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에 관한 일인극
일
* 데모닉 완결 시점의 10년 이상 이후를 배경으로 한 IF물입니다.
* 조슈아 아르님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 점 양지하여 읽어주세요.
그가 살아온 것이 그의 눈앞에 있다. 그의 눈에 분명하게 보인다.
그는 이 모험이 지닌 가슴 찢기는 고통과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속성을 느낀다. 그는 이제 죽는 법을 알며 죽을 수 있다. 늙은 배우들을 위한 양로원들이 있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0. Overture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노마라드 남부에서 동쪽으로, 목격자들은 차례차례 나타났고 일관되게 증언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가 온다고. 온몸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호의를 이끌어내어 순탄한 여행을 한다고. 오롯이 그의 두 발로, 지치는 기색도 없이 걸어서 온다고. 그러한 소문은 세부사항이 다듬어져 공화정부의 귓가에 전달되었는데, 수뇌부는 허튼 소문을 잠재우려 애쓰기보다는 시들해져 자연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새 정부에 대한 불안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의 결과였다. 개중에는 이를 왕정에 향수를 느끼는 우매한 민중의 헛된 바람이라고 주장하는 의원도 있어 한동안 의회 내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오만한 수식어라.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결코 소문을 좌시하거나 맹신하는 인간은 아니었으나 의회가 넌지시 드러낸 우월감에 한 걸음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의회가 들어서며 많은 귀족들이 처형되거나 수감되었지만 부를 거머쥐고 거들먹거리는 구귀족은 여전히 존재했다. 어느 시대에나 살 방법을 찾으려 하는 비굴한 족속들은 있기 마련이었고, 어느 시대에나 그들의 비굴을 쥐고 이득을 보려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면서 혁명에 성공하자마자 드러내는 명백한 선긋기라니. 이 갓 태어난 정부는 상처 아래 새로 돋아나는 살과 같았고 여린 살이 굳기 전에는 잠자코 기다려야 했다. 혹시라도 분란이 생길까, 균열이 커질까, 표면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으나 그의 결벽한 성정을 아는 자들은 란지에가 품은 어렴풋한 불만 정도는 충분히 눈치챘을 터였다. 국정이 안정되어 의회 내부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랐다.
란지에는 답답한 숨을 내뱉었다. 그가 비밀 결사에서 활동할 때 세운 공로는 혁혁했으나 신분을 드러낼 수 있게 되자 그의 젊은 나이를 알게 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뒷전으로 했다. 왕국8군에 신분이 노출되어 한동안 활동을 멈추었던 공백기 탓인지, 의회 내 다수당과 궤를 같이하지 않은 그의 은사 때문인지, 공부를 할 무렵에 하필이면 아르님과 친분을 쌓았던 탓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란지에는 세 가지 사실 모두 어느 정도 기여를 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항거할 생각은 없었다. 이엔과 하일저가 대신 분개했으나 그는 하루빨리 공화국이 자리를 잡고 안정되기만을, 그래서 그의 동생과 함께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공화국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건 구귀족뿐만 아니라 혁명 과정에 휩쓸려 뜻하지 않게 재산과 인명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분노이기도 했다. 공화 정부를 한순간의 정권 침탈로 간주하여 공화 인사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란지에 또한 혹시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란즈미와의 재회를 미뤄왔고, 간간이 편지를 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마저도 주시하는 눈이 있을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전달하고는 했지만 적어도 이전 시대보다는 나아졌다고, 그렇게 타일러야 했다.
란지에는 친우의 평온한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마란스는 결국 이엔의 손을 들어 혁명 과정에서 자금줄 역할을 톡톡히 하며 공화 정부에 빚을 만들어 두었다. 반면 반항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이엔이 저 몰래 위험천만한 비밀조직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마란스 부인은 여름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이따금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답장은 없었다. 이엔은 이엔대로 켈티카 내의 역할이 있을 뿐더러 어머니에 대해서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는 마음으로 만남을 조금씩 유보했다. 아버지가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 지금 이엔은 홀로 수도에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표정은 나날이 밝아지는 듯했다. 헐렁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책장을 넘기는 모습에서는 태평함까지 엿보였다. 어린 시절의 치기와 분노는 누그러져 그 자리를 인류애가 대신한다. 때문에 그가 공화국 건설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음에도 가족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알 사람이 없었다.
란지에는 이따금 부지불식간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치스러운 귀족과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조성한 휑한 집무실이나 비용을 아끼기 위해 최대한 옅게 탄 차 때문이 아니었다. 당장 손에 잡히는 변화 없이 민중들이 얼마나 큰 인내심을 발휘할지, 훗날 위협이 될 구세력을 제거하는 의회가 어디까지 허용될지 따위의 걱정들, 공화정부 내 급진파와 온건파의 알력,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 걱정거리는 이미 차고 넘쳤다.
“란지에, 그 소문 말이야. 우리가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티가 났어?”
“네가 워낙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이엔은 심각한 얼굴로 책을 덮더니 바로 앉았다.
“그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말해봐.”
“왕정을 상징하는 인물은 그 하나만이 아니야. 오히려 그는 오래전 공연 중 일어난 사고로 죽었으니 공화국을 뒤흔들기 위한 상징으로 부적합하지. 유명세를 생각하더라도, 공작 가문의 후계자는 그 하나뿐이 아니었으니까. 또한 소문이 확인된 지점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야. 수도라면 모를까. 오히려 아노마라드 바깥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은 반대파가 원하는 그림과는 멀지 않나?”
“하지만 아르님은 오래도록 민중들에게 호감을 샀던 가문이지. 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라. 신비감을 조성하기에는 제격인 듯하지 않아? 하지만 네 말대로 이동경로는 설명되지 않아.”
이엔은 지도책을 펼쳐 손끝으로 몇 군데를 가리켰다. 아노마라드 남부에서 시작된 보고는 산맥을 따라 이어지고 국경지대에 접근하는 중이었다. 육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면 설명이 되었다. 과장된 부분이 없잖아 있을 테니 두 발로 걸어갔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말을 빌렸다고 생각하면 얼추 계산이 맞는 속도였다. 그토록 오래 이동해 어디로 향할 셈인가.
“함께 갈 거지?”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이엔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란지에는 희미하게 웃었다. 학생 때가 떠오르는 어조였다. 타성에 빠지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그의 친구는.
1. 클라리체 데 아브릴
클라리체 데 아브릴은 자기 생에 만족하고 있는가? 그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예년이었다면 밤중에도 사람들이 오가며 북적거려야 할 하이아칸의 대로는 적막했다. 반들반들한 포석은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패이거나 떨어진 시간의 흔적을 메우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리체는 툭, 발끝에 걸린 돌멩이를 차며 걸었다. 블루 코랄 섬의 주 수입원이었던 귀족들이 휴양지의 고급 별장을 내버려둔 채 수도에 숨으면서 자연히 손님이 줄고 거리가 한산해지기는 했어도 길거리의 치안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 오로지 이 시절이라는 것이 빠르게 흘러가 아무쪼록 일상을 회복하리라는 염원 내지는 기대가 버티고 있는 탓이었다. 대륙의 정세는 바람대로 맑지 않았지만.
아노마라드의 귀족들이 가장 먼저 하이아칸을 뜬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륙의 다른 국가들도 아노마라드의 새 공화 정부를 주시하며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오를란느는 온전한 독립을 위하여 국외로 나가 있던 자국민들을 불러 모았다. 공기 중에 긴장감이라고 엿볼 수 없는 대륙 끄트머리의 휴양지까지 그 여파가 닿을 정도라면 온 대륙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바람은 불고 계절은 흐른다. 리체는 막힌 숨을 내뱉었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도 5월의 하이아칸을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덕분에 리체 또한 식당의 급사 일을 추가로 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상황은 조금 희망적이었다. 주급을 받으면 가족에게 송금하고, 일부는 저축하고, 운이 좋다면 그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리라. 리체는 손가락으로 셈을 해보다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의상실 막내로 시작하여 온갖 고생은 다 하고 기껏 일급 재봉사가 되어 이제 좀 피어보려나 생각했던 때에 하필 주 고객들이 단체로 섬을 떠난 것이다. 덕분에 책임감은 책임감대로 막중한데도 봉급은 그대로에 부업까지 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어느덧 머리가 굵어진 동생이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이곳저곳 알아보고 있다고는 했지만, 마음은 썩 편안치 않았다. 모종의 책임감이 느껴질 때마다 어느 때에 리체의 가족을 사기꾼 취급하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콕콕 찔러대는 건 덤이었다.
리체는 분명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득 어떤 순간마다 자신에게 성큼 다가오는 막연한 공허함을 느끼고는 했다. 재료를 수급하고, 창고를 정리하고, 옷본을 만들고, 재봉사들과 손을 맞추고, 바느질하고, 다림질하고…… 이제는 익숙해진 일상에 상념이 끼어들 일이 어디 있다고. 리체는 직원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그에게만 작업을 맡기는 손님들도 없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타지로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고 불안한 와중에도 공고하게 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껴도 모자라지 않나. 리체는 저마다 불안감을 억누르고 서로에게 상냥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었다. 그들의 다정함은 당장 피가 낭자하지 않은 변방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태평한 현실 도피도 아니었다. 한 번 시작된 비관이 벽과 벽을 건너서,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입는 옷가지에 착실하게 스며드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문제가 그것뿐일까?
생각에 잠겨 걷던 리체는 하숙하는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안쪽에서 단단하게 내린 커튼 틈새로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두 명의 하숙생은 언제나 리체보다 일찍 집을 나서서 리체보다 일찍 잠들어 얼굴 보는 일이 전무하다시피 했고, 집주인인 델마 부인 또한 다정하게 리체의 귀가를 기다려줄 만한 성미는 아니었다. 유심히 창 안을 살피는데 문득 불빛이 흔들렸다. 리체는 도둑이니 범죄니 하는 것들을 급히 떠올렸고 잠시 공포심에 몸이 굳기도 하였으나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는 공연히 부산을 떨다가 침입자에게 들키면 더 큰 소란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델마 부인과 하숙생들을 지키면서 침입자를 내쫓는… 아니, 우선은 기습하여 제압한 후 사람들을 불러 함께 대처하는 편이 나을지도. 생각을 정리하며 길가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 굵지도, 단단하지도 않지만 손 안에 단단히 쥐고 있는 것으로 나름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리죽여 문 가까이 다가가서, 금방이라도 뛰어들 기세로 현관문을 열어젖힌 리체는 예상치 못한 얼굴에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리체?”
