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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얀 손가락이 붉은 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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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얀 손가락이 붉은 실로

겉단과 안단을 붙여 잇는 동안

내 마음조차 그대에게 이어버린 걸 아오?

 

지긋한 목소리에 리리오페는 교묘히 하품하는 입을 가려야 했다.

하지만 교사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웃는다. 아버지의 체면과 위치를 생각해서라도, 그래야 하는 만큼은 좋은 학생이었다. 엄청나게 성실히 교사의 말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적당히 수업을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구태여 소란이라도 피워서 눈에 튈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가 주목을 받는 건 동쪽에서 해가 뜨는 이치만큼 당연했다.

 

당신의 고운 손가락이 은빛 바늘을

솔기와 시접에 찔러 넣는 동안

내 마음조차 잔인하게 찔러버린 걸 아오?

 

그 시가 얼마나 시시하고 지루한지와 상관없이 리리오페도 아주 잠깐 그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보긴 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매혹하는 미모, 정교한 나머지 구분할 수 없는 가짜. 정말 오늘 밤 자기도 전에 잊힐 것 같은 내용이다. 지금은 소실된 마법에 대해 알아봤자 무엇에 쓰겠는가? 리리오페는 대륙의 말로 하자면 현실주의자였다. 잘 모르겠는 옛 영광에 매달려서 하는 일들에 비해 섬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 공주님에게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대화도 나누어본 적 없는 여자에게 그렇게 연연해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인형이 아니라 살아있는 여자라고 쳐도, 창 밖 너머로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미련이 많은 건데?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표현으로 알아서 잘 알아들었어야지 …. ’

 

리리오페는 연애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연애나 사랑. 남녀 사이에 염문이나 하는 것들. 그러니 대해서 진심으로 그런 감정을 믿는 사람들을 전부 바보 같았다.

예를 들자면, 헥토르를 보고 뺨을 붉히는 소녀들이 있었다. 정작, 헥토르와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리리오페는 그를 보아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그러니 그런 감정은 쓸데없는 것이겠지.

석판에 끼익거리는 소리는 바다새가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 다. 매일 엇비슷하던 일상적인 광경이 앉아있는 한 명의 존재만으로 조금 일그러진 것 같다. 그는 뜻밖에 흥미가 있는지 수업에 꽤 몰입해서 듣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긴장을 풀지 않아서인가 싶었는데 쭉 진지한 얼굴이었다. 실은 진지한 표정은 익숙했다. 모두가 섭정의 딸인 자신을 어려워한 나머지 나머지 장난을 칠 상대가 나우플리온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프넨의 경우엔, 원래 천성이 그랬다. 리리오페에 대해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다는 점이 리리오페가 알던 모두와 차이점이었다.

그래서 리리오페는 나우플리온을 따라온 그 소년에게 눈이 갔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아니 누구처럼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는 점을 더 높게 샀다.

 

다프넨은 그런 소년일까? 인형이 바느질하는 손끝을 끝까지 멍하게 바라보기만 할 것 같은, 그렇게 사랑에 쉽게 빠질 순진한 바보?

그걸 생각해보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엘비라가 자신이 아니었을 뿐이다. 다프넨이 자신이 아닌 산 위의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쯤 알아챌 만큼

신성찬트를 배우겠다는 말이 처음 꺼냈을 적에야 고집쟁이인 이솔렛에게 질려서 돌아올 줄 알았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리리오페가 개입할 틈도 없이 일어났다. 불길하다고 여기지도 못한 예감대로

 

하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나우플리온을 비롯해서 사제들이 둘의 사이를 응원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리리오페는 대륙에 단둘이 외출하라고 허락해준 사제들이 웃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제들은 아버지의 후광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끔찍이 이솔렛을 아꼈다.

달의 여왕은 아무래도 이솔레스티를 미워하는 게 분명했다. 확인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나우플리온을 만나기 위해 몰래 빠져나온 건 어렸을 때 처음이었다.

 

“...그럼, 그 애는 돌아와선 이솔렛 하곤 한 번도 안 만난 거예요?”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래.”

 

최근 나우플리온의 얼굴은 옛날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폭삭 늙었다. 그렇지만 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섬에 돌아온 이후 검의 사제다운 위엄을 갖추려고 노력해 엄숙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그가 장난기가 넘치는지 알고 있는 리리오페는 그런 모습이 껍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차기 섭정으로서 위엄을 내보이고 있는 리리오페도 내심 말괄량이의 기질이 살아있긴 했다. 적어도 나우플리온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뭐가 문제인지 말해 볼까요?”

“뭐?” 나우플리온은 갑작스러운 참견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예전답지 않게 진지하게 구려는 모습을 보면 그는 어딘가 씁쓸해 왔던 것이다. 리리오페가 나이가 들어가며 차츰 아버지의 흉내를 무섭게 낼수록 더욱 그랬다. 자신에게 닥칠 재앙은 아니지만 무언가 단단한 의지 같은 것이 그녀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여자가 되면 달라졌다. 마을 천덕꾸러기의 대명사였던 그에게는 한 가지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호두나무 선생으로 있을 시절 벨노어 백작 가의 장미 아가씨 앞에서 괜히 폰티나 가의 아가씨를 들먹인 것처럼, 콧대 높은 여자아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었다. 리리오페에게 괜히 이솔렛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도 같았다.

