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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a est fabula, plaudite! (이네스 위주)

라시

칼라이소의 극장 거리는 춤추는 중이었다. 오늘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에서 막이 오른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은 이 일대에 살던 귀족들이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류의 공연이었기에 더욱 성황리에 끝나며 이 거리를 들뜨게 했다. 젊은 소년 백작에게 열광한 그들은 한 시간 넘게 주연배우를 기다리더니 그의 인사를 받고서야 집으로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고 (물론 사륜마차와 인파로 그득한 길을 뚫는 게 그리 쉬울 것 같진 않았다), 그중에서도 배우와 극에 대한 사랑이 격렬히 치솟아 내일의 2회차이자 마지막 공연을 보기 위해 기어코 여기서 머물러야겠다는 열성팬과, 그 열성팬들이 들어찬 여관과 주점, 식당은 그간 본 적 없던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야성의 밤이었다.

공연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가운데, 낡은 원피스 자락이 거리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온갖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이곳을 쓸고 다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초라한 차림새였기에 옷차림의 주인은 생각보다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러나 반짝이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가질 이는 많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금방 관심을 돌렸다.

공연 중에 했던 분장은 모두 지워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진정한 사랑과 사회적 지위 모두를 얻은 마리 드 트루아 여공작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창백하고 야윈 소녀, 이네스만이 남았다. 밤이 늦어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두 주연배우 중 하나이기에 내일 낮 공연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마땅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오빠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빈, 나지막이 형제의 이름을 부르던 이네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알고 있는, 오빠가 갈만한 또 다른 행선지를 향해 발을 틀었다. 벌써 세 군데를 돌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빈 올프랑쥬는 이네스가 그를 찾아 나설 때면 먼발치서 누이동생을 알아보고 인사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제 그림자를 군중에 숨기기 일쑤였으니. 그러나 오늘만은 느낌이 달랐다. 그녀가 빚쟁이 때문에 오빠를 찾아 나설 때, 그가 자주 가는 술집에 도착하면 그곳에 오빠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저를 피해 숨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빈의 낡은 외투 끝자락이라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황급히 그를 쫓아가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느 곳에서도 빈이 보이질 않았다. 그가 여기 있다는 느낌을 어디에서도 받지 못했다. 마치 자취를 감춘 것처럼, 지상 세계에서 온전히 몸을 숨기겠다는 듯이. 그래서 빈, 이번엔 무엇에게서 달아난 거야. 뭐가 스스로를 숨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건데. 빼빼 말랐지만 생각보다 탄탄한 두 다리가 지상을 누벼 목표물을 찾아 헤매며 물었다. 그를 찾아 대답을 들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같이 있던 그 사람은 누군지,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내가 예상하는 게 맞는 건지.

요즈음의 빈이 실패를 밥 먹듯이 하고 있더라도 그의 본성은, 그것만큼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믿어왔다. 어릴 적 본 한 줌의 기억에 의존해 최악의 가정을 상정하지 않으려 애써왔지만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그 불안감 때문에 그를 찾길 멈추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발걸음을 멈추면, 그것이 제 안의 어디까지 파고들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마지막까지 아니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려면 그를 만나 대답을 들어야만 했기에.

어떤 걸 계획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막아야 했다. 더는 선을 넘기 전에 그를 멈춰야 했다. 오직 그것만이 흔들리는 머릿속에서 명백하게 자리 잡은 유일한 것이었다. 이 이상의 죄를 짓지는 마, 빈. 쉬지 않고 달리던 이네스가 이내 멈춰 서서 양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 쉬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쁜 숨이 터져 나왔지만 또렷한 눈빛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 춤추는 칼라이소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눈을 뜨고 거울을 보면 작은 소녀가 있다. 미운 오리를 닮아 아무것도 잘하지도, 그렇다고 예쁘장하지도, 넉살이 좋지도 못해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홀로 자라온 아이였다. 이네스에게는 일찍 철이 든 아이 특유의 그늘이 있었다. 타고나길 조용했고 나서지 않았으며 제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건 첫째에게 관심을 빼앗기고 자라 실망한 둘째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네스에게는 나이 차가 나는 오빠가 있었다. 그는 공연 연출에 일찍이 관심과 재능을 보인 바 있었기에 어머니는 장남에 실력까지 있는-사실은 있어 보이는- 그를 밀어주기에 급급했다. 집안은 넉넉한 사정은 아니었기에 빈 하나 뒷바라지하기에도 벅찼다. 더군다나 이네스에게는 특별한 예술적 재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한 명에게 건다면 첫째에게 배팅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오페레타에 잠깐 서던 소프라노였던 어머니는 오케스트라 단원이던 아버지와 젊은 시절 눈이 맞아 평생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두 아이와 함께 남겨졌다. 잔병치레가 잦던 그녀의 건강은 그때부터 악화되었다. 그녀는 떠난 이를 찾지 않았다. 다만 체념하듯 하루하루를 살아나갔고 빈의 성공에 목을 맸다.

