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원
눝
네 소원을 이루어주지.
"나는 소원이 없어."
소원 없는 인간은 없어.
"나는 소원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어."
과연 그럴까.
**
아, 배고파.
루시안은 다시 한번 몸을 뒤척이며 고민했다. 눈을 뜰까, 말까. 보리스가 아직 깨우러 오지 않은 걸 보니 일어날 때가 안됐는데...아니, 근데 배고픈데. 시간이 꽤 늦은 거 아냐?
눈을 슬쩍 떠보니 과연 방안이 밝았다. 어제는 내내 비오고 흐리더니, 오늘은 말끔히 갠 것 같았다.
휴일이라도 너무 늦잠자는 건 좋지 않다며 적당한 시간에 아침 먹으러 가자고 문을 두드리던 보리스인데...
앗,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혹시 어디 아픈가?
루시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까치집이 된 머리와 잠옷차림 그대로 굴러나가 친구의 방을 두번 두드리고 벌컥 열었다.
"보리스? 아직 자?"
과연 볼록 솟아있는 이불 밖으로 검푸른 머리칼이 흩어진 것이 보였다. 루시안은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자? 혹시 어디 안좋...으엥?"
부스럭, 돌아누운 이의 얼굴을 본 루시안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어...저..."
졸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깜빡여 이제 제법 동그랗게 뜬 두 눈은 분명 친숙한 회청빛이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동그란 코끝, 말랑말랑해보이는 볼.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제 몸만한 검을 꼭 끌어안고는 경계하듯 묻는 어린아이를 보고 루시안은 멍청히 되물었다.
"너...는 누구세요...?"
...혹시 보리스에게 아들이 있나?
"절대 아니지. 보리스가 여덟살에 애를 가지지 않은 이상."
루시안의 가설은 막시민의 한마디로 명쾌하게 부정되었다.
"딱 봐봐, 애가 적어도 열살 쯤은 돼 보이잖아."
"아, 그런가?"
열살이 저렇게 쪼끄매? 사실 애들이 몇 살에 어느 정도 큰지 루시안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열한살인데요."
도토리빌라의 1인 소파에 바른 자세로 앉아 눈만 굴리고 있던 꼬마가 사실을 정정했다.
"아, 그러냐? 열한살이래. 숯가마 동생 있냐?"
"없어, 형 밖에 없다구."
"또 모르는 일이다. 너한테 얘길 안한 걸수도 있고, 숯가마도 모르던 동생일 수도 있지."
"그게 어떻게 가능해?"
"세상엔 별 일이 다 있는데 모르던 동생 정도야. 아버지가 어디 다른데 낳아뒀나 보지. 남자는 씨만 뿌리면 장땡이라 모를 수도..."
"너는 애가 듣는데 별 소리를 다!"
"아니, 쟤도 모르던 형을 찾아온 거면 알 거 다 알고 있지 않겠느냐고."
"우리 형을...알아요?"
"응, 알지. 우리는...어, 네 형 친구들이야. 친한 친구."
"진짜요?"
긴장한 듯 온몸에 잔뜩 들어간 힘이 그 한마디로 풀리지는 않았지만, 잔뜩 굳은 표정에 한가닥 안도가 스쳤다.
"그럼 형이 날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어? 어..."
얘가 지 혼자 들어올 수 없었을테니, 보리스가 데려왔겠지?
"형은 어디 갔어요?"
"어, 그러게..."
아무것도 모르는 애만 덜렁 지 침대에 뉘여놓고, 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야.
혼자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아침밥이라도 먹으러 간건가.
제발 보리스가 돌아와 이 상황을 정리해주길 바라며 막시민이 어떻게든 진행을 맡았다.
"그래서 너는 이름이 뭐라고?"
달칵.
빌라 문이 열리는 소리에 거실의 세 사람 눈이 동시에 문고리를 향했다. 드디어 왔나?!
"에이..."
그러나 하늘빛 머리의 호리호리한 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막시민이 대놓고 실망한 소리를 냈다.
란지에는 조용해야 할 주말 아침에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약간 당황했다.
"무슨 일로 다들..."
깜빡. 깜빡깜빡.
소파에 앉아 바닥에 닿지도 않는 다리를 달랑거리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작은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란지에는 눈을 빠르게 몇 번 더 깜빡였다.
"어...보리스...? 이게 대체 무슨..."
아이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내 이름을 알잖아, 정말 형 친구들인가봐.
아이는 폴짝 뛰어내려 서서는 공손하게 배운대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보리스 진네만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질반질한 머리통을 감상하며 보리스 진네만의 세 룸메이트들은 말을 잃었다.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눈을 도록거리던 아이가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언제 오나요?"
"얘가...보리스라는데...?"
루시안이 중얼거리는 새 란지에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꼬마와 눈을 맞추었다.
"응, 보리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 아이는 보리스와 똑같이 생겼다.
그러니까...아주, 아주 많이 닮아서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설이 갑자기 어려졌다는 설보다 설득력이 없을 정도로.
약간 더 어린가 싶기도 했지만, 기억 속 벨노어성에서 처음 본 열두살 소년의 모습과 거의 일치했다.
다만...
"예프넨 형은...어디 좀 멀리 갔거든."
이 눈빛만은.
제 형의 이름이 나오자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솔직한 반응이.
"어딜요? 올때까지 형들이랑 놀고 있으래요?"
처음 보는 상대의 말이라도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버리고 마는 순진무구함이.
세상의 흉한 것은 담아보지 못한 것만 같은,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은은하고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두 눈이.
아직 다쳐보지 않은 보리스의 어린 모습이 너무도 낯설어서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꼬르륵
때마침 울려퍼진 소리와 함께 꼬마의 귀끝이 붉어졌다.
"아, 배고프다! 좀 있으면 식당 닫는데!"
잊고 있던 허기가 덩달아 도진 루시안이 소리쳤다.
"우리 아점부터 먹자."
**
짙은 먹구름이라도 끼었는지, 창을 열어두었는데도 달빛도 별빛도 스며들지 않고 그저 먹먹한 밤공기만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방 안은 어둡지는 않았다. 하얀 검신이 소복이 내린 눈이 달빛을 반사하듯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소원을 이루어주지.
"나는 소원이 없어."
소원 없는 인간은 없어.
"나는 소원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어."
과연 그럴까.
반드시 이루고 싶은 것이 소원이지.
"나는 지금이 만족스러워."
보여줄까.
네가 원하는 것.
더 이상 은은한 반사광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검이 내뿜는 빛이 순식간에 강해졌다. 보리스는 빛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다급히 창을 닫았다. 그새 방안을 가득 채운 빛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뻗어 더듬어 검집을 찾아 쥐었다.
작작해. 네 주인은 어디까지나 나야.
예상과 달리 검은 어떠한 반항도 없이 검집에 부드럽게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리스는 당황했다.
"여긴..."
