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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테오이브]

GMBU

“테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희미하게 부유하던 의식이 귀를 기울였다. 곧 아기새처럼 작은 손이 그의 가슴위로 내려앉았다.

 

“얼른 일어나, 아침이야. 오늘 바다에 가자고 했잖아.”

 

맑고 명료한 발음과 달리 어린 아이의 것처럼 순진한 태가 묻어나는 말투였다. 가볍고 보드라운 감촉이 퍽 간지러워 무심코 입꼬리를 움찔거리던 남자는, 답지 않게도 조금쯤 심술이 났다. 비취반지 성을 떠나 블루코럴 섬의 별장에 도착한 지 겨우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그의 약혼녀였고 이제는 아내가 된 이브노아 폰 아르님은 며칠 전부터 외딴 시골 마을 어딘가로 보내진 그녀의 동생이 보고 싶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고, 그 작은 난동은 어제 절정에 달했었다.

영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기대보다도 빨랐고, 더 집요했을 뿐이었다. 하긴. 십 년이 넘도록 지속되어온 약혼이었다.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일 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일상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새삼스레 자신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녀의 우선순위가 동생에서 남편으로 바뀌지는 않을 터였다. 사실 그로서는 그녀가 약혼이나 결혼 따위가 갖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나 하고 있는 지부터가 의문이었지만.

 

삐뚜름한 내심을 능숙하게 숨긴 그는 난처한 낯을 한 고용인들을 따라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반투명한 휘장이 내려진 침대 위에 오리처럼 입술을 내민 채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브. 불리는 이름에 그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까만 눈에는 이미 구슬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뭐가 그리도 서러웠을까? 호화로운 이국의 별장과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가문의 고용인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그녀는 이 작은 성채 안에서 진짜 슬픔이 뭔 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오롯이 갖지 못한 건 그녀의 동생 하나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원하는 것이 그 뿐인 것일 수도 있었지만. 누가 뭐라해도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오랜 연원의 열등감이 순식간에 가지를 뻗쳐 나가기 시작하자, 그는 고개를 저어내 그 모든 감정들을 능숙하게 갈무리했다. 시커멓게 꼬인 속과 달리 평온한 낯을 한 채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든 테오는 부드러운 손길로 이브노아의 젖은 뺨과 눈가를 닦아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칭얼거리기 시작했을 텐데, 그녀는 마치 손길을 거부하듯 팩하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이번엔 정말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앉은 그는 애꿎은 시트를 비틀어 대는 그녀의 손등 위를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애써 그를 외면하고 있던 이브노아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알아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건 두 사람 사이에 나누는 일종의 신호였다. 테오는 늘 그녀가 흥미로워 할 만한 것들을 몇 가지 씩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선물할 때마다 지금처럼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곤 했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흘끔 돌아보는 시선에는 아직까지 희미한 경계심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브노아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이런 순간들이 있어왔다. 테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치 중대한 비밀을 나누는 것처럼 속삭였다. “바다로 놀러 갈까?”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애타게 동생만을 찾던 이브노아는 마치 생전 처음 듣는 단어라도 접한 마냥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다?”

“응. 여기서 아주 가까워.”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듯 젖은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던 이브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다리를 살짝 흔들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주의가 흐트러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푸르름과 발이 폭폭 잠겨 드는 푹신한 모래사장, 아노마라드의 것과는 사뭇 다른 하이아칸의 따가운 햇볕. 또한 이브노아가 좋아하는 창이 넓은 모자에 긴 리본을 달자 거나, 귀여운 레이스로 소매를 장식한 노란 원피스를 입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브노아에게 몇 번이고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마침내 이브노아는 그가 펼쳐 둔 세상에 홀딱 빠져들었다.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소풍을 앞둔 어린애처럼 들떠 잠들지 못할 지경이라는 게 작은 문제였지만. 덕분에 그런 그녀를 재우느라 그 또한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잠들고 말았다.

 

그러니 자신에게도 이 정도의 심술을 부릴 자격은 있지 않을까? 그는 자꾸만 떠지려는 눈꺼풀에 애써 힘을 주었다. 가만히 호흡을 고르며 자는 척을 하고 있자니, 이내 가슴팍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이 자신을 가볍게 흔들어 댔다. 몇 번이고 노래하듯이 테오, 테오~ 하고 제 이름을 연이어 불러 대던 목소리에 점차 불만과 의아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이제껏 이런 장난은 쳐 본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다. 백치인 공녀와 결혼한 가난한 집안의 귀족 남자. 그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자신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십년이 넘는 지난 세월동안 이브노아 폰 아르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성실하게 지켜온 사람은 그녀의 부모 혹은 그 잘난 데모닉도 아닌 겨우 ‘테오스티드 다 모로’라는 것.

