자본주의 미소와 자동응답기처럼 흘러나오는 손님 응대 매뉴얼을 십분 발휘하며 사람들의 속닥거림에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동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거나 생길 예정이라면 최대한 재빨리 해결해서 칼같이 퇴근하고 싶다는 건실한 욕구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바짝 긴장한 리체의 상상과는 달리 그 이상의 소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한 군데를 빤히 응시하다가 종종 대기줄을 벗어났고, 앞사람이 주문을 끝낸 것도 모르고 넋을 잃기는 했으나 딱 그뿐이었다. 다음 시간대 아르바이트생과 눈인사를 하며 리체는 카페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관심을 껐다. 퇴근 10분 전, 이제는 정말로 행복하고 선하고 긍정적인 생각만 해야 했다. 이 시간대에 괜히 불길한 상상을 했다가는 그게 씨앗이 되어 퇴근이 늦춰질 뿐이니까.

포스기 앞을 넘겨준 뒤 리체는 커다란 물통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퇴근 전 마지막 일감이었다. 앞치마 위로 물방울이 잔뜩 튀는데도 퇴근이 코앞이라 생각하니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투명한 물통에 얼음을 크게 스쿱으로 퍼 담고, 레몬 슬라이스와 허브 한 줄기 위로 물을 한가득 들이부었는데도 물통을 옮기는 발걸음이 그토록 가벼웠던 것은.

카페 카운터에서 시작된 주문 대기줄이 유리 출입구 코앞까지 늘어져있었다. 그 중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리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병 속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지금이야 냉동고에서 바로 꺼내 크고 반듯하다지만 고작 한두 시간만 흘러도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터였다. 그러면 물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테이블이 흥건해질 테니 밑에 마른 행주도 하나 더 받쳐놔야겠다고, 생각을 이어가던 리체의 등을 누군가가 떠밀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정신없이 웃던 한 학생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젖히다가 큼직한 배낭으로 리체를 밀어버린 것이다.

대학교 앞 대형 카페들이 으레 그렇듯, 통로가 좁고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넘어질 데는 없었고 붙잡을 데는 많았다. 리체는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리체의 품에 안겨있던 물통은 사정이 달랐다. 헐겁게 닫혀있던 뚜껑은 바닥으로 쏟아졌다. 얼음물이 그대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요란하게 날아갔다. 리체가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한, 그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의 얼굴 위로 물이 흠뻑 쏟아졌다. 남자의 머리카락과 흰 뺨 위로 꼭 눈물처럼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얼굴이 유난히도 창백해 보인 건 아마도 난데없는 얼음물벼락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리체는 그 어떤 진상이 찾아와도, 끔찍한 돌발사태가 벌어져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야무진 손끝으로 해결하곤 했다. 사장님들은 다년간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다져진 리체의 순발력과 대처능력을 꽤나 신뢰했다. 평소라면 리체는 당장에 행주와 수건, 걸레까지 두루 챙겨 이 일을 수습할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리체의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물벼락을 맞은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다. 이 얼굴을 보는 순간 리체는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 일하는 동안 있었던 모든 소란이 바로 이 남자 때문이었다. 남자는 아주 시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온 이목구비가 세상을 향해 여기 좀 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시선을 주지 않고서는, 어떻게든 입에 올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는 물에 흠뻑 젖어 큰 눈을 유순하게 끔뻑거리고만 있으니 아무리 리체라고 해도 말문이 턱 막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는 화를 내지도 않고 리체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에 방울지며 맺힌 물이 뚝 떨어지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희미한 변화가 생겼다. 가볍게 눈을 찡그린 남자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그제야 리체도 퍼뜩 정신을 차리며 손님에게 다가갔다.

“아, 어떡하지.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몸 닦으실 수건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리체가 발을 동동 구르기 무섭게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헐레벌떡 수건을 들고 와 내밀었다. 고맙다고 눈짓하며 손님에게 수건을 건네려던 리체는 순간 흠칫했다. 일단 다행스럽게도 걸레나 행주가 아니기는 했는데, 설거지를 하고서 손이나 닦던 형광 분홍빛 수건은 보풀이 잔뜩 일어있었다. 심지어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의 돌잔치를 기념하는 글귀까지 떡하니 적혀있었다. 돌을 맞이했던 아기가 지금쯤 초등학교에 입학해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건은 낡아있었다. 리체가 민망함을 삼키며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건을 가져갔다. 거친 수건을 얼굴 가까이 가져갈 때는 리체도 그만 참지 못하고 남자를 말릴 뻔했다. 리체의 사회적 체면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젖은 목덜미와 머리칼만 툭툭 털어냈다.