분명히 도토리 빌라의 침실에 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방이었다.
조금 전까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소리내어 혼잣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가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남의 방에 쳐들어온 듯한 기분에 숨죽여 빨리 빠져나가야 할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남의 방은 아니었다.
곧 그 사실을 눈치 챈 보리스가 더욱 당황했다. 기억보다 침대가 많이 작기는 했다. 침대 뿐 아니라 경대와 책상 또한 꽤 작아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정리정돈을 해준지 오래 지나지 않은 듯 깔끔했고, 먼지 따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릴 적 쓰던 방이었다.
보리스는 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보고 이 곳이 진네만 저택의 둘째 아들 방임을 확인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왜?
손 안의 윈터러를 노려보았지만 검은 천연덕스레 무생물로서의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즉,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집에서 뽑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보리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방안에 하염없이 있어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다가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누가?
나는 누구를 기대하고 있는 거지.
쿵, 쿵, 쿵.
거센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이것이 윈터러의 장난이라면, 그를 이리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누구냐."
서늘한 목소리에 등골이 짜릿해졌다.
"여기...!!"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보리스는 곧바로 소리치는 입을 틀어막는 동시에 자신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내의 무릎 뒤를 차서 꺾고 목에 팔을 휘어 감았다.
"읍!"
강한 저항이 느껴지자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야할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도무지 꿈에서라도 검을 겨눌 수는 없는 상대였다. 그래서 보리스는 상대의 귓가에 대고 절박하게 속삭였다.
"형, 형 잠깐...제발. 조용히. 예프넨 형."
마침 구름이 걷히는지 어두운 복도에 푸르스름한 빛이 쏟아져들어왔다. 연갈색 머리칼에 흐릿해져가던 이목구비가 그리던 모습대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보리스는 코앞에서 크게 뜬 푸른 눈을 마주보게 되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 속에는, 열여덟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쉿. 소리만 치지 말아줘. 다 설명할 테니까."
품안의 움직임이 잦아들자 보리스가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공격의 의사가 전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양 손을 허공에 쫙 펴 보인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야, 그에게나 꿈에도 그리던 반가운 모습이지, 상대에게는 한밤중에 집에 침입한 괴한이...
"보리...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고개를 젓더니 중얼거리는 소리에,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
"우리가 키우는 개의 이름은?"
"말로리."
"얽힌 사랑 전설을 이야기해줬던 꽃 이름은?"
"한 두 개가 아니잖아, 형."
볼멘소리에 취조하듯 가늘게 눈을 뜨고 묻던 예프넨이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왜 꽃 얘기는 다 슬프냐고 물었던 거."
"유리안느."
이쯤되면 이미 마음으로는 믿고 있는 게 아닌가. 마지막으로...
"암호."
다짜고짜 던진 말에 아버지를 지독하게도 닮은 청년은 살짝 주먹을 쥐고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똑 또똑 똑!
"진짜...신기하네."
어린 동생과 장난처럼 정한 침실 출입 암호의 리듬이 경쾌하게 울려 퍼지며, 이미 허물어져가던 경계심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세상에, 보리스. 너 정말..."
둑이 터지자 밀려오는 것은 그저 경탄과
"키가 엄청 컸구나?"
묘한 뿌듯함이었다.
"일어나 봐봐. 네가 지금 몇 살이라고?"
"열여덟."
"세상에."
예프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빙빙 돌다가 제 머리 꼭대기와 동생의 머리 꼭대기를 손바닥으로 번갈아 가늠했다.
"키가 뭐 똑같은 거 같은데? 아직 나보다 어린데. 난 우리 꼬마가 이렇게까지 커질 날이 올 줄 몰랐지!"
키가 똑같았구나.
보리스도 그런 줄 몰랐다. 형은 정말 훤칠했으니까, 막연히 형이 더 클 줄 알았다. 항상.
"자, 좋아. 네가 우리 꼬마...는 아니지만 내 동생 보리스라는 건 알았으니까, 이제 설명해 봐.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갑자기 하루아침에 나이를 일곱 살이나 더 먹어버린 거야?"
"아니, 그렇다기보다는...이동? 한 것 같아. 나는 그냥...열여덟 살이었는데. 갑자기 지금으로 되돌아왔어."
"그럼 보리스는? 아니, 그...꼬마, 현재의 보리스는?"
예프넨이 다소 다급하게 물었다.
"네 말대로 네가 갑자기 미래에서 이동해버린 거라면...여기 보리스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방에서 못봤어? 걔도 갑자기 어딘가로 가버린 거야?"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어. 어제 걔...보리스는. 그냥 자기 방에 있었던 게 맞지?"
"그랬을 거야. 그 애가 달리 어딜 가겠어."
"그럼...아마. 내가 있던 곳으로 간 것 아닐까 싶어."
보리스가 가만히 검 손잡이를 쓸며 생각했다.
질서. 세상에 동일한 존재가 둘이어서는 안된다는 엄중한 법칙.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되며 어린 자신이 튕겨나가 본래 자신의 자리에 가게 되었다면?
"겁먹지는 않았을까?"
생각지 못한 의문이었다.
푸른 두 눈에 가득한 걱정의 기색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괜찮을까? 아직 열한살 밖에 안된 어린 아이인데...너, 혹시 위험한 곳에 있진 않았지? 집에 있었어? 아버지 집에 계셔?"
쏟아지는 질문에 새삼 깨달았다.
저와 키가 꼭 같은 눈앞의 이 사람은...완전한 보호자였노라고.
"집에 있진 않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물론 지금 이 상황만으로 충분히 걱정스럽겠지만. 음."
생존의 문제도 아니고. 고작 겁을 먹을까봐 걱정을 한다는 게 새삼 너무 간질거리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니지, 그 자신이야 야 네냐플 기숙사 방이 충분히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예프넨은 어린 동생이 언제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니까. 형이라면 충분히 걱정할 만하다. 그 애를...그러니까, 나를.
"내가 있던 곳으로 간 것이 맞다면...충분히 믿을만한, 좋은 사람들과 있을 거야."
**
꼬마 보리스가 제 손에는 약간 크게 느껴지는 포크와 나이프를 부지런히 놀려 팬케이크나 소시지, 달걀 프라이 등을 자그맣게 썰어 입에 던져넣어 오물거리는 모습에서 루시안은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우와~ 잘 먹네~ 이거도 맛있다? 먹어볼래? 아~"
루시안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음식을 찍은 포크를 내밀자 보리스가 살풋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가 먹을 수 있는데요."
"크크큭, 야 루시안, 너 밉보였다! 거봐 오버하더니."