두르넨사는 연극과 극장의 나라에 걸맞게 무대에 발을 들이기는 쉬웠으나 대부분의 예술이 그렇듯 성공하는 이는 드물었다. 첫째를 빛나게 하기 위해 어머니는 어린 이네스와 함께 생계를 꾸려나갔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딸인지라 일이란 일은 이것저것 다 시켜보았지만 어리고 손재주도 없는 아이가 할 줄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이네스는 어머니를 도와 바느질을 몇 번 해봤지만 영 꽝이었다. 손에 힘이 없어 집안일도 잘하지 못하는데 바느질이라고 다를까.

어머니에게 타박을 받으며 바느질을 배우던 이네스는 문득 생각했다. 이 실은 호박을 달고 있는 내 손가락이 꼬았다지만 내 인생이란 실은 왜 이렇게 꼬여버렸는지에 대하여. 어디서부터 매듭이 얽혔는지 알아야 그걸 푸는 방법을 생각해낼 텐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풀리기는 할지에 대한 의문만이 남았다. 그런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이네스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근처 잡화점에서 잔심부름을 수행했고 그 외에도 조금씩 갖가지 일을 해나갔다. 어떻게든 닥쳐오는 일상의 가면을 쓴 채권자에게 조금이라도 금전을 쥐여주기 위해서.

이네스는 조용했고 내색하지 않았다. 어렵게 모은 자그마한 급여가 오빠의 무대 연출에 쓰일 재료구매비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가는 순간에도, 빈의 연이은 실패에 뒤따라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오는 순간에도, 그리고 어머니가 지병에 시달려 끝내 눈을 감는 순간에도. 때때로 눈물은 났고 이렇게 흘러가는 인생에 회의감을 느낄 때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빈의 실패 그 자체에 대해 들들 볶진 않았다. 아주 어릴 적 저와 무대놀이를 하며 놀아주던 오빠, 지금처럼 비뚤어지지 않고 공연에 대한 열정 하나로 잠시 빛났던 시절 때문인지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실력인 것 같았던 재능은 자취를 감추었고 여러 악재가 겹쳐 빈은 날로 실패에 잠식되어 그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힘들어질 때마다 인생의 빛은 퇴색되고 버거워졌지만 그 시절의 빛이 더욱 반짝거렸기에 빈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거나 집을 나가 타박하더라도 아주 놓지는 못했다.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삐딱한 입을 하고 뒤틀린 면모를 보이더라도, 누이동생을 모르는 척 외면하더라도 예전에는 어린 동생에게 만든 조그만 무대를 보여주며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래서 이네스는 그것이 재능이 아닌, 흥미로 위장된 평범함임을 알았고 연이은 실패에 실망해 지쳐가면서도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나무라질 못했다.

어느 손윗형제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던지고 광기를 받아들이며 죽음으로 걸어가기도 한다. 어느 손윗누이는 동생의 인생을 구하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던지기도 했다. 물론 꼭 손윗형제가 손아랫형제를 위해 거창하게 목숨씩이나 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받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지만. 늘 아래에서 위로 퍼주다 보면 한 번쯤은, 정말 한 번쯤은 그저 위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라도 받아 마시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 물방울은 아주 옛날에 한 번 졸졸 흐르다 말았기에 이네스는 하염없는 갈증을 느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지쳐서 눈을 감은 채 그저 어렴풋한 해갈의 감각을 기억해내려 애쓸 뿐.

*

– 자,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자. 잘했어, 이네스.