리체는 재빨리 카운터로 돌아가 행주와 걸레를 챙기고, 난데없이 얼음물을 맞은 남자를 위해 따뜻한 유자차도 한 잔 챙겼다. 충분히 불쾌해할만한 상황인데도 남자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리체가 세탁비라도 드리고 싶다 먼저 말을 꺼내니 괜찮다며 극구 사양하기까지 했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이나 노트북 같은 게 없었던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참 다행이기는 한데, 정시퇴근이 멀어져가는 기분만큼은 참 까마득해서 리체도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하루가 긴데 이 모든 소동이 일어난 지 불과 30분도 되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다음날부터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니 그 프랜차이즈의 다른 지점 간판만 봐도 머리가 욱신거리면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클라리체 데 아브릴의 숱한 아르바이트 경력 중에서도 그런 사고를 친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민망해서 한숨만 푹푹 나왔다. 조만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든지 해야지…….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리체는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카페 앞치마를 질끈 둘러맸다. 그깟 부끄러운 기억 한두 개가 대수인가. 돈이 대수지.

그날의 기억 중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건 단연 물벼락을 맞은 손님의 얼굴이었다. 리체를 실수로 밀쳤던 사람의 얼굴이나 가방의 생김새 같은 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얼굴만큼은 눈을 감아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법한 얼굴이기도 했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이기도 한데다가 리체가 그만큼 집중해서 열렬히 바라본 탓이기도 했다.

남자는 과연 시끄러운 얼굴만큼이나 시끄러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를 알아본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넌지시 리체에게 귀띔해준 덕분에 리체는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조슈아 폰 아르님, 나이는 리체와 동갑, 최근 학기 중에 돌연 교수와 개인 면담 후 휴학했음, 내로라하는 아르님가의 자식이라 곧 유학을 간다는 말도 있었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추종자―스토커들 때문이란 말도 있었으며, 휴학이 아니라 아예 퇴학을 하고서 가업을 잇는다는 말도 있었다. 리체는 궁금하지도 않았던 온갖 말들이 주위 사람들의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왔다.

“어휴, 난 그날 생각만 하면 아직도 부끄러워서 못살겠어.”

조슈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수치심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젓던 리체가, 그 이야기들을 웃으며 장난으로 넘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 달이 조금 못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이 시끄러운 얼굴로, 그 옆에는 너무 익숙해서 믿을 수 없는 이를 달고서. 조슈아 옆에는 리체의 오랜 친구인 막시민이 시큰둥한 얼굴로 서있었다.

 

막시민도 조슈아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참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 빨며 웃는 조슈아의 얼굴에는 약간의 멋쩍음이 서려있었다. 평소 같으면 막시민의 자취방 혹은 이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루시안과 보리스의 집에서 만났을 텐데. 술집도 아니고 한낮의 카페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늘 보던 얼굴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바빴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조슈아의 얼굴에 피곤이 잔뜩 맺혀있었다. 막시민은 트레이 위에 놓여있던 초콜릿 쿠키를 조슈아를 향해 밀어주었다.

“먹어.”

“웬일이야? 네가 이런 걸 다 사고.”

조슈아가 의아한 얼굴로 포장을 죽 찢었다. 막시민은 평소에 단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술안주라면 몰라도 굳이 제 돈 들여가며 디저트를 사는 일이 드물었다. 막시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카운터쪽을 턱짓했다. 막시민의 시선을 따라 조슈아의 고개가 움직였다.

“쟤가 줬다. 나 말고 너 먹으라던데.”

“아, 친구라던?”

카운터에서는 장밋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어 올린 직원이 한창 주문을 받고 있었다. 막시민이 종종 이야기하던 그 대학 친구 같았다. 조슈아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리체가 눈을 맞추며 무어라 입술을 벙긋거렸다. 조슈아는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막시민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어색하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막시민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화면 위로 끊임없이 메신저 알림이 빗발치고 있었다. 조슈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기대곤 한숨을 쉬었다. 손자국이 잔뜩 남은 유리창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지나갔다.

“한두 달 학교 안 왔다고 그새 뭐가 되게 많이 변했네. 원래 저 자리에 빵집 있었잖아.”