심각한 실수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지만 굳이 지금 깨닫고 있었다.

 

한편 리리오페가 장난꾸러기 나우플리온의 옛 모습은 검의 사제답지 못했다. 단지 마냥 재미있게 어울려 놀던 시절을 잊어야 할 철없는 시절?

“그야, 검의 사제께서 이솔렛을 신경 쓰고 있으니까 그렇죠.”

 

사실 리리오페와 이솔렛과 같이 대화라도 한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내가?”

 

과장된 되물음은 여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리리오페가 언제나 이솔렛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느낀 건 나우플리온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쁘다’는 평가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확실히 듣는 데 걸림돌이 되기 전에, 그녀 아버지의 죽음에 섭정인 자신의 아버지가 연류되어 있다는, 적어도 이솔렛이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한다거나 그런 상스러운 원망따위.

“네 눈도 예리해졌구먼, 들켜버린 건가.”

 

“다들 전대 검의 사제를 생각해서 이솔렛을 딸처럼 생각했잖아요. 저는 이솔렛이 그렇게 무엇인가에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줄도 몰랐는데..”

 

상스러운 소문은 헥토르가 악의적으로 잡은 트집이긴 하지만 리리오페가 보기에도 이솔렛과 다프넨 사이에 무언가 일어난 것 같긴 했다. 다른 사제들도 스승이자 보호자에게 귀띔해본 것 같지만 나우플리온은 어떤 소문도 부정하지 않았다. 리리오페도 오늘 사실 꾹 닫힌 입에서 더 말을 들으려 채근해 보려 찾아온 셈이었다.

 

“대륙도 같이 다녀와 주면서, 그런 사이이기도 했는데 이제 헤어지게 된 이상, 괴팍한 성격에, 평생 시집가긴 글렀으니까. 지금 그 점이 걱정되는 게 아닐까.”

 

실제로 이솔렛에 대해서 들은 것 말고 직접 그녀를 접한 적은 없었다. 리리오페에게 이솔렛의 그림자가 생생히 느껴지던 건 예전에는 나우플리온 때문이었다.

‘아, 미안. 이솔렛은 좋아하던데’ 같은 말을 무심하게 흘리던 누구 때문에.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주근깨 아가씨, 너… 이솔렛의 혼사를 걱정해 줬던 거냐?”

 

부모를 여읜 사람이 이 세상에 자신뿐인 것처럼 항상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멋대로였다. 리리오페가 판단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 그래. 적어도 외모에 대해선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퍽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대륙에 다녀온 뒤로 둘의 사이는 멀어졌다. 다프넨도 유치한 고집쟁이인 그녀의 본성을 깨달았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검을 다룬다고 나서는 모습에 질렸거나, 다프넨이 검의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자신 때문이니 고마워하라고 강요했거나…. 리리오페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정도였다.

하지만 이유 따윈 상관없었다. 대륙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리리오페에겐 유익했으면 되었다.

리리오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아무튼, 이제 다프넨이 차기 검의 사제라는 건 정해지다시피 한 사실이죠?.“

 

실버스컬은 대륙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한 경사였다. 원래는 헥토르도 있었지만, 같이 실력을 겨루어 본 이번 계기로 대륙 출신이라는 걸림돌은 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워낙 훌륭한 스승을 둔덕이지만.”

 

그게 리리오페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더라도 나우플리온의 자랑은 눈감아줘야 했다. 단지 이번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제자에 대한 자랑스러움인데다가 이솔렛의 화제에 대해서 멀어지고 싶어하는 의도가 눈에 선히 보였다.

 

“그거 좋네요, 축하해요”

 

“.... 날 너무 닮아서, 여자한테도 관심이 없을 줄 알았건만”

여자라는 언급으로 리리오페는 뭔가 속에서 들끌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색시를 구해보던가요, 좀 많이 징그럽긴 하지만“

리리오페는 혀를 내빼고 도망치듯 나우플리온의 집을 나섰다. 사실 다프넨이 소문처럼 이솔렛과 멀어졌다는 걸 확인하는 게 방문한 원래 목적이었다.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해서, 나우플리온에게 다프넨을 가지겠다고 보고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나우플리온같이 본성이 유한 사람이 다프넨을 휘어잡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 점은 이해했다. 리리오페도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딸이라고 하기엔 자기 의사를 펼치지 않았던가.

 

그를 가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해서 아버지의 힘을 빌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리리오페가 생각하기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스콜라를 졸업하게 되면 그와 만날 접점도 사라지게 된다.

검의 사제 자리를 물려받게 되거나 그 전에 아버지는 혼사를 거론하겠다고 리리오페에게 약속했다. 섬의 섭리대로 당연히 다프넨은 감히 섭정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성이 차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간곡하게 아버지에게 부탁하면서까지 정한 일인데, 그저 아버지의 뜻이라는 식으로는 전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의사라는 게 확실히 전달되기 위해서 그녀는 선물을 준비했다, 그녀가 찍접 건내어 줄 너그러운 관대함.

 

그래서 그날은 확신에 찬 채로 맞이한 파란(波瀾)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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