소녀와 비슷한 연배의 제작자이자 주연배우가 표정을 풀고 개인레슨의 끝을 고했다. 내일은 벌써 총연습 날이었다. 그동안 각자의 파트를 연습했던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합을 맞추는 자리가 드디어 시작하는 것이다. 오빠 때문에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을 우연히 방문한 소녀는 공연 제작에 대한 전권을 쥔 조슈아 덕분에 새로운 공연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그날 이후 특훈에 들어갔다. 연기에 대한 수업도 일부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노래 파트였다. 이네스는 지금까지 써보지도 않은 몸의 모든 부분을 끌어내 노래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일주일간의 짧은 레슨에서 조슈아는 그녀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 가르쳤고 이네스는 스펀지처럼 그가 알려주는 모든 것을 흡수하려 노력했다.

제작자님은, 그러니까 조 히스파니에는 불꽃 같은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해도 얻지 못할 재능을 수십 개는 가진 것 같은, 그리고 그 재능을 이 공연에 불사르는 듯한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또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둘이라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네스는 제 모든 감각이 그를 향해 곤두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그에게서 위험을 감지한 것일까, 아니면 매료된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날을 되짚어보았지만 살면서 이렇게 가슴이 뛴 적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네스는 이제껏 살아오며 그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건 저 자신에 한해서인 줄 알았다. 함께 극을 만들어나가는 스태프들은 전부 왕년에 이름을 날리던 유명인사들이었고, 그들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을 많이 봐왔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잘생기고 실력 있는 제작자는 그들마저도 살아오며 만난 적 없던 진짜 천재인 것이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가치 있는 단 한 사람.

그래서 쥬시탕트 양이 정정해 말하는 걸 들었을 때 조금 안심하고 말았다. 이 사람의 정체가 평범할 리 없다고 내심 그렇게 확신해버렸던 것 같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일 거라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어야만 했다. 이네스는 그런 그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으니까.

– 내일은 총연습 날이니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도록 해.

제작자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피곤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안녕을 고하곤 남아있는 다른 작업을 하러 성큼성큼 멀어졌다. 레슨을 해줄 때도 가르치는 동시에 뭔가 걸리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걸 고려해도 흠잡을 데 없이 너무나 훌륭한 가르침이었던 건 당연했지만. 이네스는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으나 잡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극 중의 소년 백작으로 대할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연습이 끝나고 평상시로 돌아오면 눈을 마주치기가, 말을 걸기가 더 힘들어지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네스는 막시밀리앵 앞에 마리 역으로 서는 게 조금 더 편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1막 초반부에는 서로 장난스러운 분위기이긴 했다. 비록 그를 관찰하기 위해 정체를 숨긴 트루아 여공작이 막시밀리앵에게 숨겨야 하는 게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마리가 그와 이어지게 되는 걸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마리가 그의 곁에 서는 게 당연한 수순이기에, 결국에 그와 그녀가 결혼함으로써 이 극의 막이 내려가니까. 그러나 현실의 그는 다르다. 무대 위에 선 모든 사람의 빛무리를 합치더라도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단 한 명의 압도적인 광채에 모두가 가려질 수 있었다.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같은 공간에 함께 설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고작 이 항구도시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만큼 떠나는 것도 한순간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사람의 곁에 함께 서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중압감이 아닐 수 없었다. 초라한 자신이 이렇게 화려한 사람의 곁에 서야 한다니, 처음에는 모든 게 믿기질 않았다. 그러나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기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이 사람의 옆에 어울리는 배역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잠을 줄여가며 저를 가르치는 만큼 자신도 해내야 했다.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욕심이 차올랐다. 당신의 곁에 당당히 서고 싶다.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의 여주인공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고 싶어. 노래를 더 잘하고 싶어.

고개를 숙이고 낡은 구두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발끝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그가 나간 뒷문을 바라본다. 히스파니에 씨, 당신의 곁에 있을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진 줄도 몰랐던 감정들에 불이 붙고 바라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노래는 부르면 부를수록 재미있었다. 노래 부르는 게 좋은 건지, 히스파니에 씨가 알려주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는 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노래를 알려주는 여러 방식을, 지도해주는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했다. 무대에 대한 욕심, 더욱 잘하고 싶은 마음에 힘입어 맑은 목소리로 감정을 담아 마리 드 트루아를 연기하고 숨 쉬고 노래하는 법을 그에게 배워갔다. 그 모든 순간 하나하나가 이네스의 머릿속에 그림처럼 찍혀 남았고 그녀는 그 모든 걸 단기간에 흡수해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에 오늘 레슨에서 선생님은 제법 만족해했다.