“저번에도 본 거 아냐? 너 몇 주 전에도 학교 왔다 갔잖아.”

“어?”

창밖을 내다보던 조슈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막시민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유리창 너머 보이는 학교 정문을 손짓했다.

“나 저번에 너 저기서 봤는데. 정신없이 어디로 가는 것 같아서 잡지는 못했지만. ……혹시 뭐, 말하면 안 되는 일이었냐?”

막시민은 조슈아쪽으로 몸을 기울이고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슈아는 희한할 정도로 불운이 꼬이는 막시민의 신세를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막시민도 조슈아가 가진 몇 가지 특수한 능력들을 잘 알고 있는 극소수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지낸 두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말한다고 해도 쉽사리 믿지 못할 일들이 참 많았다.

조슈아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선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조슈아의 핸드폰이 깜빡거렸다. 푸른빛 전화 수신 화면 위로 ‘작은 할아버지’ 여섯 글자가 떴다. 막시민도 잘 알고 있는 조슈아의 작은 할아버지, 히스파니에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조슈아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막시민, 이 뒤에 수업 있어?”

“……어. 호이아크 교수 수업. 그리고 그거 끝나고 조별과제 미팅도 가봐야 할 것 같던데. 이번에도 안 나오면 제출할 때 아예 내 이름을 빼겠다고 난리더라.”

막시민이 손끝으로 제 휴대폰 위를 톡톡 두드렸다. 답지 않게 메신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더라니, 조원들의 재촉에 시달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 쥔 휴대폰은 아직까지도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럼 가봐야지. 이따가 저녁에 전화할게 꼭 받아. 나 할 말 있어.”

“그래. 안 받으면 어련히 알아서 자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내일 저녁에 걸고.”

“응. 꼭두새벽부터 전화해서 꼭 깨워줄게.”

조슈아가 손을 흔들며 사뿐히 멀어져갔다. 조슈아의 걸음 뒤로 카페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은근하게 따라붙는 것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막시민은 제 몫의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확인했다. 수업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으니, 괜히 일찍 가서 복도를 서성대며 이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벽을 보고 앉아있던 막시민은 누군가 뒤에서 다가오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누군가 막시민의 앞에 갑작스레 트레이를 훅 내려두었다.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어깨를 웅크렸던 막시민은 제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얼굴을 폈다. 리체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났는지, 카페 앞치마를 벗어던진 차림이었다. 방금까지 조슈아가 앉아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리체가 돌연 막시민을 향해 소곤거렸다.

“막시민, 너 저 사람 어떻게 알아?”

“조슈아? 어떻게 알긴 뭐. 그냥 아는 사이지. 너야말로 갑자기 웬 과자를 줬냐?”

“아니, 그게!”

리체가 마시던 컵을 쾅 내려놓으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저 사람 기억력 좀, 엄청 나빠? 사람 얼굴 못 알아보고 그래?”

“……아니 전혀. 무슨 소리야. 쟤 그런 말은 태어나서 들어본 적이 없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까지 모른 척을 한다고? 네 친구라는 사람 말이야, 분명히 몇 주 전에 여기 왔었거든. 한 한달 전쯤인가? 그날 일하던 직원들이랑 손님들도 다 기억할 걸. 내가…… 물을 엎질러서 난리 났었어. 그래서 그 사람 얼굴이랑 옷이랑 다 젖었었는데, 그땐 분명히 괜찮다고 세탁비는 필요 없다고 말했으면서 오늘 완전 모른 척을 하는 거야. 괜찮다더니 사실은 엄청 화났던 건가 싶었지. 미안해서 과자 하나 서비스로 줬더니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얼굴이나 하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보통 절대 못 잊어버리지 않아? 정신없어서 얼굴을 못 봤다고 해도 앞치마도 그대로고 내 머리색도 그대로고, 여기가 그때 그 카페인데.”

리체가 짜증을 담아 생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야무지게 들이키는 동안 막시민은 생각에 잠겼다. 자그마한 머릿속에서 그가 지금껏 알아온 조슈아와 그가 미처 보지 못한 조슈아가 재빠르게 뒤섞였다. 조슈아가 리체를 모른 척 한 것일까? 가능성은 있다. 조슈아는 본인이 그러고자 마음먹기만 했다면 세상 모두를 속이며 연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막시민의 앞이기에 일부러 모른 체 한 것일까? 보류. 전화하겠다던 조슈아의 말을 되짚어보면 막시민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기는 하다는 뜻인데, 리체를 만나서 곤란했다면 아예 약속장소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잡으면 될 일이었다. 리체가 여기서 일하는지 미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히스파니에의 전화도 신경 쓰였다. 조슈아와 히스파니에가 연락을 주고받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지만, 히스파니에의 연락을 보자마자 조슈아는 곧장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조슈아가 막시민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히스파니에와도, 히스파니에의 전화와도 연관이 되어있는지 몰랐다.