충격받은 루시안이 울상이 되는 꼴이 못내 재밌는지 막시민은 탁자까지 내리치며 웃었다. 그야, 여기까지 오는 길에 괜찮다는 보리스를 담싹 안아들고 오던 것이 화근이 될 줄 루시안은 몰랐던 것이다. 자기보다 어린 애는 본적도, 관심도 없었던 루시안은 세상에 사이즈가 반밖에 안되는 것 같은 저 쪼끄만 생물이 지도 인간이라고 두 다리로 걷는 게 신기하고 못미더웠다. 게다가 보리스잖아! 보리스가 나보다 작잖아!
괜찮은데요, 제가 걸을 수 있어요, 내려주세요, 몇 번의 거절을 아냐~ 괜찮아~ 안 무거워~ 형아 힘 세~하는 말로 답하며 의기양양하게 보리스를 안아들고 걷던 루시안은
싫어요. 내릴래요.
라는 보다 단호하고 명확한 불쾌함의 표시에 얼떨떨하게 애를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깎인 점수를 만회하고자 보리스으~ 이거 봐라~ 콧소리를 내가며 열심히 어필 중이었으나 꼬마의 눈빛은 냉담했다.
"야, 애를 무슨 갓난쟁이 취급을 하려 드니 기분이 나쁘지. 너 열한 살 때 생각을 해 봐봐. 나름 다 컸다, 열한 살이면?"
보리스가 티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열한 살 때?"
루시안이 포크를 입에 물고 눈썹을 찌푸렸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열한 살 때를 어떻게 기억해?"
역시 열한 살은 까마득하게 어린, 인간 이전의 뭔가의 신비로운 생물임에 틀림 없어, 라는 왜곡된 확신만 강해졌다.
"어후, 저 엔젤릭..."
막시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보리스는?"
교수 심부름을 마치고 허겁지겁 달려온 티치엘이 묻자 막시민이 대답했다.
"루시안이랑. 보리스라면 틀림없이 검술연습을 좋아할 거라나 뭐라나."
"심지어 먹혔어, 그게."
조슈아가 키득이며 거들었다. 검을 들어봤자 땅바닥에 질질 끌릴만한 키의 꼬마여도 보리스는 보리스인가 보다. 줄곧 심드렁하고 심지어는 귀찮다는 태도로 루시안을 대하던 보리스는, 검술을 가르쳐준다며 꾀어내자 솔깃하더니 금세 기분이 좋아져 팔랑팔랑하며 루시안을 따라 대련장으로 가 버렸다.
조그맣고 말랑말랑한 보리스를 보는 일도, 그 꼬마에게 쩔쩔매는 루시안을 보는 일도 유쾌한 장난같고 즐거웠다.
그러나 티치엘에게는 이 상황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애에게 별 얘기를 하진 않았지? 보리스의 미래...그러니까, 우리 현재에 대한 얘기라든가."
"현재에 대한 얘기라면 어떤?"
"보리스...꼬마 보리스라고 하자. 꼬마 보리스가 자기 장래에 대한 어떠한 지식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게 되었느냐는 질문이야."
"꼬마 보리스는 우리가 자기 형의 친구들인 걸로 알고 있어."
생각보다 진지한 티치엘의 표정에 불안감이 자라는 가운데 란지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자기 미래로 왔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
"다행이네."
"그러니까 너는 꼬마 보리스가 과거에서 왔다고 확신하는 건가?"
"확신이란 단어를 쓰기엔 조심스럽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지."
티치엘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첫째, 몸이 작아지는 마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 입고 있는 옷까지 같이 작아지지는 않아. 게다가 가지고 있는 하얀 검의 검집까지 갑자기 달라졌다며? 어딘가 다른 곳에서 가지고 그대로 이동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근데 보리스는 그 어릴 때부터 검을 늘 몸에 지니고 있었던 걸까? 휘두르지도 못하게 생겼는데."
"어제 선물로 받아서 좋아서 껴안고 잠들었대."
꼬마 보리스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란지에가 답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맞추면서도 대등하게 존중하는 느낌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둘째, 특정 기간 동안의 기억만 잃어버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사람의 기억을 처리하는 마법은 정신에 직접 작용하는 거라 매우 어렵고 흔적이 남아. 보리스가 어떤 사고로 기억을 잃었으면 몰라, 어제도 별 일 없이 지내다가 기숙사에서 잠들었을 테니까. 특정 시점부터의 기억을 잃고 몸도 마침 같은 시점의 크기로 작아졌다는 가설보다는, 그냥 열한 살의 꼬마보리스가 여기로 이동했다는 가설이 가능성이 더 높겠지. 몸과 기억을 같이 되돌리는 건 참고로 새로 인간을 만드는 것만큼 어려워. 인형...이야 뭐,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이고."
불가능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잠시의 침묵을 깼다.
"인형이라고 한다면 진짜 보리스가 사라진 것도 설명이 되지 않지. 갑자기 인형을 여기 데려다놓은 자가 보리스를 데려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러모로 쉽지 않아 보이고."
네냐플의 안고니나의 커튼을 뚫고 침입하여 학생을 소리소문 없이 데려갈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애니스탄도 네냐플 밖으로 꾀어내려고 갖은 수를 쓰지 않았던가. 게다가 상대는 괴물 보리스다.
"그럼 보리스는? 꼬마가 온 과거로 간 걸까?"
"그래, 그리고 그게 가장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강한 세 번째 근거야."
티치엘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보리스가 가지고 있던 그 하얀 검. 전부터 그 검에 특이한 능력이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내 생각에는 보리스가 그 검으로 시공간을 찢고 과거로 들어간 게 아닐까 싶어."
"시공간을 찢는다고? 그게 가능해?"
"시간은 모르지만, 공간을 찢는 건 전에 봤으니까. 그 검, 결계를 손쉽게 뚫어버렸잖아."
티치엘을 제외한 유일한 목격자인 막시민은 보리스가 뭔가 무지막지한 짓을 벌였다,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충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뭣보다, 안고니나의 커튼에 괴상하게 찢긴 흔적이 있었어. 찢긴 흔적이라고 얘기하면 뭔가 이상하지만...뭔가 충격은 있었던 것 같은데, 뚫린 구멍은 없다고 해야 하나? 보수를 하려 해도 이미 멀쩡하고, 뭔가 침입한 기색도 없고. 그냥 알 수 없는 마법현상으로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아침엔 그거 때문에 불려갔던 거야."
이 학교는 대체 연구생도 아니고 그냥 학부생을 무슨 명분으로 이렇게까지 부려먹는 걸까...라고 하기엔 쥬스피앙은 그냥 학부생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분명히 특혜도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학교 측의 정보를 입수해 상황을 짜 맞추고도 보고는 하지 않고 그냥 자기들끼리 묻고 넘어갈 수 있는 특혜 같은 것.
"일단은 학교 측에 얘기는 하지 말자. 얘기하면...보리스의 검 분명 빼앗으려 들 걸."
란지에의 말에 조슈아와 막시민이 슬쩍 수긍했다.