이네스는 홀로 간이 무대에 올라 주위를 한 번 훑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에 힘입어 의욕이 차올랐다. 원래 내향적인 사람은 관객이 없을 때를 더 편히 여기는 편이었으니까. 마르고 볼품없는 소녀가 숨을 깊게 들이쉬곤 이내 눈을 감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반짝이는 눈을 빛내는 이, 마리 드 트루아가 된다.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누군가의 탈을 뒤집어쓰듯이.

배역에 그리 쉽게 이입할 수 있는 건 조슈아의 가르침도 있지만 이네스가 가진 본연의 재능도 한몫했다. 소녀는 나서지 않고 누군가를 관찰하며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그 때문에 남의 표정을 살피고 그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네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작게는 그 얼굴 이음새에 걸친 표정, 눈에 내비친 감정, 목소리의 톤부터 크게는 행동거지를 통해 타인의 사고방식을 역추적해보는 것까지를 포함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본뜬다. 그런 식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소녀는 다양한 감정 표현으로 천의 얼굴을 뒤집어쓸 수 있었다. 남의 기분을 금세 알아채는 눈치와 배려심이 있는, 이지적인 듯 보였다가도 금세 다정함을 말할 줄 아는 소녀. 그렇게 그녀는 방드빌 백작 부인의 시녀로써 모르비앙 섬에 와서 소년 백작을 시험하는 장난스러운 동년배 소녀에서부터 사랑에 빠져 그를 못 잊고 다시금 만나고 싶어 하는 이를 연기한다.

여긴 장미 정원이 아니지만

앵초와 억새 정도는 있고

우리 둘의 죄를 사해줄 사제도

턱시도 차림으로 지저귀고 있고

은 한 조각 나지 않아도 당신의 땅

그곳에 발 딛고 선 내가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며 선 내가 있어요.

어쩐지 제 마음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네스는 조금 멋쩍게 노래를 마무리했다. 그제서야 마리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온다. 몰입은 순간이지만 강렬해서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미동 않고 서 있는다. 그때 뒤쪽 출입구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브라보! 하고 외치는 목소리는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몰트 부인, 이네스는 겸연쩍게 웃으며 약간은 긴장한 채 그녀를 맞이했다.

–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 들어가지 그래요?

– 아,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이것만 부르고 나가려 했거든요.

몰트 부인은 제작자와는 다른 쪽으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둘 다 실력 있고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몰트 부인, 그러니까 수이 아네티는 젊은 시절 두르넨사를 휘어잡던 프리마돈나였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커리어를 걷던 중 돌연 결혼과 함께 은퇴했다. 그 유명세는 어린 이네스도 간간이 들어봤을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휘황한 경력과 더불어 몇몇 일화 역시도 함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수이 데 몰트가 싱긋 웃었다.

– 올프랑쥬 양, 실력이 많이 늘었더군요. 우리 제작자님도 제작자님이지만, 사실 난 재능 있는 여자들에게 자주 감동하곤 한답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실은 올프랑쥬 씨의 동생이래서 처음엔 그리 반갑지 않았어요. 그 사람과 똑같은 느낌일까 봐. 하지만 내 예상이 빗나갔죠. 처음에는 우리 사랑스러운 제작자님에게 놀랐지만 올프랑쥬 양, 당신에게도 정말 놀랐답니다. 이 공연이 끝나면 나중에 제작자님과 나란히 내 저택에 차 한잔하러 오지 않겠어요?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답니다.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고. 잠자코 말을 듣던 이네스의 눈동자가 얘기가 거듭될수록 커지며 기쁨에 차올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수이 데 몰트는 소리없이 기뻐하는 이네스를 부드럽게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눈빛은 그간 자신이 많이 받아왔던 류의 시선이었다. 같은 업계의 젊은 후배가 살아있는 전설을 바라보는, 익히 받아온 존경과 감탄으로 가득 찬, 별을 올려다보는 눈빛. 그러나 이네스의 시선은 그보다 좀 더 맑았다. 티끌 한 점 묻지 않은 순수와 작지만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고요하고도 또렷한 동경. 그 눈 속에서 수이는 오랜만에 누군가를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 이 길에 몸을 던진 당차고 자신감 있던 소녀였다. 간만에 느껴보는 향수에 젖어 그녀는 찰나지만 오래 이네스와 눈을 맞췄다. 그러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정말로 알려주고 싶은 것이 퐁퐁 솟아나 향후 계획을 짜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늘그막의 단조롭던 일상에 변화가 찾아와 그 길을 제 발로 걸어가는 느낌은 늘 새롭고 짜릿했다. 처음 이 공연의 제작에 참여했을 땐 한 명이 모든 시선을 쥐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재능 있는 다른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실력 있는 자가 늘 그렇듯, 수이 역시 어린 천재들을 사랑했다.