물음표투성이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떠오른 질문들에 막시민이 할 수 있는 대답들은 거의 비슷비슷했다: 알 수 없음, 보류, 가능성은 있으나 확신할 수 없음.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막시민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조슈아가 정말로 리체를 못 알아본 걸까?

그럴 리가. 막시민이 코웃음을 쳤다. 가능한 답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애초에 없었던 일이거나, 리체가 보았던 조슈아가 사실은 조슈아가 아니었거나.

생각에 잠긴 막시민 앞에서 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 사람 쌍둥이라도 있대?”

 

조슈아의 집에는 집주인보다도 먼저 도착해있던 손님이 있었다.

“오셨어요. 막시민 좀 만나고 오느라 늦었어요.”

소파에 앉아있던 히스파니에의 눈이 조슈아를 보는 순간 부드럽게 휘어졌다. 히스파니에의 손에는 체스 말이 들려있었다. 노인은 평소 활동성 좋은 옷을 고수하던 것과 달리, 빳빳하게 다림질한 검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히스파니에는 일에 임하는 자세나 감정 상태를 옷차림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짝 날을 세운 옷과 더불어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 체스 말을 내려놓는 큰 소리가 히스파니에가 들고 온 소식을 짐작케 했다.

조슈아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조슈아와 히스파니에는 본래 많은 대화가 필요 없는 사이였다. 두 데모닉은 서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제 머릿속처럼 훤히 알고 있었으니까.

“학교 앞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사진 증거도 있고.”

“그래, 나도 안다. 너희 학교 앞 카페에서 약간의 사고도 있었던 것 같더구나. 보리스 앞에도 나타난 것 같고. 보리스는 그 아이와 네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는 것 같던데.”

히스파니에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조슈아는 봉투 속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보리스가요? …그게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 텐데.”

“유달리 직감이 발달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잖니. 어쨌든 지금까지의 목격담을 정리해보자면, 그 애가 모습을 드러낸 건 내 앞과 네 매형, 매형 친구 앞, 네 부모님, 보리스와 티치엘 앞, 그리고 그 카페. 이렇게 되겠구나.”

히스파니에가 말을 끝맺기 무섭게 두 데모닉의 시선이 부딪혔다. 구태여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더라도 두 사람은 이미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종이를 훑어본 조슈아가 손끝으로 어느 한 부분을 짚어냈다. 한 달 전 카페에서 있었던 사고에 대한 목격담과 사진이었다. 방금 전까지 조슈아와 막시민이 앉아있었던 바로 그 카페였다. 그가 나타났던 장소 중 가장 이질적인 곳이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건 두 달 전이었다. 조슈아와 똑같은 얼굴을, 조슈아와 똑같은 목소리를 한 사람이 조슈아의 자리에 서있었다. 그가 조슈아가 아니라는 걸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히스파니에였다. 그는 조슈아를 낳고 기른 부모님도 못 알아볼 정도로 감쪽같았다. 놀랍도록 진짜 같은 가짜여서,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가짜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슈아와 가까운 사람들 앞에 나타나 조슈아 행세를 하곤 했다. 간혹 길거리에서 발견되는 그의 발자취는 모두 목적지로 향하던 과정 중 일부로, 만날 사람 없이 거리를 배회하거나 홀로 어디론가 들어가는 모습은 여태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도대체 왜 혼자 카페에 들어가 있었을까. 그 시간대 카페에 머무른 손님들을, 그 시간 전후로 방문한 사람들을 모두 확인해 봐도 조슈아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한 것도 단 두 번뿐이었다. 음료를 주문할 때, 그리고 아르바이트생이 실수로 물을 엎질렀을 때. 막시민의 친구라던 바로 그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막시민이 몇 주 전 보았다던 사람도 조슈아가 아니라 그일 게 틀림없었다. 조슈아는 오늘을 제외하고서는 휴학 이후 학교 근처에 얼씬거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조슈아는 눈가를 가볍게 찡그렸다. 두 달간, 히스파니에와 함게 견고히 쌓아올린 가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유령처럼, 환상처럼 나타나 조슈아를 흉내 내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가 홀로 정문 근처를 헤매고, 카페에 들어갔다는 건 그가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조슈아는 지금까지 수십 수백의 유령들을 보아왔고 그들과 곧잘 대화도 나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경우가 남달랐다. ‘그’는 조슈아가 보아온 그 어떤 유령들과도 달랐다. 조슈아의 말과 행동을 단순히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조슈아가 한 적 없는 말과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해냈고, 평범한 사람처럼 대낮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학가를 돌아다녔다. 형체가 또렷이 있어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마셨으며 물벼락을 맞아 흠뻑 젖기도 했다. 그리고 조슈아의 주변인들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면서 정작 조슈아 앞에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히스파니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조슈아, 어쩌면 그 아이는 단순한 유령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일수도,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존재일수도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일단은 더 알아봐야겠지만 말이다.”