보리스의 검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악의 무구에 필적하는 어마무시한 놈이라는 것, 그리고 보리스는 그걸 빼앗기느니 상대를 죽이려 들 것이라는 것 정도는 모두 알고 있었다.
"보리스가 오늘 내일 사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렇지 않다면 교수님께 얘기해서 뭔가 방도를 찾아볼 수밖에 없어. 사실 내일까지 기다리는 것도 너무 위험할 지도 모르는데..."
"티치엘 너는 그러니까, 지금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보리스가 단순히 과거로 간 게 아니라, 과거의 위험한 순간으로 갔다던가...?"
어리고 귀여운 보리스를 구경하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기에 다들 아무래도 위기감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티치엘만이 유독 계속 초조해했다.
"단순히 과거로 갔어도 위험한 거야. 사실 당장 네냐플 인력을 총 동원해서라도 보리스를 찾아와야 하는 건지도 몰라...그치만, 보리스가 자신의 의지로 과거로 간 거라면 그조차도 소용없을 테니까. 일단은 믿고...그래, 보리스를 믿고..."
"무슨 소리야. 뭐가 어느 정도, 왜 위험한데?"
"보리스가 과거에 영향을 끼친다면, 뭐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티치엘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공간을 이동하는 사례는 상당히 많이 남아있고, 관련 마법도 여러가지야. 그런데 마찬가지로 한 축을 담당하는 시간을 이동한 사례에 대한 유의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왜일까? 시도한 사람들의 기록은 있거든. 다수설은 시간이동을 성공한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보고 있어. 다만 시도한 사람은 원래 시간축으로 돌아오지 못한 거지."
생각보다 심각한 이야기에 다들 안색이 조금씩 질리기 시작했다.
"혹은,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 사람이 원래 시간축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기보다는, 기존 시간축의 세계가 아예 사라져버렸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시간여행자가 존재했던 세계는 전부 사라졌고, 우리의 세계는 아직 시간여행자가 나오지 않아 생존한 세계라고."
"잠깐, 잠깐...뭐? 사라져? 이 세계가?"
슬슬 막시민의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혹은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스케일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꼴랑 보리스 한 놈이 넘어간 걸로?"
"보리스가 과거에서 뭔가의 일을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 과거와 달라진다면. 그 변이가 또다른 변이를 부른다면."
세계의 멸망을 얘기하는 것치고는 차분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명강사의 수업 같은 톤이었다.
"사람들의 인식은 생각보다 유연해. 작은 위화감이나 비논리 정도는 착각인가 보다, 꿈인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어. 세계도 자신을 유지하려는 힘이 크지. 세계를 유지하는 질서가 무너지더라도, 잠깐의 구멍 정도는 그냥 뚫린 채 넘어갈 수 있어. 예를 들면...동일한 존재가 둘이 되어도, 서로 마주치기 전에는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든가."
실제로 조슈아와 카르디는 마주치기 훨씬 전부터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렇게 넘어갈 수 없을 만큼 변화가 크다면? 예전엔 없었던 존재인 보리스가 과거에서 한 행동이 다른 결과를 불러오고, 그 다른 결과 때문에 또 다른 결과가 생긴다면. 그래서 여러 상황이, 사건이, 사고가, 운명이라 부를만한 흐름이 바뀌게 된다면.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거나, 살았어야 할 사람이 죽거나...더 이상 세계가 용인할 수 있는 변화가 아니라면? 우리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기반 위에 서게 되는 거야. 과거 없이는 현재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요약하면...숯가마 그놈이 뭔가를 하면, 온 세계가 다 존재의 위기를 맞는다, 그 말이야?"
아직 설득이 되지 않은 듯한 막시민의 목소리에 티치엘이 목소리를 깔고 답했다.
"먼 과거의 인과에 따라 현재의 세계 부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이해하기 조금 어렵다면, 그냥 왜곡을 조금 더 가까운 현재의 현상으로 대입해서 생각해봐도 돼. 간단히 생각해서, 보리스가 네냐플에 입학하지 않게 되는 흐름으로 간다고 생각해봐. 우리가...어떻게 되었을 지."
막시민과 조슈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작년 그 난리를 겪었을 때...보리스가 없었다면? 둘의 목숨이 붙어있을 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노을섬으로 무구조각을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럼 세계가...진짜 멸망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잠깐 잠깐, 그럼 이거 지금 이렇게 앉아서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닌 거 아니야? 세계가 멸망한다고? 우리가 그 괴물놈의 손에 다시 죽게 될 수도 있다고? 젠장, 어떤 개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살아남았는데. 그럼 어떡해야 되는 거야? 보리스가 이 무시무시한 결과에 대해 알고 있을 리도 없고, 걔가 무심코 한 행동에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보리스는 알아."
"뭐?"
이 순간은 조슈아마저도 다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티치엘이 한숨을 쉬었다.
"수업시간에 다룬 얘기거든. 란지에는 수강하지 않는 수업이고, 조슈아는 그 날 수업에 안 나왔다 쳐도...막시민 넌, 알아야 하는데."
"티치엘 넌, 알아야 하지 않냐? 내가 수업 내용을 알 리가 없다는 걸."
막시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숯가마가 이 사실을 안다...걔가 수업 내내 조느라 내용을 홀랑 다 놓쳐버린 게 아니라면. 그 성격에 최대한 조심하긴 하겠네. 함부로 세계를 멸망시킬 일을 칠 놈은 아니니까...입 딱 다물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 할 가능성도 있겠는 걸? 그런 쪽으로는 좀 믿음이 간단 말이야."
"보리스는 신중한 성격이니까. 결과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을 함부로 하고 다닐 것 같지는 않아."
막시민과 조슈아의 반응에 티치엘이 수긍했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은 보리스를 믿고 기다려볼 생각을 한 거야."
"근데 보리스..."
조용하던 란지에가 끼어들었다. 다소 당황한 모습이었다.
"열한 살이라고 했지, 아까...? 그럼 지금 보리스가 열한 살 시절로 간 거지?"
"응, 그게 왜?"
란지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을 해야 할 지 말아야할 지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이윽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보리스...형이 죽은 게. 열두 살, 혹은 그 직전 쯤...이라고 알고 있는데."
가장 그리워하던 사람이, 눈앞에 살아 돌아왔을 때. 그 죽음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
"하핫, 다 큰 남자 둘이 씻기엔 좀 좁았다, 그치?"
키득대는 예프넨의 말에 보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없는 사람인 척 숨어있는 와중에 씻을 물을 따로 준비해달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씻지 않고 침대에 눕기에는, 오늘 말을 타고 너무 달렸다. 참, 목검으로 한바탕 대련하며 진흙탕에 구르기도 했지.
마침 아버지가 며칠 영지를 비우신 때라 다행이었다. 참석해야 할 모임이 있었는데, 장자의 생일이라는 핑계로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다가 오늘에야 궂은 날씨에도 새벽같이 출발하셨다.