한참 만에 얇은 입술이 떨어지며 대답을 내뱉었다. ...저는,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부인. 수이 데 몰트는 어린 천재가 온전히 기뻐할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기에 멋지게 미소지으며 내일 연습 때 보자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이네스는 홀로 자리에 남았다. 인기척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긴장해 있던 표정이 풀렸다. 얼떨떨하면서도 너무 기뻐서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푸흐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무대 주변을 정리하고 소지품을 챙겨 귀가하는 와중에도 무슨 정신으로 나왔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다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는 것만 알았다. 무척 가벼워서 발을 두 번 구르면 하늘로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행복한 밤이 이어졌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요즘은 하루하루가 보람찼고 삶의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밤이 지나가면 내일은 또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히스파니에 씨는 하늘이 제게 보내준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그를 만나고 나서 이 모든 행복을 마주칠 수 있었기에.

노래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더 잘해보고 싶었다. 뭔가에 대한 의욕 없이, 욕구를 가지지 않고 살아온 그녀가 마주친 최초의 욕구였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앞으로 계속 인정받고 싶다.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하고 싶지 않다. 이네스가 처음으로 받아본 기대였다. 그걸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네스는 초조한 얼굴로 분장실의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공연 둘째 날, 2막 시작 전의 짧은 틈이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막을 올린 첫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젯밤 쥬시탕트 양에게 분장실에서 보고 들은 얘기를 전부 해주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고 그들 이전에 도착한 사람 역시도 보았다. 오빠는 뜻을 꺾기 어려운 외곬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던 제가 우스웠다. 분명 제작자님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자신을 파멸시키면서까지 누군가를 타락시키고자 하는 성품은 아니리라 믿었다. ...어제 그 광경을 작은 틈새로 목격하기 전까진. 그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분명 제작자에게 위험한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

사람이 광기에 빠져드는 건 담배 연기에 스며드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빈은 이미 광기와도 같은 실패에 여러 번 빠져 길을 잃은 전적이 있었고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분명 누가 손짓하기만 해도 그는 쉬이 홀려 기꺼이 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누군가 등 뒤에서 그 길로 가라고 부추긴다면? 결과는 하나뿐이었다. 알면서도 본인과 제작자 모두를 추락시킬 절벽으로 향하는 것뿐.

이네스의 입술이 앙다물렸다. 막아야 했다. 쥬시탕트 양에게 전후 사정을 듣고 얘기를 해주었지만 그 하나로는 부족한 성싶었다. 그후 빈을 찾아 칼라이소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해 집에 돌아왔다. 어디에 있는 걸까? 작은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대어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다 지쳐 선잠이 들 때까지 빈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늘 공연장에서도 눈에 띄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묻는다 해도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녀는 끝내 소년 백작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에게 위험이 다가오는 것도 막을 수 없고 그를 무대에서 떠나게 하는 것도 할 수 없다면, 그럼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무대에 서서 완벽하게 제 파트를 해내는 일, 오직 그것뿐이다. 그는 무대를 떠나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는 것처럼 태연히 굴었다. 당장 목숨이 노려지는 그조차 오늘 더욱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걸 여주인공인 제가 망쳐서야 제작자님을 볼 면목이 없다. 무대도 잘 해내면서 어떻게든 틈을 노려보는 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그가 오늘을 온전히 살아나가도록 기회를 엿보자. 비록 그의 곁에 선 소녀는 내가 아니지만, 그렇지만. 어젯밤의 광경을 떠올린 이네스는 맥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에게 제 마음을 전부 내주었기에, 그리고 그 마음에 보답받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곁에 잠시 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었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젠 다시 무대에 오를 시간이다. 오늘 유달리 아름답고 반짝이는 소녀는 사랑과 현실에 치여 흔들리면서도 결연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 무대로 걸어갔다.