 

어느 순간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이브노아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크게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여전히 제 곁에 있다는 사실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지만 눈을 감은 채 알 수 있는 건 또한 그 뿐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정신연령이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이브노아는 눈 깜짝할 새 엉뚱한 사고들을 칠 때가 있었고, 이 별장의 사용인들은 아직 그런 작은 안주인을 돌보는 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니까. 잠깐 사이 이브노아가 기척을 지우고 침실에서 빠져나간 거라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라면? 잠깐 사이 그의 머릿속에 수십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나려는 순간.

 

“…아파? 테오, 아픈 거야?”

 

살며시 내려앉은 손길이 어색하게 이마를 짚었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프면 안 돼. 아프지 마.”

 

기분 탓일까?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조곤조곤 읊조리는 다정한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미지근한 온기가 맺힌 손끝은 관자놀이를 지나 뺨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이브노아가 훑고 지나간 궤적을 따라 화끈거리며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뜬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까맣고 고요한 시선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사람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 놀랄 법한데도, 그녀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 테오, 일어났다.”

“…이브.”

“목소리가 이상해. 테오, 아파? 감기 걸렸어?”

 

자다 깨어 반쯤 잠긴 목소리가 낯선 듯 이브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심스럽지 못한 손길이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훑어 내렸고, 이내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아파? 응?”

“…안 아파. 조금 피곤한 거야.”

“그래? 안 아파? 정말로?”

“응. 정말이야.”

“다행이다.”

 

몇 번이나 재차 묻고 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미소 짓는 얼굴에, 테오는 무심코 넋을 놓았다. 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지는 장밋빛 뺨과 그림자를 드리우는 긴 금색의 속눈썹,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작은 입술까지. 10년이 넘게 매일같이 보는 얼굴인 데도 매번 처음 만났던 그 날 같았다. 특히 그녀가 자신을 향해 지금처럼 미소 짓는 몇몇 순간 테오는 터무니없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어쩌면,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지 모른다는 착각.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의 애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치라 하여 애정을 모를까. 하지만 그게 결코 자신의 것과 같은 결이 될 수는 없으리라. 그는 손을 뻗어 차양처럼 드리워진 이브노아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평생토록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워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이브."

"응?"

 

자신을 내려다보는 말간 시선에, 그는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볼 수 있는 표정이었고, 그렇기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얼굴. 하얀 손을 끌어와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이브노아는 까르륵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러워, 테오."

"...사랑해."

 

소리 없이 달싹이던 입술에서 새어 나온 고백에 가장 놀란 건 그 자신이었다. 이제껏 단 한번도 꺼내 본 적 없이 꽁꽁 숨겨두기만 했던 진심이 예상치 못한 순간 넘쳐흘렀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이브노아는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이 또한 착각일 것이 분명했다. 슬퍼 보이다니. 그녀가 제 고백에 담긴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떨어진 단어들을 주워섬기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뭐?"

"나도 테오를 사랑해."

 

티끌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당연하다는 듯 따라오는 대답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녀의 사랑한다는 말이 자신의 것과 결코 같은 무게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알면서도 그런 그녀를 속절없이 사랑해버리고야 마는 스스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미소지은 입술 끝을 매만지자, 이브노아는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바닥 위로 뺨을 부볐다. 작은 강아지 같은 그 행동에 빳빳이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도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이브노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킨 그는 침대 옆 탁자에 놓여있던 얇은 겉옷을 어깨에 걸쳐주었다.

 

"출발하기 전에 유모에게 가서 모자에 리본을 달아 달라고 해야겠네. 저번에 사 왔던 파란 리본은 어때?"

"으음~ 난 빨간색이 더 좋은데."

"그럼 가서 직접 골라보자."

 

자신과 같지 않아도 좋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도, 그녀 본인조차 평생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테오스티드 다 모로는 이브노아 폰 아르님을 사랑했다. 그건 그녀를 처음 만났던 열 살 소년이었을 적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변한적도, 흔들린 적도 없는 사실이었다.

의도적인 화제 전환이었지만 이브노아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못했다. 그는 새로운 흥밋거리에 신이 나 복도로 달려나가려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이 따뜻하고 작은 손과 함께 오늘은 해변을, 내일은 정원을, 그리고 평생을 함께 살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브노아가 원치 않는데도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이윽고 그는 그녀의 작은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햇빛이 쏟아지는 복도로 걸어 나갔다. 어느 평범하면서도 특별했던, 결국엔 한 사람만이 추억하게 될 어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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