침입자는 단지 문이 벌컥 열렸다는 점에서 놀랐을 뿐, 이내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면서 미소를 지어보았다. 기억 속 모습과 빼닮은, 화사하지만 꾸밈없는 웃음이었다. 그는 한 손에 양초를 들고 알사과 하나를 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천연덕스러워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흔들리는 촛불 때문에 얼핏 부드러운 금빛으로 보이는 은색 머리칼과 다정함으로 감싸인 검은 눈, 사과를 내려놓은 손가락이 이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 얹혔다. 다시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왜 이 애먼, 낯선 하숙집에 나타났는가, 하는 합당한 의문은 뒷전으로 한 채 엉뚱한 생각이 먼저 머릿속에 차올랐다. 제길. 한때 몇 달 동안 서로 붙어 다니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무방비하게 다시 마주한 얼굴은 변함없이……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조슈아는 리체가 기억하기보다 훨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친우와 함께 마법 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함께 노을섬에 방문했을 무렵처럼. 얼굴에는 살이 없었고 눈가에도 피곤한 기색이 어려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앳되어 보였다.
“리체. 보기만 할 거야? 그나저나, 그렇게 문을 열어두면 델마 부인이 그리 좋아하시지 않을걸.”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문을 닫기 위해 침착하게 돌아선 리체는 잠깐의 순간 동안 다시 문 밖으로 뛰쳐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면? 아니, 상상이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유령이라면? 물론 유령을 보는 것은 생에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으나, 아무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는 유령 따위 정말 질색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리체는 여차하면 다시 도망칠 기세로 문고리를 꽉 잡고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네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음. 부활했어, 믿어줄래?”
리체는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며 양미간을 좁히고 조슈아를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으며 다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기까지 했다. 무엇도 설명해주지 않는 태도에 문득 화가 치민 리체는 잠들어 있는 델마 부인이나 하숙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장난치지 마! 나는 네가 정말 죽었다고 믿었어. 켈티카 내 사적 집합이 금지되어 있어서 직계 가족들과 단출하게 장례식을 치렀다고, 그래서 인사조차 못한 걸 알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알아? …… 이렇게 나타날 수 있었으면서. 연락 정도는 할 수 있었던 거 아냐? 네가 전면에 나서는 게 어려울 수 있다는 거 이해해. 당장 네 가족들도 구금되어 있고. 막시민은 알고 있는 거야? 제기랄, 하나도 정리가 안 되네. 아무튼, 아무튼 너는…….”
“그만, 그만해. 리체. 잘못했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소년의 얼굴에 낭패감이 묻어나왔다. 리체는 한 차례 흥분이 가시고 나자,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로 그가 기억하는 조슈아 아르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먼 곳에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말만 전해 듣고 함께 슬퍼할 사람도 없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을 영위해나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에게 전 소공작의 죽음을 알리고 슬퍼할 수 있었겠는가. 미렝게트의 재봉사들? 코럴리의 급사들? 조슈아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리체에게 다가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숨을 몰아쉬더니 제 소매로 눈물을 닦아낸 리체가 마침내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자리를 권했다.
“앉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그는 겸연쩍은 표정이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니, 어쩐지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감정이 가라앉아 민망함이 몰려들기 시작해 괜히 부산을 떠는 리체에게 그런 표정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 현실감이 들지 않는 상황에 우습게도 떠오르는 것은 이가 나가지 않은 찻잔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참 찬장을 뒤적거리다 찻잔을 두 점 찾아냈다. 유약 갈라진 흔적이 잔 가장자리를 따라 불규칙적으로 퍼져 있지만 그래도 온전한 것이었다. 조슈아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잔을 받아들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페리윙클? 네냐플?”
“네냐플 인근. 아무래도 학교 출신들을 보호해주는 경향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지. 페리윙클까지는 갈 만한 여력이 없었어.”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조슈아는 차 한 모금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없어. 너 말고는. 아니, 지금쯤이면 학교의 마스터들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도 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야.”
“왜 나였어?”
“막시민을 찾아갔으면 아마 나를 두들겨 팼을걸.”
“나는 못할 것 같아?”
이제 리체는 조슈아의 기색을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진정했다. 그 말은 차츰 이상한 점을 조목조목 따져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는 계절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는 건 좋은 선택이지만, 지금 그의 행색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면 끌었지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복장이 아니었다. 그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만한 뜨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리체도 잘 알았다. 창백한 얼굴은 어두운 촛불의 빛 아래에서도 그 아래를 가로지르는 푸르스름한 실핏줄이 그대로 드러났다. 게다가 그가 유령이 아님을 믿는 이상 그의 앳된 얼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리체의 표정에 점차로 의심이 떠오를 무렵, 조슈아는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순 그의 여유롭던 얼굴이 가면이었던 것마냥 지워지고 그 아래 짙은 피로와 건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리체는 앉았던 의자가 넘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찻잔이 테이블 밖으로 미끄러져 아직 더운 찻물이 바닥을 적셨다. 조슈아는 균열을 따라 산산조각 난 찻잔 조각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입고 있던 로브의 소매를 걷었다. 리체는 그 아래에서 보게 될 게 무엇인지 직감했다.
“……너, 조슈아가 아니구나.”
소년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긍정이었다. 이내 천천히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내자 속살이 드러났다. 창백한 팔뚝을 가로지르는 균열, 피부조직이 떨어져나가 어렴풋이 보이는 붉은 살점. 아물지 않는 상처였다.
“미안해요, 아브릴 양. 당신을 속였어요.”
그의 표정에서 진심으로 묻어나오는 미안함을 발견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반가움과, 속았다는 분노와, 그리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인형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모종의 공포가 본인도 인식할 수 없는 사이에 뒤섞였다. 리체는 가만히 서서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를 썼다. 카르디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막시민을 찾지 않은 건… 그가 날 모르지만 내가 그를 안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아니요, 그도 당신을 알아요.”
“물론 알기야 알지요. 하지만 그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리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막시민은 꼭 인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인형이 그를 친구로 기억하는 것과 동시에. 카르디에게 리체는 그가 인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낯선 사람이었다. 상처를 줄 일도, 입을 일도 없는. 그러나 리체의 마음은? 리체의 상심은? 카르디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조슈아 행세를 했다. 리체가 어떻게 여길지 분명히 알고도.
“나가주실래요? 별로 얼굴 보고 얘기할 기분이 아니네요.”
“기다릴 수 있어요. 진정할 때까지.”
“아니, 나가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브릴 양.”
“난 당신 못 도와줘요.”
“함께 칼라이소에 가요. 의상 제작자가 필요해요.”
그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리체는 어이가 없어 천장만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칼라이소는 무슨 말이람?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카르디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조슈아가 모든 무대 의상을 직접 디자인했듯, 나 역시 모든 의상을 디자인했어요. 미랭게트 의상실에서 신임 받는 의상 디자이너가 필요해요. 당신이 놓은 자수, 옷감을 손질한 방식, 세밀한 바늘땀, 잇고, 봉합하고, 아물게 하는 능력. 조슈아의 친구가 아니더라도 난 당신을 찾았을 거예요.”
리체는 그의 말에 움찔했다. 언젠가 들었던 말과 닮아 있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 그것이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지. 그 말은 카르디도, 조슈아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인데……. 문득 그의 팔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는 인형이지만, 천을 꿰매고 솜을 집어넣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인형이었다. 숨 쉬고, 노래하며, 타인을 필요로 하는 존재.
“그럼 옷만 만들면 되지, 칼라이소는 왜 가요? 난 엄연히 이곳에 직장이 있는데.”
“겨우 공연 한 번 하고 말 게 아니거든요. 이건 동업 제안이에요. 당신은 이곳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단순히 도안을 가지고 옷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직접 구상하기도 할 거예요. 공연이 망할 걱정은 필요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겠죠.”
“다른 배우는? 연주자는? 설마 모르비아네즈에 당신 정체를 알릴 생각은 아니겠죠. 그들을 속이는 건 꿈도 꾸지 마요.”
“칼라이소에 도착하면 알려줄게요.”
“내가 당장 떠나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고요?”
“걱정 말아요. 수중에 가진 금이 꽤 되니. 조슈아가 마련해두었지요. 내가 깨어날 이후를 대비해서.”
카르디는 얼핏 웃어 보였다. 그의 말에 솔깃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자신이 이제는 홀연히 사라질 입장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이런 제안을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다시 한 번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부푸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록빛 눈이 흔들렸다. 카르디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얼마든지 기다려줄게요.
