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ylight
율무차
*데모닉 개정판 8권에서 헤어진 이후~9권 사이
*데모닉 9권 문장 하나 인용
bgm:: https://youtu.be/anaudDI56jU
슬쩍 웃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관객들 홀릴 때나 쓰라고 대처하긴 했지만 깜짝 선물처럼 찾아오는 그때 그 표정. 리체의 볼이 잠시 발그레해졌다. 함께했던 순간이 생각나는 건지 아니면 한 사람이 생각나는 건지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나는 거겠지, 리체는 가볍게 생각하고 눈을 감고 조금씩 뒤척이다가 잠에 들었다.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고 몇 십 번을 뒤척였다가 잤는지 모른다.
눈을 뜨자 어느덧 출근할 시간이 되어 리체는 얼른 나갈 준비를 했다. 시간이 조금 여유로워 천천히 걸어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본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불쑥 생각났다가 다시 사라지고 다시 불쑥 생각난다. 노크하지 않고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날벼락처럼 대량 주문이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긴 여정으로 인해 생각날 법도 한다만 쉴 때도 없이. 그만 생각하자 하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생각들을 조각조각 이어붙이는 역할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생각들은 다시 커져버려 하나의 커다란 공이 되어버릴 뿐이다. 이물질 없이 그때 그 느꼈던 순수한 감정들은 다시 상기시키고, 예전 경험들을 떠올리게 하고…꾸준히 찾아와서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반복되었다.
의상실에 도착해 제일 먼저 어젯밤 수선을 마치지 못한 옷 작업을 시작했다. 바늘구멍 안에 실을 넣고 조심스레 작업을 시작했다. 한 올, 두 올, 옷감이 포개어져 갈수록, 그렇게 한 올 두 올 세 올씩, 바늘이 움직일수록 생각도 겹겹이 쌓여져 갔다. 설마 내가 얘를 좋아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절대! 쟨 데모닉에 소공작이고 난 한낮 여기 하이아칸의 재봉사에 불과한데 어떻게 만날 수가 있는 거야, 만난 게 기적이지, 다시 파도처럼 밀려드는 생각들을 머금으면서 리체는 계속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옆에 이런 거 들어줄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괜찮을 텐데, 현재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는 게 막시민과 조슈아를 보고 싶게 했다. 막시민이나 이네스라도…이네스. 괜히 이름 모를 감정이 나와 리체의 마음을 뒤죽박죽 섞어놓았다. 머릿속을 수놓던 수많은 생각들이 다 사라졌다. 그래, 이네스나 막시민이라도 지금 옆에 있다면 털어놓았을 텐데,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이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한 점이었다. 히스파니에가 미렝게트 의상실에 있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리체가 의상실 안에 있던 뜻밖의 인물을 만나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때마침 히스파니에가 고개를 돌렸고 리체를 보자 리체는 당황스러워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분명….”
리체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조슈아와 막시민과 함께 노을섬으로 가는데 너를 빼놓을 순 없겠지,”
“네? 근데 저….”
“미렝게트 선생 때문에 그런 건가? 일단 내가 다 말해놨으니 걱정은 말고 따라오거라,”
오랜만에 다시 보는 미의 극치호였다. 배 하나에 사람 셋이서 다녔던 그때 일들을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왜인지 짭조름한 바닷가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이 배를 다시 탈 줄은 자기 전에도, 꿈에서도 생각도 못 했는데, 다시 타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설명은 들었으나 이게 한낱 꿈만 같았다. 배에 올라타자 이제 다시 노을섬으로 떠난다는 것이 확 와 닿았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리체를 들뜨게 했다.
그렇게 수백 거리의 땅을 지나고 물을 지나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막시민이었다. 변하지 않고 예전 그 모습과 똑같아 싱긋 웃음이 났다. 그리고 리체가 직접 조슈아를 만나러 내려갈 때,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분명 안 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불쑥 떠올라 계속 그립게 했던 그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밤에 이 사람 생각을 하다가 잠을 못 이루게 한 한 사람. 의도하진 않았는데 서로가 서로를 계단에서 내려다보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이 바로 지금 아주 가까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정말 꿈만 같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속으로 고심한 끝에 리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오게 된 건 너희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우리 의상실에 옷을 주문하셨는데, 재단만 겨우 했는데 갑자기 떠나셔야 한다고 해서, 주문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