“유령이 아니라면 비슷한 저주나 마법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네요. 그걸 시도할 만한 사람은 누가 있는지도 살펴봐야하겠고요. 그런데…….”

조슈아가 손끝으로 체스판 위를 톡톡 두드렸다. 희고 검은 체스판 위를 가느다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처럼 자유롭게 누볐다. 곱게 내리깐 시선 끝은 새카만 폰에 못 박혀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얼굴 몇 번 본 적도 없는 매형이나 애니 형한테는 찾아갔으면서. 이제 일이 년 알고지낸 보리스나 티치엘한테도 찾아갔는데, 왜 막시민 앞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걸까.”

 

그날 막시민의 귀가는 평소보다 한참 늦었다. 조별과제 미팅에서 달달 볶이고, 지친 심신을 이끌고 미적미적 밖으로 나왔더니 이번에는 지나가던 티치엘에게 단번에 붙잡히고야 말았기 때문이었다. 막시민은 결국 티치엘의 옆에 얌전히 앉아 과제를 해야 했다.

티치엘과 저녁까지 먹고서 홀로 집으로 돌아오던 길. 어둑한 골목길을 걸으며 막시민은 방금 전 조슈아와 나눈 통화를 떠올렸다. 두 달 전부터 조슈아와 꼭 닮은 존재가 조슈아의 흉내를 내며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기이한 내용이기는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비정상적인 불운에 시달렸던 막시민 자신의 삶과, 영매인 조슈아와 친구가 되며 겪었던 온갖 일들을 떠올려보면 그럭저럭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의 일이었다. 조슈아는 소위 말하는 ‘있는 집’ 자식인데다가 다른 사람의 시샘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이번 일이 조슈아를 겨냥한 누군가의 계략일 수 있다는 데에는 막시민도 동의했다. 그러나 막시민이 이해할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이만한 일을 꾸몄으면 제대로 일을 벌여야지, 왜 한가롭게 길거리를 쏘아 다니고 카페에서 물벼락이나 맞고 있는 걸까. 그것조차 계획의 일부분인 걸까?

막시민은 생각에 잠겨 오래도록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걸었다. 손에 들려있던 고기집 명함은 그새 가장자리가 닳았고, 담벼락에 붙어있던 과외 전단지에서 떼어온 종잇조각도 꼬깃꼬깃해져있었다. 막시민은 손바닥 안에 동글동글하게 말려있는 쪽지를 다시 펼쳐 이번에는 손끝으로 죽죽 찢어냈다. 종이 찢어지는 소리 위로 바스락대는 비닐소리가 겹쳐졌다. 조슈아가 막시민의 집 앞에 기대어 서있었다. 막시민과 눈이 마주치자 조슈아가 빙그레 웃으며 편의점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막시민이 익히 알고 있는 조슈아의 얼굴과 웃음이었다.

“맥주 사왔어.”

“들어가 있지 왜 밖에 서있어. 비밀번호도 알면서.”

오늘따라 조슈아의 낯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전화를 끊기 전, 조슈아가 했던 말이 아직도 막시민의 귓가에 생생했다.

‘그게 널 찾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내 마음 같아서는 너도 학교를 쉬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너 보러 갈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갈 테니까 헷갈리지 마. 조심하고.’