율켄이 없는 집 안에 예프넨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리스를 찾는 유모에게는 보리스는 친구 집에 예프넨이 직접 데려다줬다고 둘러대 두었다. 자고 올 수도 있노라고. 보리스 도련님이요? 친구요? 갑자기요? 주인님께는 말씀 드리신 건가요? 다소 의아한 듯이 되묻는 유모를 안심시킬 수 있던 것도 다 평소 동생이라면 죽고 못 사는 예프넨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모가 못 본 척 넘어가 줘. 아버지께서 보리스한테 유독 엄하시잖아. 아버지 오시기 전에 데려올 테니까...애도 숨 쉴 틈은 있어야지.
"그런데 보리스 넌 대체 어떻게 검술이 그렇게까지 는 거야. 나는 상대도 안 되겠던데."
"상대도 안되긴, 무슨."
"그것도 네가 갔다는 그 학원에서 배운 거야?"
보리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또 비밀이구나? 알았다, 알았어. 하여튼 고집 쎈 건 둘째가라면 서럽지."
예프넨은 성장한 동생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보리스는 너무 많은 정보를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필요최소한의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디라고는 얘기해 줄 수 없지만 학원에 다니고 있고, 정확히 누구라고는 얘기해줄 수 없지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으며, 심하게 해맑고 에너지가 과격한 녀석, 술을 과하게 자주 마시고 말을 웃기게 하는 녀석, 예술을 좋아하고 섬세한 녀석, 차분하고 책을 좋아하는 녀석, 상냥하고 똑똑한 녀석이 있는데 다들 착하니 꼬마 보리스를 잘 보살펴 줄 것이다. 학원에서 특이한 마법 현상도 곧잘 일어나는 편이라 어쩌다 내가 시간이동을 하게 된 것 같은데, 이런 경우 최대한 과거에 영향 끼치는 일 없도록 하라고 하더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오늘 밤 내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내일 꼬마 보리스가 돌아오면, 형도 나한테 들은 얘기는 어디에도 하지 말고 되도록 잊어주었으면 한다.
"좋아. 꼬마 보리스가 돌아오면, 보리스도 모르는 보리스의 미래는 나만 아는 비밀이 된다 이거지? 그 꼬맹이가 대련하다 분해서 팔짝팔짝 뛰어도 너는 열여덟에 형 정도는 가볍게 발라버리는 엄청난 검사가 된단다, 라는 말은 해주지 않을게. 아니, 생각해보니까 억울한데? 나보다 훨씬 뛰어난 천재를 내가 계속 오구구 잘하고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우쭈쭈 하면서 모르는 척 몇 년을 더 끼고 가르쳐야 한단 말이야?"
그 기간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보리스는 미소 지으려 했으나 입꼬리가 자꾸만 굳었다. 예프넨은 동생이 많이 자라 다소 과묵한 인상이 되었구나 정도로 여겨 쉽사리 보리스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지만,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진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다.
"피곤한 가봐. 그럴만 하지, 오늘은 나도 간만에 땀 실컷 뺐다. 슬슬 자자, 보리스."
털썩. 장남의 방이었기에, 이후 아내를 맞았을 때까지를 생각하여 침대는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넓었다.
"이리 오세요, 우리 덩치 큰 꼬마. 열아홉, 아니 이제 스무살이지. 스무살 형은 오랜만이지?"
그 말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아 보리스는 황급히 팔 벌린 품 안으로 뛰어들어가 얼굴을 묻어 감추었다.
"응...사실, 되게 오랜만이다..."
"우리 오랜만이야? 집에 자주 안 오나봐. 학원이 먼가?"
"으응..."
보리스가 예프넨의 몸에 팔을 둘러 껴안자 웃음소리가 진동으로 전해졌다.
"다 커도 아직 애기네. 형아 보고 싶었나 보다."
토닥토닥.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손길에 눈을 질끈 감고 혹시라도 눈물이 흘러나와 예프넨의 가슴팍을 적시는 일이 없도록 안간힘을 다 했다. 즐거운 일, 웃긴 일을 떠올리려고 했다. 그러니까, 방금 대련을 하다가 형이...아니, 이거 말고. 그러니까, 로글랑탱 파이를...크림차 빌라에...
품이 이렇게나 따뜻한데.
"형."
"응?"
에메라 호수에는 가지 마.
제발, 절대로 가지 마.
"나..."
위험한 상황에는 무조건 도망쳐.
"되게..."
누구보다 빨리, 등 돌려서 미친 듯이 도망쳐. 다른 생각 할 것 없이.
"행복, 하...다?
나를 두고 가지 마.
"고마...고맙다구. 학원, 보내줘서...그래서, 내가...내가, 잘, 흐읍,"
나를 두고 죽지 마.
노력이 무색하게, 끊기는 호흡과 들썩이는 등이 숨기고 싶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쩔 수 없었다. 앞 다투어 목구멍을 넘어오는 외침을 끊임없이 삼키고 있으려니.
예프넨은 품 안에 꽉 들어차는 동생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뭐가 그리 서러울까. 아버지와 생각보다 큰 갈등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둘째 아들이 검술에 예상치 못한 만큼 빼어난 두각을 드러낸 순간부터 집안의 평화가 깨졌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미래에는 보리스와 자신의 관계가, 지금 같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미치자 보리스의 묘하게 어색하게 굳어있던 표정이 떠올라 울컥해졌다. 천년만년 우리 꼬맹이, 내 가장 소중한 동생인데. 예프넨은 더 있는 힘껏 보리스를 꽉 끌어안았다.
"그래, 다 알았어. 형은 네 마음 다 알아, 요 녀석아."
"아냐...형은 내 마음 몰라..."
낯선 저음인데도 투정부리는 어투는 똑같다. 이젠 대놓고 울며 고개를 젓는 보리스를 떼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형이 네 마음을 왜 몰라. 보리스는 형을 좋아하고, 어?"
그새 눈가가 빨갛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사랑하고, 어?"
"어..."
옳지. 눈을 맞춘 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럽다.
"평생 같은 편이고, 어?"
"어어..."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안타까웠다. 누구야, 내 동생 맘고생 시킨 게. 설마 나야, 미래의 예프넨 진네만?
"그거 형이 다 알지. 보리스도 형 마음 다 알지?"
"어, 흡, 어어..."
"그래, 그럼 됐지. 그럼 됐어."
그 마음, 네 열여덟의 삶까지 잘 간직하고 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다 괜찮을 것이다.
예프넨은 자꾸 어딘가 아려오는 마음을 누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자자, 이제. 어이구, 피곤하다."
힘든 하루가 지나갔으니 이제는 잠 잘 시간...
익숙한 노래가 들려오기 보리스는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계속 울던 중이라 예프넨은 그러려니 하고 계속 토닥이며 자장가를 멈추지 않았다.