2. 이엔 아마란스
칼라이소는 북적였다. 그러나 대륙 정세와 무관하다는 듯한 활기에 란지에와 이엔은 속지 않았다. 두르넨사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었고 이방인을 환대했으나 결코 손해 볼 일을 감수하지는 않았다. 의회에서는 연방 국가 중 가장 부유한, 또한 봉건 제도에 민감하지 않은 두르넨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파벌 정치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명목적으로 공화국의 이름을 붙인 트라바체스와 손을 잡아봤자 정치적 이득이 없다는 것과는 상반된 평가였다. 정작 두르넨사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는 영 오리무중이었지만. 여전히 아노마라드인들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공화국의 미래를 가늠해보고 있는 듯했는데, 만약 공화국이 얼마 가지 못하리라고 판단한다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직간접적으로 생계가 연결된 아노마라드 인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봐야 했다. 표면적으로 란지에와 이엔이 켈티카를 비운 이유는 휴가였으나 실상은 두르넨사의 형국을 살피는 비밀 답사였고, 이는 의회 내에서도 일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란지에와 이엔으로서는 문제의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란지에로서는 입맛이 썼다. 그 소문이라는 것이 아노마라드 내에서만 퍼졌다면 조금 더 조용하게 일을 끝마칠 수 있었을 텐데, 나이트워커가 모은 정보에 따르면 그 소문은 불분명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대륙을 횡단하여 하이아칸 끄트머리의 작은 섬에 들렀다가 다시 배를 타고 칼라이소에 도착했다니. 그러고 나서 소문이 잠잠한 것을 보면 목적을 가지고 이동했으며 이동 방식을 달리한 게 틀림없었다. 란지에는 죽은 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비현실적인 일 따위 일어나지 않음을 알았으므로 내심 그를 사칭하는 인물이 나타났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왜 칼라이소일까? 하이아칸과 칼라이소는 한때 조슈아 아르님이 공연을 올렸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런 혼란스러운 판국에 지켜야 할 것도 잃은 것도 많은 그가 한가하게 극장을 찾을 이유는 무엇인가. 배우로서 조슈아 아르님은 열렬한 팬이 많은 편이었다. 네냐플에 머무를 때도 직접 목격했으며, 그들이 사고 후 조슈아를 추모하기 위해 모임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조슈아인 척 분하여 이른바 순례를 하지 못할 까닭은 또 무엇인가? 막스 카르디와 히스파니에 조가 사실은 조슈아 아르님이었다는 사실이야 공연광 사이에서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칼라이소에 도착한 란지에와 이엔을 반긴 것은 무수한 공연 포스터였다. 대부분은 펜으로 조악하게 그림을 그려 넣고 저속한 문구를 써넣은 형태로 그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어린 소년들도 종이를 받아간 사람들이 한 번 읽어보고 그것을 구겨 버리든 간직하든 그리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어딘가에 소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종이를 살펴보던 두 사람은 극장 거리를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극장이 밀집한 거리는 조용했다. 웬만한 극장들은 밤이나 되어야 공연을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엔과 란지에는 극장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극장 외부는 낡은 듯 허름해 보였으나 군데군데 유지 보수한 흔적이 보였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간, 오래된 거리였다. 하나로 길게 뻗은 길을 걷던 두 사람은 문득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한 무용수가 극장 앞 계단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말을 걸어오는 어조가 퍽 불량스러웠다.
“극장 거리는 처음이신가? 그렇게 촌뜨기 티를 내고 다니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극장 가장 비싼 좌석에 앉게 될 텐데.”
“에이, 이런 극장이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그래요.”
“진짜야.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기회를 잘 잡아채는데. 엉덩이 붙이는 데 동전 다섯, 등받이 추가하면 열 개 더, 발받침 또 다섯 놈, 팔걸이가, 어디보자, 네 놈이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이엔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 팔걸이는 물론 양쪽 가격이겠죠?”
“허어, 이것 봐라. 극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무용수는 과장되게 웃더니 목에 맺힌 땀을 슥 문질러 닦았다.
“여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또 그놈의 ‘제2의 히스파니에 조’인가?”
“히스파니에 조?”
“정말 하나도 모르는구먼?”
넌더리가 난다는 듯 무용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히스파니에 조가 단 두 번의 공연으로 금을 긁어모은 이후로 예술가를 꿈꾸는 대륙의 젊은이들이 명예와 부를 꿈꾸고 극장을 대여하는 일이 꽤 있었다고 했다. 백이면 백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설파하다가 결국 극단 내 불화를 일으키고 귀향하는 일이 잊을 때면 한 번씩 일어났고, 고향에서 착실히 모아온 돈을 죄 날리는 것은 덤이었다. 결국 스스로 재능 따위 가지지 못한 범재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제법 성공한 경험 축에 든다고 무용수는 조소했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있다마다. 당장 얼마 전에 저 끝 극장을 빌렸지 뭐냐.”
두 사람은 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이엔이 떠보듯 물었다.
“이번에는 성공할 것 같던가요?”
“글쎄. 노래는 썩 잘하는 것 같다만, 이제는 공연이 좋아도 관객이 오지 않을 걸 염려해야 해서 말이지. 웬만한 부자 관객들은 저쪽 대극장에서 싹 다 긁어갔거든.”
이어서 극장주의 횡포에 대해서 한참 투덜거리던 무용수는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말은 그렇게 해도 꾸준히 찾는 단골손님들은 없지 않았고, 무용수는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공연 보러 와, 하고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거리의 끝 극장은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곳이 극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어려울 정도로 협소했다. 이백 석을 넘지 못하는 규모에, 작은 문 위에 ‘머메이드 펄’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이엔은 작게 열린 틈 사이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무대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은 호리호리했고,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밝았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의 외모를 되새겨보던 이엔은 배우가 큼큼, 하고 목을 풀더니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노래는 느린 박자의 동요였는데, 낯선 음률은 아노라마드의 노래가 아닌 듯했다. 노을과, 곶과, 잠에 대한 노래였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시기의 아이들을 위한 노래인지라 음역대가 꽤 높았는데도 배우는 조금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문득 배우가 이편을 돌아본 것 같아 이엔은 천천히 몸을 돌려 문에서 벗어났다. 분명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문 바깥은 겨우 몇 초가 지난 듯 여전히 고요했다. 햇빛 때문에 이엔이 눈을 찡그리자 어떻게 받아들인 모양인지 란지에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무엇을 봤느냐는 물음이었다.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노래 한 소절로는 알 수가 없으니.”
극장 거리를 따라 걷는 동안 그들을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으나 머메이드 펄 극장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엔의 귓가에 자꾸만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노을 지는 하얀 곶
파도 소리를 들었니
작은 배를 타고
그가 오고 있어……
***
식당을 겸한 카페의 2층 테라스에 앉아 있노라면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까지 선명하게 보이고는 했다. 기울어진 지대에 지어진 건물이기에 도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는 한 시선이 마주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기에 적합했다. 거기다 길게 뻗은 차양 그림자 덕에 관찰자의 얼굴은 가려지고, 네 갈래 갈림길의 로터리에 위치해 있어 유동인구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바로 맞은편으로는 극장 거리로 향하는 길이 이어졌다. 그들이 기다리는 인물을 포착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네냐플에서, 그의 공연을 본 적 있어?”
“한 번. 큰 공연은 아니었지만.”
작게 하품한 이엔이 거의 다 타들어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담배 잎에 각종 허브를 섞어 종이로 만 담배는 칼라이소의 선원들 사이에서 인기를 몰았고 그것이 점차로 전파되어 근방의 일꾼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둘은 아노마라드 변방의 상회에 고용된 사환 행세를 했다. 두 심부름꾼의 고용주는 트라바체스를 경유하여 칼라이소로 향하던 중 사소하고 귀찮은 문제가 생겨 늦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두 사람은 하릴없이 그들의 고용주를 기다리는 중이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오가는 항구 도시에서는 낯선 이의 숙박에 큰 경계를 품지 않았고, 그것은 두 사람이 머무르는 숙소의 주인장이나 카페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란지에와 이엔은 사흘 동안 2층 발코니를 점령하듯 앉아 커피 한 잔을 느리게 비웠고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 또한 없었다.
“그 뒤로 극단에 합류했거든. 모르비아네즈.”
“이곳에서 모인 극단 말이지.”
란지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그래? 불편해 보여.”
“그런 정보를 얻으려고 네냐플에 들어간 건 아니었는데.”
“뭘.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는걸.”
“조슈아는 진심으로 그 단체에 애정을 가졌어.”
“암살자가 그로 착각해 애먼 사람을 죽였으니. 데모닉이라도 죄책감은 있는 거지.”
이엔은 스스로가 말하고도 어깨를 움찔했다. 그 또한 그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을 때 배우의 죽음을 알고 마음 아파하지 않았던가. 모로의 심복이 정보를 제공한 후에는 그의 죽음이 한 인간의 욕심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안전한 곳에 앉아 그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은 두 사람이, 죽음과 죄책감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이엔은 거리를 내려다보는 제 친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대책을 안배해두는 듯한 그도 천리 바깥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흔들림 없는 얼굴 안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그를 오래 알아왔음에도 알지 못했다. 하일저라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과거에는 란지에의 앞에서 제 날것의 생각을 꺼내놓을 수 있었지만, 그가 왕국 8군에 끌려간 이후로는 혀 아래에 미처 발화되지 못한 감정이 켜켜이 쌓였다. 이엔은 작게 조소했다. 비슷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배우의 죽음은 무심결에 튀어나올 만큼 무뎌진 주제에 결국 살아남은 란지에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단순히 지척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공정한가? 란지에를 사랑하는 만큼 이네스 올프랑쥬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기, 잡화점 옆을 지나가는 사람을 봐.”
“너무 어리지 않아?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데. 사고 당시에 열 살이나 되었을까.”
잡화점 옆으로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장밋빛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려 묶었고, 그 옆에 대낮인데도 챙 있는 모자를 깊이 눌러쓴 소년이 있었다. 목덜미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이 은회색 빛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도 그리 친근해 보이지는 않았다. 붉은 머리가 잡화점 야외 가판대의 물건을 살피자 관심이 없는 듯 문제의 은발 소년은 딴청을 피웠다.
“일행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이엔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란지에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들을 살펴보았다. 어린 외모를 제외하면 조슈아 아르님과 빼다 박은 인상이었다. 곧은 자세나 무심한 듯 남의 어깨 너머로 향하는 시선. 조슈아를 본 것은 주로 네냐플에서 같은 교복을 입은 소탈한 모습이었건만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더 격식 있는 곳에서, 시야 안에 들지 않도록 멀찌감치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문득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란지에는 정확히 그 눈과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빼닮은 머리칼이나 생김새보다도 놀라게 했던 것은 그의 시선 안에 담긴 고유한 기질이었다. 평생 먼저 시선을 돌려본 적이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눈. 천천히 몸을 펴 제자리로 돌아오자 마찬가지로 밝은 곳에서 얼굴을 확인하게 된 이엔은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똑같아.”