통화를 한 지 고작 이십 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오늘 당장 막시민을 찾아올 생각이었다면, 통화할 때 조슈아가 무어라 언질을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막시민은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 막시민이 깨어있든 잠들어있든 신경 쓰지 않고 자취방을 드나들던 조슈아가 이제 와서 집주인이 없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진짜 조슈아가 아니라 다른 존재라서, 막시민의 자취방 비밀번호를 모르는 것은 아닐까.

막시민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조슈아의 손에서 편의점 봉투를 뺏어들었다. 새카만 봉투 안에는 맥주 네 캔과 과자 몇 개가 들어있었다. 모두 막시민이 즐겨 찾는 상표였다. 눈이 마주치자 조슈아가 작게 웃으며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막시민이 수백수천 번을 보아온 표정이었다. 제 말에 막시민이 통 따라주지 않을 때 눈썹 사이를 찡긋거리는 버릇까지도 기가 막히게 똑같았다.

이렇게까지 똑같은데, 이게 조슈아가 아닐 수도 있다고?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막시민이 이렇게까지 헷갈릴 정도니, 다른 사람들이 의심조차 못하고 꼼짝없이 속아 넘어간 게 이상하지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생에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온갖 불행이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삶을, 눈 닿는 곳마다 사람보다 유령이 더 많이 보이는 삶을, 그리고 생김새며 목소리와 말투, 버릇까지 완전히 똑같은 도플갱어가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조슈아.”

“……집에 안 들어가? 오늘따라 이상하네, 막군.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이 있긴 뭐가.”

조슈아가 아닌 조슈아가 걱정하듯 고개를 숙였다. 막시민은 그 순한 낯에 대고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막시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경 써서 걸음을 옮겼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속도로 앞서서, 그러나 뒤에서 갑작스레 덮쳐든다면 보고 피할 수 있도록 완전히 등을 지지는 않은 채로.

조슈아는 막시민에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건 ‘그것’과 마주칠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모른 척 하라는 뜻이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 없었다. 네가 가짜인 걸 알고 있으니 썩 꺼지라고 윽박을 지를 수도 없었고, 집이 코앞인데 갑자기 급한 용건이 생겼다고 자리를 피하는 것도 어색했다. 집이 엉망이라 안 되겠다, 내가 너랑 단둘이 집에서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하진 않은 것 같다, 집안에 누가 있다 따위의 변명이 조슈아에게 통할 리가 없었고 그걸 이 존재가 모르지도 않을 터였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며 모르는 척 돌려보내는 것뿐인데, 당장 생각나는 자연스러운 대처란 이걸 집에 들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을 해치는 모습은 아직 못 봤다니 그걸 믿어야지……. 믿을 구석이 그것밖에 없다는 게 기가 찼다. 오늘이 사람을 해치는 그 첫날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막시민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분명 제 집인데도 어쩐지 호랑이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현관 바닥을 굴러다니는 굵은 소금과 팥이 두 사람을 맞았다. 신발장 위에 천일염이며 팥 봉지가 툭툭 쌓여있고, 입춘대길 글씨며 희한한 그림과 부적들이 벽에 줄줄이 붙어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대학생의 자취이라 여기기 어려웠다. 신발을 구겨 벗으며 막시민은 남몰래 조슈아의 낯빛을 살폈다. 성격은 별로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한 앨베리크가 써준 부적에도 눈 하나 꿈쩍 않는 걸 보면 역시 보통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맥주 좀 냉동실에 넣어주라.”

조슈아를 뒤로 한 채 막시민이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데 쌓인 옷더미를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며 막시민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새 잔뜩 쌓인 알림을 뒤로하고 막시민은 바로 메신저를 켰다. 길게 상황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조슈아라면 눈치껏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리라. 한 손으로 자판을 아무렇게나 눌러 메시지를 전송한 뒤에야 막시민은 재빨리 티셔츠를 갈아입었다. 그동안 텅 빈 냉장고며 찬장을 들여다보던 조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너네 집에 진짜로 먹을 거 없다. 과자 몇 개 사온 걸로는 부족하겠는데. 뭐 배달이라도 시킬까?”

소파 앞에 철퍼덕 주저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폼이 영 자연스러웠다. 막시민은 뒷목을 긁적이며 동그란 뒤통수만 빤히 쳐다보았다. 음식 메뉴 선정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떠오른 탓이었다.