뜨문뜨문, 노래가 끊기고 팔이 동생의 몸 위에 무겁게 얹혔다가도 곧이어 다시 손을 꿈찔거리며 토닥였다. 어제오늘, 한껏 긴장했다가 또 실컷 뛰어놀았다가 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지만 오랜만에 집에 왔다는 동생을 어떻게든 재울 때까지는 졸음을 참으려 애썼다.
"괜찮아, 형. 그냥...자."
보리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예프넨은 더 이상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잠이 이렇게 달게 쏟아진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를 끌어당겼다.
힘든 하루가 지나갔으니 이제는 잠잘 시간
별똥별도 꼬리 끌며 엄마별 곁으로 자러 갔네
정말 다 컸네...바다처럼 깊고 푸른 목소리였다. 노래조차 형보다 잘 하다니, 괘씸한 꼬마...
캄캄한 밤이 무서워도 곧 아침이 오니까
힘든 세상 모두 잊고 눈물도 흘리지 말고
잘 자라고 키스해줄게, 내가 곁에 있어줄게.
행복한 꿈 꾸다 보면 긴 밤도 금방 가니까.
예프넨이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뱉게 된 이후에도 한참동안, 보리스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노래하면 안 된다는 금기 따위야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금기의 제약이 시공간을 너머 이곳까지 미치진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미친다면 또 어떠랴 싶었다. 형에게, 그러니까 살아있는 형에게. 자장가를 살아있는 형에게 들려줄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재워줄 수 있다면, 그의 편안한 휴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기만자.
보리스가 시뻘건 눈을 부릅떴다.
정말로 형을 위한다면. 알량한 하룻밤의 단잠 따위로 위안 삼을 수는 없을 텐데.
우웅-
소리가 아닌 떨림이 느껴졌다. 검집에 갇힌 흰 짐승이 몸을 떨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소원을 이루어주지.
"소원같은 것...없어."
입 안을 너무 강하게 깨물어서 피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너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이야.
보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틀어 막았다. 그러나 이 소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 그의 안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며?
그의 모든 것은 예프넨 진네만으로부터 받았다. 받은 것을 돌려주는 데, 망설임 따위 있을 수 없다.
네가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다 이룰 수 있어.
간절히 원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그는, 무욕의 불멸자가 되기는 거부하지 않았던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없어. 죽었던 자도 살아 움직이는 것을, 네 눈으로 봤잖아?
불멸을 거부하면서까지 그가 원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오늘 하루의 예프넨은, 어쩔 수 없이 색 바라는 그의 추억보다 수백, 수천배는 더 생생했다.
오늘 보리스는, 그가 살아있음을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느꼈다.
"나는..."
보리스가 침대에서 내려와 윈터러를 움켜쥐었다.
"내가. 겨울검의 주인이."
검집을 벗어던진 검신이 눈부시도록 희었다. 검을 쥔 오른손이 덜덜 떨려와 왼손으로 받쳐잡았다. 온 몸을 울리는 진동이었다.
"분명하게 바라노니."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 세계를 버리더라도.
당신 한명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하고 싶다고.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는...아무것도 원하지 않겠다."
내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흰 빛에 눈이 시어서 눈물이 맺혔다. 감히 등 뒤에서 곤히 자고 있을 형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머릿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예프넨 단 한 명뿐이 아니라는 사실에 염치가 없었기에.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다."
그의 세상은 예프넨 진네만이 지켜준 것이었다. 형이 남겨 준 그 세상에는...보고 싶은 사람도, 고마운 사람도, 반드시 살리고 싶은 사람도, 그를 위해 살아가고 싶은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존경하는 사람도,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그리고 보리스가 알지 못하는 사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도 모두 살아가고 있었다.
입 안을 다셔 감도는 피를 꿀떡 삼켜냈다.
"겨울검은 그 주인의 선명한 의지를 받들라."
미안해, 형.
열기가 느껴져야만 할 것 같이 폭발적인 빛이 그를 감싸는 순간, 보리스는 그제야 뒤돌아 아득히 빛에 묻혀 형체도 보이지 않는 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형한테 날 원망할 기회라도 있었어야 하는데.
**
"보리스!"
번쩍, 시야를 멀게 하는 섬광은 한 순간이었고 눈 한번 깜빡이고 나자 보리스, 그러니까 큰 보리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서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루시안이 달려들어 와락 보리스를 껴안자 철그럭, 소리와 함께 윈터러가 떨어져 버렸다. 흘긋, 시선을 땅에 던진 보리스가 검을 주우려 들었으나 자신을 강하게 껴안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주춤주춤 침대에 주저앉았다.
"보리스 왔어?"
"아, 세상에, 다행이다..."
루시안의 목소리에 하나 둘씩 침실로 들어왔다. 아마도 통금시간 이후일 텐데 어째서 티치엘까지 남학생 기숙사에 와 있는지, 아니 여긴 내 침실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여기에 다들 모여있는지 궁금해 하기에는 보리스의 머리 속이 너무 복잡했다.
"보리스, 고생했어."
"야, 나는 너 믿고 있었다구. 허튼 짓 안 할 거라고..."
"몸은 괜찮아? 아픈 데는 없어?"
여기저기서 말이 건네지고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느껴지자 이제야 실감이 났다. 보리스가 고개를 들어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돌아왔고...
"죽었어..."
무거운 것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이 가늘게 떨려나오는 목소리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형이 다시...죽었어. 내가...형을 죽였,"
"보리스. 아니야."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는데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도 살아있었는데, 나를 안아주고 있었는데. 이제 형은 죽은 지 오래고, 그를 내 손으로 묻었고, 코끝에 감도는 혈향, 쌓여있는 흙더미, 차게 식은...굳어버린, 피투성이의...
"네가 죽인 것도 아니고, 네 형이 다시 죽은 것도 아니야. 보리스, 나 봐."
란지에의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들리 듯 먹먹하게 와 닿았다.
"네 잘못 없어, 보리스."
확신에 찬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머릿속 뜨거운 안개가 조금 걷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내 잘못이야."
모든 것을 버리고 단 한 사람만을 선택하지 못한 것.
"형한테는, 내 잘못이야. 사과해야 돼."
무한한 기회를, 삶을 부여해주지 못한 것.
형에 그에게 해 주었듯이.
모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프넨에게만은 그는 죄인이었다.
"보리스, 뭐하는 거야!"
"이거 놔!"
보리스가 바닥에 떨어진 윈터러를 향해 손을 뻗자 루시안이 그 팔에 매달려 저지했다. 티치엘이 그 사이에 재빨리 윈터러를 주워들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거 줘!"
"너 진정하면 줄게!"
"나 진정했어!"
고집스레 고개를 젓는 티치엘을 보고 보리스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나 진짜 한 마디만 하고 올 게.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내가 그 말을 못해서 그래."
잘도 뻔뻔하게. 하루종일 같이 놀았으면서도.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전하지 못했다.