그들이 조슈아 아르님에 대하여 공유하는 기억은 한 순간이었다. 아르님과 폰티나가 지극히 과시적인 연주회를 연 날. 그리고 그 당시 조슈아 아르님은 그 자신이 아니지 않았던가. 하나의 가설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이엔이 빠르게 주지시켰다. 소년은 이미 시야 안에서 사라진 채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계단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앉은 카페는 오르내리는 계단이 단 한 군데였지만 마주본 창고의 문을 열면 건물 뒤편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나 있었다. 이엔의 몸이 긴장한 듯 굳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란지에는 잘 알았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공간에서 포위되는 감각, 떨쳐버리지 못한 죄책감, 그리고 죽은 자와 닮은 소년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오싹함. 소년의 일행은 여전히 물건을 고르는 중이었다. 란지에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들어 이엔에게 건넸다. 담배를 받아드는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지만 이윽고 고개를 끄덕여 보일 정도로는 진정할 수 있었다. 소년이 카페에 걸어 들어와 계단을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여남은 초였지만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그를 맞을 정도는 되었다. 테이블 가까이로 의자 하나를 끌어오자마자 그가 나타났다. 소년은 카페 안쪽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이내 테라스에 앉은 이엔과 란지에를 발견하고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자 이엔이 먼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해 보였다. 마찬가지로 고개만 끄덕인 그가 멋대로 식어빠진 란지에의 잔을 들었다.
“이곳의 커피는 꽤 훌륭하지요.”
“그렇습니까? 입맛이 꽤 섬세한 편은 아니라.”
무심한 어조로 답변이 돌아오자 소년은 부러 한쪽 눈썹을 치켰다. 그 후로 몇 번쯤 의미 없는 날씨 이야기나 파도의 높이 따위를 읊어보던 소년은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더니 나무랄 데 없는 동작으로 소서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어디 불평할 테면 불평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가볍게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든 모습은 금방이라도 발톱을 드러낼 준비가 된 고양이 같기도 했으나 위장된 여유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다. 란지에는 느슨하게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 내렸다.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단순히 조슈아를 닮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히 그를 닮았다. 최근에는 사람의 외모를 완벽하게 다른 이의 것으로 바꾸는 마법도 있다고는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자신감이나 자연스러운 태도는 누군가 변장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어느 누가 그의 태도를 제 피부에 녹인 듯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렇듯 단순한 도발에 넘어가 조슈아를 알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다가오지 못한다. 그는 단순한 사칭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모르는 듯 구는 태도와 어린 외모. 소년은 진실을 숨긴 채 걸어 들어왔고, 그건 란지에 자신도 한 걸음 깊숙이 들어서야 함을 의미했다.
“널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래서인가? 꽤 집요하게 지켜보던걸.”
“죽은 사람을 다시 보면 너라도 그렇게 행동할 테지.”
“미안하지만, 내게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라.”
란지에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눈앞의 소년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지만 그것이 괜한 허풍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가 유령을 보기라도 했던가. 이엔은 가설을 시험해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분명 소년은 완벽하게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마법이 작동하는 방식은 인간의 눈썰미를 상위한다. 이엔은 귓가에서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분명히…….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갑작스럽게 입을 연 이엔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비취반지 성에서. 클로에 폰티나와 협연을 했지.”
소년은 말이 없었다. 이엔은 타들어가는 담배 끄트머리를 털어냈다. 소년은 구태여 이엔을 바라보지 않았으나 그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이엔은 말을 골랐다.
“그런 사람은 결코 둘일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마법처럼,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 아니라면.”
과연 그 말이 통했을지는 몰라도 소년에게 동요를 일으킨 것만은 확실했다. 만약, 그가 조슈아 아르님의 인형이라면, 이엔의 짐작이 옳다면, 진짜 조슈아 아르님과 분리된 경험의 순간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못하리라. 소년이 유지하는 침묵은 점차로 긍정의 저울추에 무게를 더해갔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이 기다린다는 것도 잊고 실례했습니다. 혹시나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머메이드 펄 극장에서 막스 카르디를 찾으시지요.”
자리에 앉을 때와 같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일어난 카르디는 조금 전보다는 굳은 기색으로, 그러나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두 사람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엔은 문득 그 시선 안에 담긴 이상 그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어쩌면 위험한 적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카르디는 천천히 일행에게 돌아갔다. 붉은 머리를 한 여자와 함께 극장 거리 쪽으로 향하는 것까지 확인한 이엔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타들어간 담뱃재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흔적을 남기고 나서야 이엔은 자신이 얼마나 몰두해 있었는지 깨달았다.
“잘 된 걸까?”
“더 일찍 인형이 살아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떠올렸어야 했어.”
“잠들었다는 말 이후로는 소식이 없었잖아. 지금까지 어디에 있던 걸까.”
데모닉의 능력을 아는 자라면 이미 연주를 두 눈으로 본 사람을 어쭙잖은 재주로 속여 넘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터였다. 자신이 마주한 자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싹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생동감이었다. 그가 피가 돌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런 인형을 만든 자의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피가 식었다. 말이 없는 란지에 또한 같은 순간을 생각하는 듯 보였다.
“우리도 일어나자. 극장에 찾아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테니.”
테이블을 깔끔하게 정리한 란지에는 어느새 혼란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3. 무대
리체는 자기 자신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칼라이소 생활에 적응했다.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어서일까.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십여 년 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칼라이소의 골목과 거리 들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정작 자신을 무턱대고 끌고 온 카르디는 적응하지 못하는 듯 보였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리체는 조슈아와 함께 대륙을 횡단하던 때를 무심코 떠올렸다. 흙바닥에서 야영을 하고 음식이 맛이 없다며 투정을 부리던 모습, 그때를 생각하면 쾌속선을 타고 육지를 오가거나 마찬가지로 입맛 까다로운 카르디가 고심해서 고른 음식을 먹는 일은 놀랍도록 안락한 여정이었다.
카르디는 발 빠르게 움직인 모양인 듯 리체를 만나기도 전에 작은 극장 하나를 빌렸고, 그들이 칼라이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설치되었던 무대가 해체 중이었다. 극장 주인이라는 자는 공연장 내부의 테이블을 모두 치워달라는 요청에 심드렁하게 이제는 테이블을 대여할 때 오히려 추가금이 붙는다고 일렀다. 십여 년 전 온 나라의 금화란 금화는 모두 긁어모은 기적 같은 공연 이래로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젊은 부잣집 한량들이 만들어낸 문화였다. 극장 주인은 카르디 또한 그런 부류로 간주하는 듯했으며 카르디가 무슨 말을 하든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관심을 끌지 않는 건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다. 카르디는 관객이 한 명만 있다면 일주일 후에 극장 좌석 백오십 석을 모두 채울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다.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무대 위에서도 당연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 카르디의 몸짓에서는 거칠 데가 없었다. 먼지 냄새나 풍기는 낡은 극장에 그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도. 리체는 하이아칸에서 본 조슈아의 공연을 떠올렸다. 공연에 문외한인 자신에게도 조슈아가 보이던 아우라는 분명히 보였다. 카르디는 그 자신도 공연을 만들고 모든 것을 기획했다고 말했지만, 리체가 본 공연은 확실히 그들이 분리된 이후의 조슈아였다. 그런데도 그 둘의 모습이 동일한 이유는 무엇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완성된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면밀한 눈을 가지지 못한 리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마음 한 편이 찝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형을 조슈아에게 비견된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그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리체는 얼굴을 찌푸렸다. 조슈아를 복제한 인형이 조슈아와 같은 능력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래서는 카르디를 인정하고 싶은 건지, 오히려 그 존재를 무시하고 싶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카르디가 고용한 사람은 조명 기술자와 무대 기술자,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이 전부였다. 카르디만이 무대 위에 올라가는 유일한 배우였다. 처음 그 계획을 들었을 때 리체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무대 위에 올라가 간단한 재주나 마술을 선보이고 노래를 부르는 보드빌 공연은 칼라이소에서도 이미 자리를 잡은 공연 형식이었다. 카르디는 물론 재주를 부릴 생각 따위 전혀 없었고, 두 시간 남짓의 연극으로 홀로 무대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다. 기술자들이 그런 공연을 누가 보겠냐며 우려를 빙자해 웃음을 터뜨렸음에도 카르디의 선언대로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리체는 기술자들이 카르디와 대화할 때마다 은근히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카르디를 두둔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카르디의 재능을 아는 것은 그 자신밖에 없는데도. 빈말이라도 겪어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 아니냐 한마디 대꾸했지만 그 말은 여느 때와 같은 치기어린 자신만만함으로 간주되었으며, 리체는 화가 났고, 동시에 거기에 맞받아치지 못한 자신에게 놀랐다. 짓궂거나 무례한 사람들이라면 익숙했고 어떤 말을 하면 수그러들지 또한 잘 알았다. 그럼에도 실행하지 않은 것은 일일이 에너지를 쏟지 않을 만큼 그 자신이 무뎌져서일까, 혹은 무대 한 번을 보면 카르디의 실력을 납득하게 되리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일까. 두 가능성 모두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개막이 코앞이었고, 리체는 카르디가 주문한 옷 두 벌을 만드는 중이었다. 익숙한 체형, 익숙한 스타일. 오랜 시간 동안 무대 의상을 만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늘은 떨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천 위에서 매끄럽게 움직였다. 리체는 그 시간이 좋았다. 주변 소음이 의식에서 점차로 멀어지고 제 손이 의지를 벗어나 자연스럽게 길을 내었다. 한 벌은 남색과 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여름용 재킷과 바지였는데,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서 얼핏 자줏빛이 돌았다. 얼핏 뻣뻣한 선처럼 보이는 베스트에는 광택이 나는 실로 바다의 포말을 잔무늬로 수놓았다. 원단은 아노마라드 산이었고, 실은 두르넨사에서 왔다. 칼라이소에서는 무슨 재료든 구하기가 쉬웠다. 미랭게트 의상실에서도 제법 좋은 재료들을 사용했지만 항상 아끼고 아끼는 태도가 습관이 되었기에 카르디의 금전을 등에 업고 좋은 재료를 마음껏 쓰는 기분과는 달랐다. 물론 카르디가 고안한 패턴들은 타협의 여지없이 빡빡함을 자랑했으나 그의 말마따나, 리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누구의 비위도 맞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만족감이 들 때면 리체는 부러 가족들 생각을 했다. 카르디에게 받아낸 선금으로 (그 돈은 정체모를 외국의 금화에서부터 아노마라드 엘소, 심지어는 구공화국의 주화까지 모두 섞여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을 테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돈을 조금씩 나눠 보내는 편이 좋았을 텐데. 어머니나 동생이 허투루 쓰지 못하도록……. 리체는 불현듯 가족들을 향한 신뢰가 예전만큼 그리 공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첫 공연 삼십 분 전. 바깥에서 저녁을 때우고 돌아온 리체는 대부분이 비어 있는 객석을 보고는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조슈아의 공연은 항상 객석을 꽉 채우지 않았나.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극장 밖에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경우도 적잖게 있었다. 공연 시작 전 사람들의 표정 또한 저마다 열에 들뜬 사람들이 당장 공연이 시작되길 바라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에 늘어져 앉아 있었다. 그나마 앞자리가 비어 있음에도 뒷자리를 골라 앉은 관객 두 명만은 반듯하게 앉아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리체는 슬그머니 가장 끝줄에 앉았다. 어슴푸레하던 조명이 완전히 꺼졌다. 구둣발 소리, 천이 서걱거리는 익숙한 소리.