……쟤가 말을 꺼냈으니 자기가 사겠다는 거겠지? 그런데 진짜 조슈아도 아니고 가짠데 자기 명의의 카드가 있나. 아니면 만나서 현금결제…? 그럼 내가 내야하는 거 아냐? 요즘 유령인지 뭐시기는 주머니에 현금도 넣고 다니나? 휴대폰에 배달 앱도 깔아놓고?

막시민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조슈아는 막시민의 불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치킨을 시킬지 햄버거를 시킬지 고민하고 있었다. 약이 오를 정도로 태평한 낯이었다. 이윽고 조슈아가 제 휴대폰을 막시민에게 불쑥 들이밀었다. 막시민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다가 조슈아의 휴대폰 화면을 보고서 얼굴을 굳혔다. 조슈아의 평이한 목소리가 귓가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근데 이거 왜 보낸 거야? 좀 전에 보낸 거 같은데.”

기본 테마의 메신저 창 위로 말풍선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익숙한 대화 아래, 오타가 가득한 문자열이 찍혀있었다. 막시민이 방금 전 조슈아에게 보낸 바로 그 메시지였다. 막시민은 다급히 제 휴대폰을 꺼내 앱을 확인했다. 결코 막시민이 채팅방을 헷갈린 게 아니었다. 그리고 눈앞의 조슈아가 들고 있는 휴대폰도 마찬가지였다. ‘막군’이라 적힌 채팅방 안의 메시지며 주고받은 시간까지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어…… 그러게. 주머니 속에서 잘못 눌리기라도 했나봐.”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한 듯 대꾸했다.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집중력과 연기력이 필요했다. 정작 조슈아는 큰 관심이 없었던 듯 도로 배달 앱 화면에 집중했다. 막시민은 숨죽여 심호흡하며 앨베리크의 부적을 노려보았다. 20분 사이에 조슈아가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해킹이라도 당한 걸까. 만약 막시민이 의미 없는 오타투성이 메시지가 아니라, 사정을 길고 자세하게 적어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막시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냥 치킨 시킨다?”

“오냐.”

“오십 분 걸린대.”

“카드 결제했어?”

“응.”

짧은 대화를 끝으로 방안이 정적에 잠겨들었다. 막시민은 제 심장소리가 꼭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쿵쿵 뛰는 심장소리를 뒤로 한 채 막시민이 마지막 수를 던졌다.

“그런데 너, 아까 전화했으면서 여긴 왜 또 왔냐? 전화할 때는 오겠단 소리 없었잖아.”

“아, 그거. 그냥…….”

조슈아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대답하기 조금 민망하단 얼굴이었지만, 의외로 대답은 순순히 나왔다.

“그런 일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혼자 있기 좀 불안하더라고. 너도 마침 집 가는 길인 것 같고, 금방 오겠다 싶어서 굳이 안에 안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전화로 못한 이야기도 마저 해주려 했고.”

차라리 물어보질 말 걸 그랬다고, 조슈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막시민은 생각했다. 비밀번호를 몰라서 못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불안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왔다고,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눈앞의 조슈아를 의심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진짜와 가짜의 선이 서서히 흐려진다.

애초에 조슈아의 부모님도 구분하지 못한 것을, 그깟 말 몇 마디 들었다고 구분할 수 있다 자신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막시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막시민은 피곤한 척 바닥에 철퍼덕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잠든 척 하고 있었지만, 온몸의 감각은 조슈아에게 잔뜩 집중한 채였다. 조슈아는 휴대폰이라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지 미동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막시민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일단 어느 정도 먹고 나면 돌려보내고 조슈아한테 전화를, 아니 메시지를 받은 걸 보면 전화도 안전하지 못할 게 뻔했다. 차라리 히스파니에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오늘 조슈아가 어디 있었는지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히스파니에는 조슈아와 그것을 유일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 했으니까.

하지만 히스파니에가 오늘 조슈아의 행적을 모른다면? 아니면 히스파니에조차도 둘을 항상 완벽하게 구분하지는 못한다면?

온갖 추측과 불안들이 머릿속에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애써 심호흡을 할 때마다 심장소리만 점점 더 커져갔다. 긴장으로 예민해진 신경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을 즈음, 출구 없는 불안을 날카로운 벨소리가 끊어냈다. 누군가 초인종을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막시민은 내심 반가운 마음을 숨기며 바닥에 붙어있던 몸을 일으켰다. 조슈아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벌써 왔나봐. 빠르네.”

“그래. 빨리 왔으니까 빨리 먹고 가라.”