형은 몰랐다는 것, 몰라야 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아. 목숨을 빚졌으면서도, 기적같이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으면서도...
"형은 알아야 해. 형은, 형은 형이 목숨처럼 사랑한 동생이 어떤...우욱!"
"보리스!"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는 보리스를 조슈아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목소리에 분명한 힘을 실어 전했다.
"네 마음 다 알아."
와들와들 떨리는 품안의 어린 동생의 몸을 토닥이며, 다시 분명히 뱉었다.
"형은, 네 마음 다 알아. 보리스."
움찔. 보리스가 조슈아의 셔츠자락을 움켜쥐었다.
"잠깐...잠깐만, 이게..."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올려다 보았다.
"형......?"
대체 어떻게...
조슈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없어, 이제는."
혼란에 빠져있다가 점차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초점을 잃는 회청색 눈을 보고 알았다. 이제 떠오르는 구나. 조금 전에 생겼을, 7년 전의 기억.
**
"보리스의...그러니까 꼬마 보리스의 기억을 덮어둘 거야."
티치엘이 조심조심 가져온 약병을 테이블에 늘어놓으며 속삭였다. 조슈아의 거실이 도토리 빌라보다 훨씬 넓었기에, 그리고 누군가 지나다닐 확률도 적었기에, 대책회의의 장소는 조슈아의 방으로 옮겨졌다. 꼬마 보리스가 도토리 빌라에서 보리스의 흔적을 찾는 일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루시안보고 되도록 보리스의 물건은 눈에 안 띄는 곳에서 놀다가 여기로 오라고 얘기해 두었다.
"보리스가 무사히 돌아오고 꼬마 보리스가 원래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오늘의 기억이 보리스의 과거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 안되니까. 우리가 특별히 위험한 얘길 꺼내진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보리스가 우릴 처음 만나게 되는 시점부터 우리에 대해 알고 있다면 어떤 의문을 품게 될 지,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일이잖아."
"그 약은 확실하긴 한 거야?"
"그럼. 내가 직접 테스트해 봤는걸."
"뭐, 직접?"
티치엘은 으쓱해 보였다.
"인체에 해로운 건 안 넣었으니까..."
"야, 그래도 기억 뭐 정신 이런 거 잘못 되면!"
"잘못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조심해서 만들었는걸. 여튼 나는 작년 9월 24일의 기억을 잃었었지."
별 거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티치엘을 보고 질린 듯한 표정을 짓는 막시민 옆에서 조슈아가 물었다.
"사람의 기억을 처리하는 마법은 정신에 직접 작용하는 거라 매우 어렵다며?"
"어려우니까 내가 직접 테스트 한 거지. 그리고 기억을 아예 지우는 게 아니라 덮어두는 것 뿐이야. 그래서 부작용이 덜한 거고. 꿈처럼 데자뷰처럼 어딘가에 남아있을 수 있고, 직접적인 계기가 있으면 다시 되살아나. 나는 9월 24일의 일기를 읽고 나니 기억이 돌아왔었어."
"그렇게 쉽게 돌아온다고? 그 정도로 괜찮은거야?"
"쉽게가 아니야. 나는 기억을 덮는 약을 만드는 기억도, 시험해보려고 마음먹던 기억도 다 가지고 있는 상태였고, 단 하루의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날 무얼 했는지 상세히 적어놓은 일기를 본 거야. 이 정도로 앞뒤가 짜맞춰진 상태에선 아무래도 덮어놓은 기억이 살아날 수밖에 없지. 하지만 꼬마 보리스는 아무 맥락없이 낯선 형 친구들을 하루 만나서 놀았을 뿐이고, 다시 돌아가면 이 기억은 흔적이 남는대도 그냥 꿈처럼 느껴질거야. 글쎄, 우릴 다시 만날 쯤에 조금 더 친숙하게 느낄 수는 있으려나? 그치만 그 시점엔 이미 몇년 전 하룻밤의 꿈에 불과한 걸."
란지에는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 두었다. 그들이 만날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일 것이었으나, 꼬마 보리스가 꿈처럼 덮인 기억 속의 마법학원에 다니는 형과 귀족 저택의 시종을 기억을 되찾을 만큼 강렬하게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티치엘의 말대로 조금 더 친숙하게 느끼는 정도라면야...
"좋아, 그럼 이 약을 꼬마 보리스에게 먹이자는 거지. 어떻게, 몰래? 그러기엔 냄새가...우웩."
"핫초코에 타면 어떻게 안 될까?"
"넌 이게 핫초코로 감당 될 맛으로 보이냐?"
"그럼...조슈아, 어디 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던 조슈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 바람 좀."
"엄연히 통금시간이다, 그딴 규칙 어차피 다 깨부수고 있는 중이지만. 멀리 가지 말어."
"응. 요 앞에만 잠깐."
조슈아는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딱히 별다른 일은 없다는 듯이. 그러나 문을 닫자 복도를 내닫는 걸음은 빨라졌다. 아무도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한적한 공간에 다다르자 비로소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 내게 용건이 있죠?"
남자가 미소지었다.
네냐플은, 그러니까 보리스가 곁에 있지 않을 때의 네냐플은 제법 시끄러웠지만, 그 목소리 중 형체를 갖춘 것은 많지 않았다. 형체가 눈에 띄는 경우에도, 희끄무레한 그림자 정도로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휩쓸려 몰려오는 곳인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달랐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하마터면 이 사람은 누구냐고 애들한테 물어볼 뻔했다.
이 정도로 분명한 형태를 지닌 혼은 아주 강하게 얽매인 자일 텐데, 남자는 스산함 없이 맑고 온화한 기운만 띄고 있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 원한과 고통은 다 잊었다는 듯이.
그러니까...마치 켈스니티 같이.
'조슈아.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요. 반갑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 유령이 제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닐진대, 조슈아의 심장은 불쾌감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뛰었다.
-스무...살, 정도. 갈색 머리의....젊은 남자. 가 보인다거나 하지는...않지?
언젠가 보리스가 떠듬떠듬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래서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쾌청한 푸른 눈을 가진 스무살 언저리의 잘생긴 청년, 그리 낯설지 만은 않은 인상의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을 때 조슈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예프넨 진네만입니다.'
"제가...모습을 보고, 듣긴 하지만. 만질 수는 없어서요."
'아차. 실례했습니다.'
머쓱한 듯 손을 거두는 젊은이는 보아하니 유령생활이 익숙한 듯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산 자와의 교류는 처음인 듯 했다. 데모닉 같은 영매가 흔치 않으니 그 자체는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 쳐도, 그런 영혼이 이 정도로 맑은 자아를 유지하고 대화가 가능한 것은 조금 이상했다.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것도, 상당히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었던 것 같은데.
'부탁이 있어서요.'
그렇게, 별로 유령같지 않은 유령은 상당히 유령같은 부탁을 해왔다.
'잠깐만 몸을 빌릴 수 있을까요?'