카르디는 단지 밝은 조명에 이목구비가 흐려지지 않도록 눈매를 덧그리고 음영을 조금 주었을 뿐 맨 얼굴을 살렸다. 창백한 조명을 받으며 걸어 나온 그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벼운 손짓에 바이올린이 짧은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카르디는 그동안 대본을 여럿 썼지만 악보는 단 세 장뿐이었다. 어린 바이올린 연주자는 대본과 관계없이 단 한 명의 배우의 손짓을 따라 곡을 연주하기로 계획이 짜였다. 카르디는 자신이 어떤 가사를 붙여 부르든 신경쓰지 말라는 당부를 전했다. 다소 느리게 시작하는 현악기의 저음이 부드럽게 울렸다. 카르디는 마치 음유시인이 된 것마냥 태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극의 배경은 바다 인근의 어떤 마을이다. 해초와 바다거품의 냄새가 뒤섞여 부패하는 냄새가 끓어오르는 바다. 바위와 조개로 뒤엉킨 해안은 아주 작은 배 하나만이 지날 수 있는 좁은 길만을 허용한다. 파도는 각종 부유물 사이를 헤집으며 끊임없이 밀려들고 밀려가지만 저 멀리서 뜬 창백한 태양의 손은 그 바닥에 닿지 못해 그저 사람들의 목과 이마를 간지럽힐 뿐이다. 어릴 적부터 어부인 부모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한 소년은 바다 근처에서 반짝이는 인어의 비늘을 발견한다. 그에게 익숙한 것은 육지에 내던져져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허덕이며 몸부림치는 물고기였는데. 뭍에서도 편안한 듯, 잠든 사람마냥 천천히 오르내리는 인어의 살갗을 몰래 숨어 보다가 참지 못하고 비늘에 손가락을 가만히 얹어본다. 그 순간 깨어난 인어는 소년이 눈치 챌 사이도 없이 그의 목을 움켜잡고 숨결을 내뱉는데 소년은 목소리를 잃고 만다.
한참 극 내용에 집중하던 리체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카르디의 목소리는, 뭐랄까,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어리석은 소년이었다가, 강인한 인어가 되고, 지혜로운 노인이 되었다. 겨우 몇 걸음을 내딛으면 벽에 부딪히는 무대 안에서 그는 육지와 바다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유영한다. 소년은 목소리를 되찾을 방법을 찾아 헤매다 산호로 깎은 칼과 새카만 진주를 박은 나침반을 들고 인어를 찾아 나선다. 마침내 인어를 만나는 순간, 카르디는 다시 연주자를 향해 손짓하고 그의 활은 점차로 빨라지며 음률이 가파르게 솟았다. 인어는 산호로 된 칼로 소년의 혀를 가볍게 벤다. 어두운 바다 아래에서도 붉게 빛나는 소년의 핏방울은 안개처럼 흩어져 흔적도 없이 바닷물에 녹아들고, 소년의 손 안에서 나침반의 진주가 부스러진다. 소년은 다시 목소리를 내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는다. 인어와 소년은 자유롭게 심해를 헤엄쳐 다니다 지칠 때면 암초에 기대어 쉬고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는 배의 밑바닥을 간지럽히며 장난을 치곤 한다.
카르디는 숨이 찬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바다 아래를 의미하는 조명을 받는 그의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르렀다. 허공에서 움찔거리는 손마디가 고통스러운 듯 보여 리체는 몸을 일으키려다 카르디의 검은 눈과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슬쩍 저어 보였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는 카르디에게 눈을 떼지 않던 리체는 뒤늦게 드는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이 자신과 정확하게 마주쳤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가 본 것이 정말 자신이었을까? 다시 시작된 바이올린 소리가 문득 몸을 관통하는 기분이 들어 몸이 오싹했다. 카르디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마치 두 사람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로 마지막 노래를 시작했다.
공연이 끝난 뒤 잠시 조명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막이 내려가지 않은 채 카르디는 단지 무대 정중앙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지친 기색이었다. 객석에서 느리지만 확실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마 되지 않은 관객들이 서로 나지막한 고양감을 공유했다. 카르디는 빠져나가는 관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리체와 눈을 마주치고는 웃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리체를 향한 웃음이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객석을 향하더니, 무대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사람들 뒤로 빠져나가려 하는 관객 둘을 붙잡았다. 처음 객석에 들어섰을 때 리체가 눈여겨 본 두 사람이었다.
“잠시, 한 잔 하실래요? 빚진 커피가 떠올라서요.”
4. 티타임
차를 마시기 적합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카르디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막무가내였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의 이엔과 란지에, 돌발행동에 당황스러워 하는 리체, 그저 공연의 긴장감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아 정신을 못 차리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에게 이끌려 작은 찻집으로 향했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그들은 사실상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이상한 조합이라 어색하게 눈인사만 건넬 뿐 침묵을 지켰다. 오직 카르디만이 능숙하게 차와 가벼운 다과를 주문한 후 서로의 이름을 간단히 소개했다. 리체는 낯을 가리지 않았을 뿐 분위기에 휩쓸려 이름도 하는 일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릴 만큼 속편한 인간이 아니었다. 다만 공연에 익숙한 카르디가 스스럼없이 관객을 만나고자 한다면 이미 안면을 튼 사이가 아닐까, 하는 예상만 가볍게 해볼 뿐이었다.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카르디를.”
리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나서야 카르디가 아무 상관도 없는 연주자를 이 자리에 대동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아늑한 찻집은 인형이나 가나폴리의 마법이 화젯거리가 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어린 연주자가 듣고 있는 한 리체가 더 말을 고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비취반지 성에서. 일방적으로 본 거지만요.”
이엔은 불안하게 말했다. 리체는 란지에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을 내리깔고 미동도 없는 찻잔을 바라보던 그가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네냐플에서 만났습니다. 조슈아를요.”
일부러 언급한 이름에 리체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두 사람은 왜 함께, 이곳에 온 것이고 하필 공연을 봤을까. 카르디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까? 로젠크란츠라는 이름은 조슈아가 드물게 보내온 편지에서 한번쯤 언급된 이름인 것 같기도 했다. ……친구의 친구 따위를 기억할 만한 정신은 없었지만.
“조슈아와 막시민이, 아브릴 씨 이야기를 종종 했습니다.”
그는 말을 꺼내면서도 예의상 언급할 뿐이지 특별히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리체는 그런 란지에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카르디를 발견했다. 조슈아의 이름이 나왔다고 해서 특별히 언짢아하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리체는 자리를 뜨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고 무던 애를 썼다. 분명히 공연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이런 시작으로, 작은 소극장을 채우는 정도로 괜찮지 않을까. 관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니 소소한 축하를 나누고 다음날 공연을 준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이유 모를 찻자리로 물거품이 되었다. 반면 카르디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느긋한 얼굴로 연주자에게 라즈베리 잼을 얹은 판나코타를 챙겨주는 모습에서 도통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리체는 하는 수 없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좋게 말해서 리체는 음식을 그다지 가리는 편이 아니었고, 홍차가 우려진 정도나 디저트의 식감에 대해 어렵사리 입을 떼면 맞아요, 하고 형식적인 맞장구가 돌아올 따름이었다. 대화는 쉽게 끊겼으며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카르디는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는 것에 만족했다는 듯 이야기를 주도하려고 들지 않았다.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리체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쯤, 그건 차가 어느새 미지근해진 시점과도 일치했는데, 낯선 두 사람이 서로 눈짓하는 것이 보였다.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자는 눈치였고 리체로서는 환영이었다. 란지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인상적인 연기였습니다. 눈을 떼기가 어렵더군요.”
“조슈아보다도요?”
카르디의 질문이 잠시를 놓치지 않고 파고 들어왔다. 란지에의 눈가에 얼핏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짧은 식견으로 비교하기는 어렵군요.”
리체는 그 순간 참을 수 없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네 사람의 눈이 그에게 쏠렸다. 카르디의 눈은, 그 안에는 자신이 깊이를 잴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야 어렴풋이 자신의 감정을 알 것 같았다. 리체는 카르디가 조슈아를 대체하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조슈아 대신 카르디가 남을까봐…… 혹은 자신 또한 그 자리에 만족하게 될까봐.
“당신이 무슨 수를 쓰든 진실이 변하지는 않아요. 카르디. 당신이 조슈아의…….”
“아브릴 씨와 먼저 돌아갈게요. 시간도 늦었으니.”