막시민은 현관에 대충 벗어놓은 신발을 밟고서 문을 열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끝도 없이 나던 벨소리가 그새 뚝 끊겨있었다. 치킨 봉투는 알아서 문 앞에 놔두고 갔겠지. 막시민은 심드렁히 고개를 내렸고, 치킨 봉투 대신 웬 사람이 서있는 걸 발견했다. 막시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뜻밖의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한달음에 달려온 듯, 창백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는 사람은 조슈아였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는 조슈아. 집안에 있는 조슈아와 옷차림과 신발은 물론이고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까지도 똑같은 조슈아.

“막군, 무슨 일이야? 배달 잘못 왔어?”

좀처럼 현관문을 닫지 않는 게 의아했는지 조슈아가 막시민을 불렀다. 낡은 쿠션을 끌어안은 채 소파에 기대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을 바로 그 조슈아였다. 문 밖에 선 조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문을 연 채로 굳어버린 막시민을 반쯤 밀어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신발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훌렁 내던져진 신발이 완벽히 똑같은 신발 위에 겹쳐졌다. 밑창 아래서 짓이겨진 굵은 소금들이 모래처럼 거친 소리를 냈다.

조슈아가 막시민을 스쳐 지나가자 막시민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몸을 돌렸다. 애초에 크지도 않은 자취방이었다. 그들이 마주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있던 조슈아의 얼굴은 성큼성큼 들어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일그러졌다. 마주본 두 사람의 얼굴이 꼭 거울상 같았다.

그때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괴음이 울렸다. 온몸이 흔들리고 집이 들썩거릴 정도로 강한 진동도 함께였다. 막시민은 반사적으로 두 귀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어떤 생각도 불가능하게 하는, 소름끼치는 고주파음이 신경을 박박 긁어댔다. 이삿날 앨베리크가 거실에 붙여놓으라 신신당부했던 노란 부적이 힘없이 나풀대며 떨어졌다. 집으로 들어오는 큰 액을 막아준다고, 너처럼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애는 이거라도 있어야지 집에서라도 발 뻗고 잘 수 있을 거라 했었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빈 페트병이며, 행거 위에 걸쳐두었던 옷더미들도 쓰러져있었다. 등을 둥글게 움츠린 막시민의 눈앞으로 커다란 페트병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사방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막시민이 조심스레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뗐다. 방금 전 소란이 무색하게도 주위는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평일 저녁의 대학가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도.

그리고 막시민의 눈앞에 누군가 서있었다. 막시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조슈아였다. 단 한 명의 조슈아였다.

“막시민, 괜찮아? 어디 아파?”

막시민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은 조슈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막시민이 잘 아는 그 얼굴로, 막시민이 잘 아는 그 목소리로. 막시민은 대답 없이 제 자취방을 눈으로 한 바퀴 훑었다. 떨어진 부적, 바닥을 구르는 페트병, 넘어진 액자,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 안고 있었던 듯 구겨진 채 내팽개쳐진 쿠션과 그 옆의 휴대폰, 편의점 비닐봉지. 그리고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

“왜 말이 없어. 진짜로 어디 아파?”

막시민은 조슈아의 손을 떼어내고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방 안에는 단 두 사람만이 있었다. 막시민과 조슈아, 조슈아인지 조슈아가 아닌지 알 수 없는 단 한 명의 조슈아였다.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얼굴이 갑작스레 등골이 스산하리만치 오싹했다.

막시민은 분명 두 명의 조슈아를 보았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누군가는 사라지고, 지금 눈앞에는 단 한 명의 조슈아만 남아있었다. 누가 진짜인지 찾아낼 수 있을까? 눈앞의 조슈아가 가짜라면 진짜 조슈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만약 막시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게 될까? 진짜 조슈아도, 가짜 조슈아도 모두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금 눈앞에 두 조슈아가 나타난다면?

섬뜩한 예감이 가슴께를 휘감았다. 막시민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의 남은 생애를 지배할 단 하나의 질문을, 평생토록 짊어져야 할 끔찍할 불안의 정체를. 시린 직감이 절대적인 예언처럼 내려앉았다.

막시민은 이제 계속 불신하며 살게 될 것이다. 눈앞의 조슈아가 과연 그가 알던 조슈아가 맞는지, 그와 오래도록 알고 지냈던 조슈아는 사실 그날의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막시민의 가장 거대한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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