**
꼬마 보리스는 낯선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며 윈터러를 꼭 끌어안았다.
금속의 느낌이 차갑게 와 닿았지만, 불쾌하진 않고 딱 적당히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자신은 집에서 꽤 먼 곳까지 와 버린 모양이었다. 형의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려면 이걸 마셔야 한다며, 웬 구역질 나는 약을 내밀었다. 이걸 마시고 자고 일어나면 돌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정체 모를 약을 덥석덥석 마시긴 좀 그래서 의심쩍게 쳐다보고 있자, 금발의 누나가 눈 질끈 감고 먼저 마셨다. 나도 여행이나 다녀오지 뭐, 하면서. 그래서 결국엔 마셔버렸다. 어쨌든 형 친구들은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던 데다가, 직접 마시기까지 했으니까. 윈터러를 눈여겨 보기에 흠칫했는데, 가져가려고 하기는커녕 너 그거 흘리고 가면 형한테 혼나는 거 아니냐며 한 순간도 놓지 말고 잘 때도 꼭 끌어안고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집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형은 언제 오는 걸까. 진짜 자고 일어나면 형이 와 있을까.
뒤척뒤척, 눈을 감고도 한참이나 잠의 경계선에서 헤매고 있을 때 조심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쉬잇."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회색머리의 형의 장난스레 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니 춤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몇 걸음 다가와 침대에 풀썩 앉았다.
"형이야, 보리스."
그야 이 형도 형이고, 금발 형도 형이고, 파란머리, 갈색머리 형도 다 형이었지만...별 거 아닌 말도 우리 둘만의 비밀인 양 속닥거리는 특유의 말투에 보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프넨...형?"
"그래, 우리 꼬마."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뜨리듯 쓰다듬는 손길에, 보리스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형이네.
"형 많이 보고 싶었지?"
"당연하지! 하루종일 대체..."
"쉬이잇."
다시 세운 손가락에 보리스도 비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속닥이기 시작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형 지금 어디 있어? 왜 이 형 몸으로...처음부터 형이었어?"
"아냐아냐. 형이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 친구 몸을 빌린 거야."
"몸을...어떻게..."
"마법이지."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다. 영문도 모를 일이 자꾸만 벌어지는데, 그냥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게만 된다.
"네가 나를 위해 부린 마법."
"내가?"
"그래, 보리스."
형은 보리스를 꼬옥 껴안았다. 형의 몸은 조깅이라도 한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고,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보리스. 형은 네 마음 다 알아."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쑥스러워 밀어내려 드는 보리스의 작은 몸을 더 꽉 끌어안으며 조슈아가, 예프넨이 속삭였다.
"다 잊어버려도 이건 꼭 기억해야 돼. 너는 나한테 조금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알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단지 형의 목소리가 촉촉히 젖어있는 것 같아서. 우리 형의 목소리도 아닌 낯선 미성인데도 보리스는 따라서 울컥 해버렸다.
"나는...나는 네게 무척이나 고마워. 정말이야.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어. 네가 그렇게 해준 거야."
조금도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리웠다. 예프넨은 동생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
아주 길고 깊은 꿈을 꾸었다.
걱정 말고 편히 자거라, 내가 지켜줄 테니
아무도 우리 아가를 깨우지 못할 거예요.
바다처럼 깊고 푸른 목소리에 빠져들며 신체의 모든 감각이 멀어져가고 단지 편안한 따스함만이 그를 감쌌다.
캄캄한 밤이 무서워도 곧 아침이 오니까
힘든 세상 모두 잊고 눈물도 흘리지 말고
잘 자라고 키스해줄게, 내가 곁에 있어줄게.
행복한 꿈 꾸다 보면 긴 밤도 금방 가니까.
마법이었다.
신성바드의 노래에 간절한 기원이 실리며 한 음 한 음이 예프넨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오랜 세월의 전승을 거친 강력하고 순수한 마력이, 예프넨의 의식 깊은 곳에 모든 것을 낱낱이 새겨두었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해.
-잘자, 형.
-보고 싶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다. 보고 싶을 거야.
-나를 원망하지?
동생이 전하고 싶었던, 혹은 전하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것들과.
-뭘 그리 참으려고 애쓰는 거냐.
-잊지 않아.
-다시 한 번 그 생명, 내게 맡겨줄 수 없겠어?
-넌 바로 내 두 번째 삶이었으니까.
-네가 검술 말고는 재미 없다며?
누군지도 모를, 아마도 동생이 보고, 듣고, 느꼈을 모든 기억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타인의 의식이 날 것 그대로 올올이 살아 흘러들어오는 것은 산 자의 정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찬트의 시전자가 기원한 것은 결국 그의 안식이었기에 예프넨의 의식을 집어삼킬듯이 요동치던 기억은 곧 고요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따스한 감정의 흔적만 옅게 남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되살아났다.
"커헉! 큽...크후우욱, 컥."
단말마의 고통이 그를 집어삼키는 순간, 그보다도 강렬한 삶의 경험이 그를 휩쓸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 예프넨은 웃을 수 있었다.
그래, 너는 사는구나.
내가 너를 구했구나.
예프넨이 마침내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낮은 자장가가 그를 감싸 안아 주었다.
고통도, 절망도, 분노도, 걱정도, 모두 잊게 해주는 것은 다 자란 동생의 간절한 목소리였다.
**
"네가 나를 구했어, 보리스."
길고 긴 꿈을 꾸며 예프넨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덕분에 죽음은 외롭지도, 춥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미련은 동생에게 이 말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너는 내게 삶을 선물해 줬어. 고마워. 진심으로 사랑해, 내 동생.“
후회도, 미련도, 고통도 없었으나 긴 잠을 버티며 간직한 유일한 소원은, 나의 안식을 네게 전하는 것.
"나도...사랑해."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꼬마 보리스는 형의 품에 파묻힌 채 조그맣게 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음을 깨달았다. 형이 떠나고 보리스는 잠들기 전 조금 울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다.
**
”보리스! 뭐야, 왜 그래. 너 괜찮은 거야?“
”괜찮아.“
뚝뚝 떨어지는 맑은 눈물을 훔치며, 보리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조슈아. 실례가 안된다면...안아봐도 될까?“
”얼마든지.“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 팔을 벌려 조슈아의 몸에 둘렀다. 키가 조금 더 크고, 몸이 조금 더 말랐으나 눈을 감고 꼭 끌어안으며 불과 몇 분 전까지 있었을 형을, 그리고 그가 몇 분 전까지 껴안고 있었던 형을 상상했다. 없어, 이제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마지막 인사는 제대로 다시 하게 해 주지. 그러나 그는 형이 훌쩍 떠날 수 있었음을, 더 이상 그를 붙잡을 것이 없었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보리스는 기꺼이 듣는 이 없는 작별인사를 홀로 전했다.
”잘 가,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