리체의 말을 끊은 것은 그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었던 이엔이었다. 리체는 그 자리에서 카르디와 담판을 지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상관없는 사람에게까지 심통을 부리지는 않을 만큼의 이성은 남아 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엔은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바이올린 연주자는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듯 눈만 데굴 굴렸으며, 란지에는 말없이 찻잔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카르디는, 리체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서글픈 표정을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다른 재봉사를 구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리체는 혀끝에서 맴돌던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찻집을 나서자 습한 공기 속에 흙 내음이 감돌았다.
“비가 내릴 모양인가 봐요.”
“카르디 씨에게는 좋은 일이네요. 이곳 사람들은 비를 피하러 극장으로 가니까.”
이엔은 경쾌하게 말했다. 리체는 그런가, 하고 블루코럴 섬의 극장을 떠올려봤지만 비가 온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몰리거나 했던 일은 없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곳의 관객인 귀족들은 비가 오면 구태여 외출을 감행하여 옷을 더럽히기보다는 그들의 안락하고 쾌적한 별장에 머무르는 편을 선호했다. 할 말이 없어진 리체는 길을 따라 걸었다. 처음 그들을 봤을 때는 떠오른 의문이 그렇게 많더니, 막상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는데도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인형에 대해 알고 있는 거죠.”
이엔의 옆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이때를 대비해왔다는 듯.
“그래요.”
“……카르디가, 왜 공연을 올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가 잘 하는 일이니까. 예술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데모닉이잖아요.”
“이유가 정말 그것뿐일까요? 카르디는 어디에서 살아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요. 돈도 있고, 평화롭게, 자신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배우를 선택했느냐는 말이죠. 연기는 카르디의 재능이기도 하지만, 매순간 조슈아를 떠올리게 될 거예요. 그도, 저도 마찬가지로.”
거의 숨 쉴 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 보일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그 말고 달리 말할 데가 어디 있겠는가. 카르디는 이것을 바랐을까? 불만을 내리누르던 리체가 어느 식으로라도 마음을 털어놓기를 바랐을까.
“편안한 삶만이 인생의 전부인 건 아니잖아요. 아브릴 씨는, 왜 그를 따라 여기까지 왔나요?”
“그야 당연히…….”
리체는 언뜻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걸음이 느려졌다. 숙소가 자리한 거리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엔이 자신을 바래다주겠다고 나선 것은 단순한 호의 이상의 의도가 숨어 있을 터였다.
“흔히 있을 기회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여기 영원히 있을 생각도 아니에요. 가족들이 있고, 물론 카르디가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카르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와 함께하는 건…… 마치 멈추지 않는 마차를 탄 기분이에요. 창밖으로는 풍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확실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지요.”
“어쩌면 그는 그저 연극을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꼭 돌아가야 할까요? 그대로 끝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까요?”
“그건 무모한 일이에요. 물론 카르디의 일을 돕는다면, 즐거울지도 몰라요. 아니, 그런 즐거움은 있어요. 언젠가는 그런 선택을 해도 괜찮을 날이 오겠지요. 영향력이 생기고, 아노마라드가 안정되고, 하지만 지금은 무엇 하나 안정된 게 없으니까. 가족들을 내버려둘 수도 없고요.”
리체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트렸다. 애초에 카르디를 따라 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차분하게 말을 듣고 있던 이엔 또한 어느새 대화에 몰두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그를 돕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아브릴 씨. 자신의 일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요. 저는 제가 믿는 것, 내 목표를 위해 무엇이든 했어요. 그 때문에 가족은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이해해주리라고 믿어요. 전 항상 제 선택을 자랑스러워했지요. 많은 것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 친구, 동료……. 당신이 얻게 될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잖아요. 무엇이 두려운 거지요?”
“날 겁쟁이 취급하는 모양인데. 난 단순히 골방에 틀어박혀 바느질이나 하던 재봉사가 아니에요. 가족이 단순히 다른 무엇과 교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카르디가 왜 연극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죠. 그건, 그냥 그래야만 해서일지도 몰라요. 그가 공연하는 모습을 같이 봤잖아요. 아브릴 씨,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야 해요. 누군가의 인형이 아니라, 혹은, 누군가의 딸이 아니라.”
“왜 그렇게 카르디에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네요. 아니, 당신은 어떻게 인형에 대해 알고 있죠?”
이엔은 꽤 서글픈 표정이었다. 리체는 숙소 앞에 다다라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부터 그것에 대해서 물어야 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는지부터. 언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상대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곤란한 듯이, 조심스럽게 뱉어낸 말은 스스로에 대한 책망과, 부끄러움과, 그럼에도 옅은 두려움이 섞였다.
“그를 만든 마법사도, 사주한 자도 죽음을 맞았어요. 물론 내가 그 마법에 일조한 것도, 그 계획을 알고 있던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으로서, 그를 살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내가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걸 아브릴 씨에게 요구할 수는 없겠지요. 당신은 아르님과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리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런 말은 조슈아와도, 카르디와도 거리를 두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이엔은 답변을 바라는 듯싶었으나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실례가 많았네요, 하고 중얼거린 그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보았다. 때와 맞지 않게 명랑한 웃음. 이엔은 모자챙을 가볍게 잡아 보이며 인사했다. 리체는 결코 생각해보겠다는 말 따위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모자 아래로 비죽하게 튀어나온 짧은 금발이 여름 밤바람에 흔들렸다.
5. 대화
“그들이 카르디를 제거하려고 할까.”
“높은 확률로.”
“안됐어. 그는 너무…… 어린걸.”
“우리가 조슈아를 죽이려고 할 때 나이보다는 어리지 않아.”
“그때는 상황이 달랐지. 지금은 우리에게 여유가 있어. 좀 더 관대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의 존재가 훗날 위협이 될 거라고 판단할 거야. 우리가 돌이킬 수는 없어.”
“인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가 어렸을 때 한 일 말이야. 공화국을 무너뜨린 것. 그런 기억과 카르디를 분리할 수 있을까?”
“결국 그 선택으로 인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지. 그가 자연스럽게 누리고 살아온 것들을, 민중은 평생에 걸쳐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고.”
“그는 모든 것을 잃기도 했어. 가족, 친구, 그의 존재는 뿌리부터가 누군가의 탐욕의 결과야. 그런 짐 또한 이전까지 누구도 가진 적이 없지.”
“불행으로 죄가 상쇄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나?”
“아니. 그건 정도나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 다만 언젠가 그가 심판대에 섰을 때, 그 사실이 감안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될 거야.”
“믿어?”
“우리가 만족하지 않는 한.”
“그렇지. 그게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었지. 정의롭고… 공정한.”
“잠시도 쉴 수 없고.”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카르디에 관한 것이야?”
“그래.”
6. 란지에 로젠크란츠
머리 위로 떠오른 태양이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건만 바다로부터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와 아주 더운 날은 아니었다. 칼라이소의 항구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배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배를 받아들였다. 그 안에서 생동하는 사람들은 결코 정주해 있는 자를 참아내지 못했으며 북적이는 거리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벗어날라 치면 금방이고 볼멘소리가 사방에서 날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런 실랑이 와중에 단단한 선원들의 몸과 정통으로 부딪혔다가는 저도 모르는 새에 이리저리 떠밀려가는 것이 뻔한 말로였으니 목적 없이 한가하게 그 사이를 노니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 또한, 괜히 인파의 흐름 안에 몸을 욱여넣기보다는 멀찍이 떨어져 동향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때마침 중심 부두로 꽤나 큰 규모의 무역선이 밀려 들어왔다. 닻을 내리고, 밧줄을 던지고, 묶고, 연결다리를 내렸다. 일련의 과정은 능숙하게 이어지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것으로 보아 항구를 제법 오간 노련한 배일 터였다. 몇 사람이 배 가까이 다가가는 듯싶더니, 배에서 내리는 승무원들과 실랑이를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저들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걷던 사람들은 저마다 한 번씩 돌아보고, 누군가는 멈추어 서고, 그로 인해 미처 피하지 못한 누군가가 욕설을 뱉어내고, 누군가는 싸움에 가담하고……. 말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입이 필요하지 않았다. 목청 큰 사람 몇 명이 소리를 내질러댔기 때문이었다.
“항구 사용료를 더 내라고! 우리가 몇 년을 일해 왔는지 몰라?”
“그럼 알지, 하지만 규정이 바뀌었다네.”
“허구한 날 규정을 바꿔대는데 그게 무슨 규정이야!”
……등. 칼라이소에서는 그러한 소란이 문제가 될 만큼 큰일은 아니었는데 (항구 입장에서는 밧줄을 잘라내기만 하면 그들이 바다를 표류하다 해적을 만나든 폭풍을 만나든 상관할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소란을 지나치지 못하고 어느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지는 상인 조합에 소속된 배의 목록은 그 국적에 따라 정리되어 신新 아노마라드 왕국의 이름 아래 있었는데, 이제는 나라의 이름이 바뀌었으니 목록을 새로 작성해야 하며 신규 기입을 위해서는 추가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젠장,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야! 나라 이름 좀 바뀌었다고 사람이 달라져?”
눈에 바닷물이 들어가도 절대로 돈 한 푼 못 낸다고 을러대던 선원은 급기야 조합장과 대화해야겠다며 갱웨이 위에 드러누웠다. 그것을 발단으로 선원을 바닷속으로 빠뜨려 기어코 눈에 바닷물이 들어가게 하려는 무리와 어떻게든 항구로 내려가려는 무리 들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상회 주인은 육로로 오는 게 아니었나요?”
목소리는 웅웅거리는 소음을 뚫고 정확하게 들렸다. 란지에는 놀란 기색도 없이 몸을 돌렸다. 카르디는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이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동공과 마찬가지로 새카만 눈에 광기어린 인파가 비치지만 그 광경이 그의 눈에 어떻게 인식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말 없는 카르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올랐다. 란지에는 그 얼굴에서 아득한 거리감을 발견했다.
“기다리는 동안 현지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사환이 해야 하는 일이지요.”