*

피날레만 남겨둔 상황에서 이네스는 조슈아의 반대편 쪽 계단으로 내려오며 황급히 분장실로 달려가 막시밀리앵의 의상을 찾았다. 시간이 없었다. 제작자의 친구가 그를 업고 무대 밖으로 나가는 걸 흐릿하게나마 보았다. 그가 떠나가는 건 찢어지도록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가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아직도 그가 사랑하는 무대는 계속되고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여기서 해내리라. 그가 저를 가르쳤던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 비록 부족하더라도 그의 공백을 채워보리라. 찰나의 눈속임에 불과하겠지만 그렇더라도 해봐야 했다. 이제는 마리가 아닌, 막시밀리앵으로써 무대에 설 시간이다. 비록 내 무대의 막은 내리지만, 그 사람의 무대가 좀 더 지속될 수 있다면. 이렇게 해서 그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면. 그럼 나는 내 것이 아닌 갈채에도 기쁘게 인사하며 떠날 수 있을 거야.

그리하여 이네스는 1막에서 그가 입었던 옷을 꺼내 든다. 길이가 길고 품이 큰 소년 백작의 의상을 제 몸에 걸친다. 검은 벨벳 재킷과 셔츠에는 사향 냄새가 미미하게 묻어 있어 조금만 집중을 흩트려도 어느새 그 사람을 떠올려 버리기가 쉬웠다. 이네스는 숨 쉬는 것처럼 조슈아를 생각하곤 했으니 그러지 않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 파묻혀 있을 때가 아니기에 눈빛을 달리한다. 그이가 사라진 자리를 들켜선 안 된다.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 무대였던가. 얼마나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도망치고 싶지 않아 했던가.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채 막이 내리기 전의 피날레로 한 발짝씩 걸어나갔다. 반투명 막이 내리는 와중에도 그 자리를 지키며 소년 백작의 노래를 부른다. 그 광경을 관객들이 보았고, 같이 무대를 꾸미던 사람들도 보았고, 새로 사귄 비밀 친구도 보았다. 오직 이네스가 가슴에 품은 사람만이 보지 못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는 법이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둘 모두를 놓지 못해 끝내 자신을 던지고야 마는 그런 사랑.

한참 동안 이어진 피날레의 주인공을 기다린 관객들은 장막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소년 백작의 실루엣에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가장 빛나는 이가 등장하고 있었고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찬사를 보내길 멈추지 않았다. 기립박수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몇몇은 그의 노래에 담긴 여전한 아름다움에 탄식해 주저앉았다. 그렇게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소년 백작이 무대 아래로 사뿐히 내려왔고 곧이어 죽음이 그의 목을 옥죄려던 순간까지 그의 귓가에는 세상을 가득 채운 박수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비 날갯짓처럼 떨리는 눈꺼풀이 내려앉았고 이내 미소지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탈을 쓴 주연배우의 그림자가 땅에 내려앉으며 마침내, 막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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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공연이 끝나고 칼라이소의 신문 1면은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에 대한 찬사가 담긴 헤드라인의 기사들로 가득했다. 개중에는 여주인공에 대한 기사도 여럿 있었다. 어떤 기사도 그녀의 실력에 대해 의심치 않았으며 앞으로의 활동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다음 날이면 그들이 가져보지 못한 주인공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가 앞다퉈 쏟아질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칼라이소는 젊은 신인의 탄생에 들썩이며 춤추었다.

눈부신 프리마돈나의 탄생! 수이 아네티의 뒤를 이을 차세대 소프라노인가?

모르비앙의 마리 드 트루아, 칼라이소를 거머쥐다!

젊은 두 주인공, 믿기지 않는 실력으로 관객들에게서 박수갈채를 끌어내다!

- Acta est fabula, plaudite! (연극은 막을 내렸다, 갈채하라!)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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