“꽤 신임 받는 사환이네요.”
란지에는 짧게 눈짓했다. 용건을 말하라는 의미였으나 카르디는 햇살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다시 부두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님 가문의 선조가 뱃사람이었다는 거, 알아요? 우리 할아버지도 배를 탔고, 조슈아도 배를 탔지. 뭐…… 본인 말로는 끔찍했다지만.”
대답을 요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항해하고 싶지 않아요. 어딘가에, 차라리 깊숙한 곳으로 잠겨드는 편이 훨씬 마음에 들어요. 데모닉이라도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바다 어딘가에는 물살의 흐름이 없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가고 싶어요.”
“당신의 연극처럼, 말입니까.”
“어느 날 나의 목소리를 앗아갈 인어와 함께.”
란지에는 비로소 카르디의 미소가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건 근육에 자연스럽게 배어든 경련에 가까웠다. 어느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기 때문에 무용하고, 또 관대한 미소였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혹은 무엇을. 그의 생 안에 그 말고 다른 이를 위한 자리가 존재하기는 할까? 란지에는 알 길이 없었다. 아노마라드로 귀환하기 전에 조금이나마 그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는 날을 잔뜩 세운 채였다. 만일 그가 타인과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일은 조금 더 쉽게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노마라드에 가고 싶다면, 신원 보증을 해줄 수 있습니다.”
카르디는 크게 몸을 움찔했다. 아노마라드의 모든 국경이 삼엄하게 감시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수상한 자를 경계하려는 시도는 손에 차고 넘쳤다. 그런데 언뜻 자신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란지에가 꺼내기에는 다소 의아스러운 말이었다.
“당신이 왜 그런 호의를 베풀죠?”
“어딘가에서 살아가야 하니까요. 영원히 이곳에 있을 생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어떤 것도 답해주지 않아요.”
“제가 인형의 존재를 어떻게 안다고 생각합니까.”
“……그 말만으로 당신을 미워할 뻔했어. 못 들은 일로 하지요.”
“진실이 궁금하지는 않습니까.”
“진실은 두 가지로 충분해요. 내가 이곳에 살아 있는 것, 그리고 악마가 속삭인 진실.”
란지에는 입을 다물었다. 악마, 데모닉이라는 별명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악마라는 단어 자체를 들은 지가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카르디는 얼굴 위로 선명한 냉소를 그렸다.
“당신이 누구를 대하고 있는지 체감이 돼요?”
겁이라도 내길 바라는 모양인가, 카르디의 위악은 그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가시를 세워 타인으로 하여금 그에게 질려 물러서게 하면서도 정작 제 속살만은 시뻘겋게 드러내 보였다.
“여전히 의문인 점이 있습니다만.”
“물어봐요. 내가 답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어떻게 운신하는지, 어떻게 아직까지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태엽을 돌려서 움직이는 인형만큼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 압니다.”
“살을 내보였더니, 배 안까지 헤집어보려 하는군요. 당신은 이미 그 이마 안에서 나름의 답과 그에 따른 판단까지 마치고 묻는 게 아닌가요?”
카르디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더니 가볍게 눈을 흘겼다.
“내가 조슈아의 시신이라도 취했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난 해줄 말이 없어요.”
“부인하지는 않는군요.”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요. 나는 그가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카르디는 부러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부두의 소란은 차츰 정리되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배에서 화물이 내렸다. 또 다른 배가 떠나고, 다른 배가 들어오는 고동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꼼짝도 않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카르디의 표정은 어쩐지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꽤 누그러든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조슈아와 친했나요?”
“일대일로 대화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왠지 알 것 같네요. 관심사가 크게 겹칠 것 같지도 않고. 룸메이트가 아니라면 만날 일은 거의 없었겠지요.”
“그래요. 남들과 쉽게 친해지려 하지는 않았지요. 실은 그래서 당신이, 나와 이엔에게 살갑게 구는 것이 낯설었을지도 모릅니다.”
카르디는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의 침묵이 흘렀을까, 기류가 어색해질 만도 하건만 이윽고 꺼내는 말은 가벼운 농조가 섞였다.
“아무튼, 제안은 거절할게요. 일개 사환이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검문 과정이 얼마나 쉬운지 알만 한데요.”
란지에는 입꼬리만 가볍게 끌어당겼다. 노골적으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분장을 언급했지만 조롱조는 아니었다. 일순간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을까. 두 눈이 마주쳤다. 조슈아의 인형이 만들어진 것이 엄밀히 말해 란지에나 이엔의 잘못인 것은 아니었다. 모로의 계획은 그들과 무관하게 진행중이었고, 민중의 벗과 손을 잡지 않았더라도 카르디는 생겨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일과 그들이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디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는 그저 조슈아의 인형이었고, 그것은 모로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결과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인형이 눈앞에 있다는 것은 단지 사실과 정보로 존재하는 문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의 살 아래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을까. 란지에는 기이한 것을 파고들어 탐색하고 비밀을 파훼하는 종류의 열정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본성이 어떤 모양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감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조슈아와 카르디의 본질적인 차이를 알아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한때 도구처럼 이용했던 아르님 소공작의 목숨이 조슈아의 것이 되었던 것처럼, 조슈아의 인형이 카르디가 된다면 그가 생각해야 할 것과 감수해야 할 것은 몸집을 불려 언젠가 그 자신을 짓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전에 거리를 두는 편이 합리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분명한 비이성의 충동에 사로잡혔다. 카르디를 인간으로 대하는 것, 그 여파가 훗날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도 안 되었을 텐데. 그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고 확언할 수 있나?
“이상해요. 꼭... 언젠가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런 착각은 잘 안 하는데.”
“그 기억력 때문입니까?”
“내가 한 일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어쩐지 기억해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요. 그게 내가 아닌 타인의 의지였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지만.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달라요. 기억해내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깝지요.”
멀리서 카르디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헉헉거리며 다가온 소년은 리허설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부드럽게 웃어준 카르디가 란지에에게 시선을 돌렸다.
“같이 갈까요? 상회 주인은 오늘도 도착할 기미가 없어 보이는데.”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요.”
다시 극장 거리로 돌아가는 동안 카르디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란지에로서는 알 턱이 없는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리기도 했는데, 그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에서 선망이 묻어나왔다. 소년이 종종걸음으로 먼저 극장 안으로 들어갈 때, 란지에는 넌지시 말했다.
“당신을 꽤 따르는 모양입니다.”
“착한 친구죠. 실력도 있고, 열의도 있고. 예전에는 그런 시선이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기껍네요. 그 앞에 서면 내가 왜 누군가의 원망을 서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기도 하고.”
“왜 바이올린이었습니까?”
카르디는 극장 문을 잡아주며 턱짓했다.
“당신이 무슨 짐작을 하는지 알겠군요. 미안하지만 나는 오직 무대만을 고려했어요. 누군가의 대체품을 찾는 것도 아니고.”
극장은 어두웠다. 시설이 협소한 탓에 모든 연습은 실제 무대 위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때문에 주변은 널린 악보와 대본으로 어수선했다. 의상을 갈아입고 나타난 카르디는 이어 작은 거울을 손에 들고 얼굴 위로 두 가지 색의 선을 그려나갔다. 연주자는 거의 숨도 쉬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르디는 붉은 물감과 푸른 물감으로 얼굴 위에 선을 그려나갔는데, 분장이라기보다도 마구잡이로 그은 선에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대 의상은 온통 희었다. 흰 새틴 천 위로 폭이 넓은 천을 덧댄 상의는 풀을 먹여 빳빳하게 모양이 잡혀 있었다. 언뜻 드레스처럼 보이도록 기장이 길게 잡혀 있었지만 허리의 선이나 다리를 감싸는 천은 수직으로 떨어져 어떤 이를 위한 의상인지 쉽게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조예가 깊지 않은 란지에로서는 어떤 의도로 제작된 의상이고 분장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객석 가장 앞줄에 앉은 이 조용한 관객은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고 그저 이 모든 과정 또한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지켜보았다.
이윽고 거울을 치우고 카르디가 꼿꼿하게 서자 조명이 완전히 꺼졌다. 그 어둠, 침묵, 문득 숨이 막혀왔지만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 전에 다시 조명이 밝아졌다. 천천히 무대 위에 오른 배우의 윤곽을 드러내 보이는 조명은 붉은색이었다. 그 아래 선 카르디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으나 방금 전 그려 넣은 푸른 물감이 조명 아래에서 시커멓게 드러났다. 풀을 먹인 천들이 옷에 그림자를 그리며 실루엣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 모습을 기쁜 눈으로 바라보던 연주자는 천천히 매끄럽게 서곡을 연주했고, 그는 어딘가 일그러져 탐욕스러워 보이는 청년의 얼굴로 날카로운 대사를 읊었다. 이윽고 푸른 조명이 켜지자 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여리고 서글픈 얼굴이 나타났다. 가늘지만 뼈대가 단단한 손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카르디의 웃음, 또는 울음, 또는 분노가 얼굴 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란지에는 왜 그가 다른 배우를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 모든 옷과 분장을 갖추고 리허설에 올랐는지 생각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무대 위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는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가. 한 대사가 끝나면 조명의 색이 바뀌며 다른 이로 분했다. 대화는 쉴 틈 없이 전개되는데 두 사람은 예술가이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서로 뜻하는 바가 달라 점차로 마음이 멀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격정으로 시작되어 가벼운 웃음거리를 섞어내고, 서로의 이기심을 포착하는 대본이었다. 카르디가 그에게 리허설을 보여줌으로써 의미하던 것은 무엇일까. 본 공연이 아니라 구태여 외부인에게 리허설을 보여준 까닭은……. 카르디가 손을 움직여 그를 가리켰다.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란지에는 잡념을 떨쳐냈다. 그래, 지금 이 순간 무대 바깥에는 세상이 없었다.
카르디는 감정이 물씬 올라 채 가라앉지 못한 눈으로 조명의 시간을 지시하고 무대 동선을 조정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데도 카르디는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양인지 대사의 길이와 호흡을 줄이며 대본의 글자를 죽 그어나갔다. 모든 작업은 조금의 지연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란지에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났으나, 그들 모두가 일에 몰두해 있는 탓에 사실은 그저 말없이 극장을 걸어 나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란지에는 극장 앞에 나와 섰다. 하늘에는 여전히 태양이 떠 있었지만 햇빛은 훨씬 부드러웠다. 극장의 시간은 외부와 현저하게 다른 시간대를 가진다. 시간의 편린을 잘라 덧붙여 어느 현실의 저녁으로 옮겨오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결코 경험하지 못할 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반복, 죽는 이는 매일 죽음을 반복하고 슬픔을 반복하고 누군가는 환희를 맛본다. 막스 카르디에게 도망해야 하는 바다 깊은 곳은 필요치 않다. 어딘가로 떠날 필요도, 그의 기억 속에 친구로 남아 있던 자들도……. 그의 영원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반면 란지에는 언젠가 제 삶의 소유권을 놓았다. 타인의 목숨을 감히 쥐고 흔들려 했던 대가로 자발적으로 내려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자기 생에 만족하고 있는가. 감히 평안을 꿈꾸는가? 그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던 것은, 그가 그 자신을 용서하지 않음에서 기원했다. 카르디에게 진실 운운한 것은 단순한 위악인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내려놓음으로써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인가.
극장 거리 저편에서 리체 아브릴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뜰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란지에는 똑똑히 기억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굴었는데. 그는 어쩐지 불안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분명히 란지에를 발견했는데도 모른 척 눈길을 돌렸다. 어느 극장의 골목 틈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은 멀었다.
7. 유예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카르디에 관한 것이야?”
“그래. 언젠간 그에 관한 소문이 켈티카까지 퍼지겠지. 그가 이곳에 머무르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만…… 이 일을 함구할 수는 없을까.”
“의회에서 우리를 반역자로 간주할 거야. 고문실을 벗어나면서 해명해야 했던 것들. 그 사실은 잊히지 않았을 테고. 무슨 일을 해냈든 그건 여전하다. 그 혐의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어?”
“필요하다면.”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들었을까.”
“단지, 우리가 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그의 시간을 유예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무엇도 물려받을 수 없고, 무엇도 물려줄 수 없는 자이니. 그 정도는 허용되었으면 해.”
“우리가 했던 일들. 후회하는구나.”
“너는?”
“후회할 자격이라도 남아 있을까. 나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 돼. 그건 결코 나 혼자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지. 죽은 자들에게 참회해보았자 산 자의 만족밖에 더 되겠어?”
“너는 언젠가 네 존재 자체로 죄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
“기억나.”
“우리가 바라는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이 도래할 때, 우리는 어떤 심판을 받을까.”
“결코 피해갈 수 없을 테지.”
“바라지도 않고. 란지에, 그때까지, 네 존재의 죄를 내가 나눠 가지면 안 될까.”
“…….”
“그러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봐도 돼.”
“잠시 동안.”
“그래.”
“……함구할게. 카르디의 일.”
“정말?”
“그 결과까지 함께, 떠안기로 하지.”
8. Epilogue
이틀 동안 각기 다른 공연을 보이면서 어느새 입소문을 탄 것인지, 공연 시간이 아직 두세 시간은 남았는데도 극장은 표를 미리 사두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관객뿐 아니라 주변 극장의 배우나 기술자들도 섞여들어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놓아댔기 때문에 거리는 북새통이었다. 덕분에 극장주는 입술이 찢어지도록 웃음을 숨기지 못했고 표를 예매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겠다며 난리를 쳤다. 바깥의 소란 때문에 리허설은 순조롭게 진행되다가도 고함 소리에 번번이 끊기기 일쑤였고, 연주자는 긴장한 듯 손이 꼬였으며, 오직 카르디만이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함을 호소했다. 결국 어영부영 말을 맞추어 간단하게 연습을 끝낸 그들은 평소보다 신속하게 무대를 정리하여 극장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카르디는 심지어 극장 좌석을 철거하고 전부 입석으로 공간을 채우면 이전의 세 배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며 호들갑을 떠는 극장 주인을 만류하기 바빴으므로 연주자보다 뒤늦게 극장을 나섰다. 좁은 골목 사이에 리체가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브릴 양.”
그날 밤 리체가 자리를 뜬 이후로 사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극장에 들러 의상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를 제외하고 리체는 홀로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혀 작업했다. 그런데도 그를 찾아온 것은, 눈을 피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카르디는 그가 금방이라도 떠나겠다고 말해올까 두려웠다.
“미안해요. 그때 그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당신이 조슈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리체의 말투에는 여상함이 묻어나왔다. 꼭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겠냐고 물어오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나 카르디는, 리체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다그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귀담을 자세가 되어 있다는 몸짓.
“…그는 내 대적자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할 사람이지요.”
한숨을 쉬듯 웃음이 흘렀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참을 수 없이 질투심이 들지요. 한때는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닌 친구, 부모님, 집, 이름. 물론, 나는 내 새로운 아버지가 있고, 내 이름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비로소 그와 내가 분리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했나요?”
“맞아요. 내가 당신을 끌어들여서 여전히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어떤 식으로든 증명해야 해요. 내가 조슈아와 다른 존재임을. 그 대상은 당신이 될 수도, 내가 될 수도, 조슈아가 될 수도 있지요.”
“난 당신이 조슈아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꼈어요.”
그들은 잠자코 극장 앞의 소란을 들었다. 리체는 어쩌면 이미 답을 내렸고, 그 과정을 모두 받아들였을 수 있으나, 그의 입으로 들어야만 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원하지도 않아요. 어쩌면 우리가 비로소 서로를 대면한 순간, 우리가 같은 존재였다면 그대로 미쳐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조슈아는 당신과 막시민, 켈스,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만나며 그만의 고유한 시간을 살아냈지요.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요. 내가 기억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합니다. 오래도록 타인의 간섭 하에 있었고, 예기치 못한 잠에서 깨어난 후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지요. 내게 남은 것은 조슈아가 남긴 이름뿐이에요. 이름이 있어 나는 배우가 되었고요. 나는 우리 대결의 시작점에서 멀리 여행을 가야 해요. 그 과정에서 내가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내가 존재함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이기심에서 기인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게 당신이 된 것도 유감이고요.”
“내게 사과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나를 보고 조슈아가 떠올라 힘들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리체는 한없이 부드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르디를 마주했다. 만약 지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면 카르디는 순순히 보내줄 터였다. 그의 본성이 조슈아와 같다면 그는 더없이 정중하게 자신을 배웅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다정한 사람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리체는 데모닉이 그 뛰어난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알지만, 그 악마적인 재능만이 그들을 구성하는 본성이 아님을 알았다.
“도울게요. 당신이 더 이상 누군가의 인형으로 남지 않게.”
또 한 번 만용을 저지르는 것일까. 언젠가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그럼에도 그가 눈이 부시도록 짓는 미소에 가슴이 저려왔다. 불명확한 기대가 리체 아브릴의 눈앞에 있었다. 리체는 자신의 손으로 그 기대를 쥐었다. 책임도, 결과도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큰 무언가를 얻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공연에 앞서 이엔과 란지에가 극장을 찾았다. 그들이 칼라이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리체는 여전히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카르디를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 사람들. 책임을 짊어진 채 돌아서는 사람들. 이별은 무미건조했고 흔하디흔하게 뱉는 아쉬움의 언사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가벼이 악수하는 것으로 그 순간을 마무리했다. 카르디는 공연을 보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상회에서 알면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연되었으니까요.”
카르디는 어깨를 으쓱였다. 란지에는 극장을 나서기 전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의외네요. 나를 싫어하지 않았던가?”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리체는 이엔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는 그대로 사라지도록 두지 않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마란스 씨. 가끔은 가족에게 연락도 해봐요.”
그는 느리게 돌아섰다.
“네, 그럴게요.”
이제는 공연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오늘 카르디가 입어야 하는 의상은 소매가 없는 로브였다. 치수도 한 품은 컸고 천은 묵직해 카르디는 하나의 회색 덩어리처럼 보였다. 마법사 역할이라도 하는 걸까, 바닥으로 늘어져 끌리는 밑단이 무대의 먼지를 한데 모으지만 않으면 다행인 셈이었다. 꽁꽁 싸매 몸을 숨긴 모습에 이게 무슨 의상이냐고 불평하면서도 리체는 여전한 마음으로 실을 꿰고 천을 이었다. 촘촘한 바늘땀이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 그것이 리체의 마음이었다. 치밀한 조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손끝의 힘은 오직 바늘에만 가닿았다.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건만 의상을 입고 분장하는 내내 리체는 그의 곁에 있었다. 카르디는 능숙하게 제 얼굴 위로 힘을 불어넣었다. 오늘의 그는 항해자였다. 혀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재담꾼이었다, 내일을 엿보는 사제이며, 무엇보다도 깊은 비밀을 간직한 배우였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조금 상기된 기색으로 분장실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왔다. 객석이 꽉 찼고, 결국 극장주의 바람대로 몇 사람이 입석으로 극장에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오늘 자리를 차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모른 채 호기심으로, 기대로 차 있었고 누군가는 소문이 단순히 허황되었음을 증명하러 나타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이 올라가고, 카르디가 등장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무대의 주인을 지켜보는지. 하지만 그는 이 순간 이후 그들이 한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을 알았다. 카르디가 팔을 뻗자 망토 안에서 갈라지고 짓무른 그의 팔이 드러났다.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리체는 조명 아래에서 그의 붉은 살이 불타듯 빛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다. 손짓을 따라 바이올린이 서곡을 연주했다. 그는 무대를 움직이는 신이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악마였다.
리체는 카르디가 무대 위에서, 배우로서 겪는 수많은 생들로 그의 운명에 흠이 생기기를 바랐다. 파도에 수천 번 부딪힌 유리조각이 매끈해지는 것처럼. 죽음도, 광기도 다듬어진 채 결국 진실이라 생각한 운명을 거스르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