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cene stealer
생트
검고 긴 베일을 끝없이 펼쳐 놓은 하늘, 촘촘하다 성글고 성근 끝에 다시금 빽빽이 흩뿌린 별들이 저마다 연노랗거나 푸른빛을 발광한다. 밤의 요정이 얄따랗고 우아한 날개를 잠시 접고 한참 동안 베틀 앞에 앉아 공들여 지었을 주단을 하얗고 무심한 가면이 가로지른다. 좋게 말해도 단순할 뿐인 그 가면은 어떤 미감도 자아내기 힘든 형태였지만, 그 아래 보이는 좁고 갸름한 턱이 세밀한 붓 끝으로 그린 것처럼 우아했으므로 아름다움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Aquarian. 굵고 유려한 필치로 힘 있게 쓴 글자는 가면의 윤곽을 따라 흘러내린다. 미끄럽게, 부드럽게. 귀한 손을 빌려 쓰인 글자들은 고작 입술만 겨우 보이는 남자가 무어 그리 아쉽다고 티끌 하나 가리지 않게 살금살금 피해 간다. 비좁은 지면 한가운데를 그토록 비효율적으로 사용했으니 남은 여백은 장소와 시간과 이름을 적는 것만도 빠듯하다. 중요도를 저울질해 아래로 기운 것들을 밀어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뮤치아 베네벤토는 난생처음 제 얼굴이 걸리지 않은 포스터를 보게 된다. 이것이 막스 카르디가 주연하는 아쿠아리안의 포스터이다.
처음 메인 포스터를 확인했을 때 뮤치아는 이제껏 느끼지 못한 굴욕감을 맛봤다. 그 기저에 내심 이해와 용납이 은은하게 깔려 있어서 더욱이 이가 갈렸다. 암만 하이아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검고 숱 많은 머리와 근사한 바닷빛 눈을 지녔어도 아쿠아리안을 휘두르는 건 뮤치아 베네벤토가 아니라 어디에서 굴러온 건지 근본조차 모를 막스, 밉살맞은 저 막스 카르디였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 유일하게 빛이 내리쬐는 무대 위에서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배우들은 설령 단역이라 해도 오만에 젖기 쉽다. 하물며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 출중한 연기와 가창력으로 주역만 거머쥐는 뮤치아 베네벤토의 사전에서 ‘겸손’은 사어로 전락한 지 한참이다. 그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쿠아리안을 올리는 내내 우레와 같은 갈채는 모두 아드리아나가 아닌 카밀로의 몫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이를 가능케 하는 건 그러한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남아 버린 겸손이 아니라 극에 대한 이해였다. 빳빳했던 새 대본이 너덜너덜한 걸레쪽이 될 때까지 읽고 보고 외운 사람이면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자신은 기본만 하면 그만이고, 결국 모든 건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신성新星처럼 나타나 고작 삼 년 만에 작은 섬을 광란으로 물들인 사람. 말과 말 사이를 잇기 위한 숨결마저 노랫가락인 양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사람. 세 치 남짓한 혀를 칼처럼 쓰기 좋아하는 평론가―이것도 재작년에 생긴 직업인데, 자리에 앉아 편하게 극을 관람하다가 글 몇 줄 쓴 걸로 돈을 받아 가는 후안무치한 족속들이다!―들을 낭만파 시인으로 둔갑시키는 사람.
호사가들에 의해 그럴듯하게 꾸며진 허언 같은 말들조차 진실에 비하면 초라한 겸양에 불과하다. 막스 카르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과 별개로 뮤치아 베네벤토는 이 모든 이야기를 건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대중의 흐름을 발 빠르게 파악하는 영리함은 뮤치아가 가진 많은 재능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 역시 절대적 인기를 누리는 스타였기 때문에 뮤치아는 막스 카르디가 일으킨 화학 작용을 생생하게 감지했다.
하지만 그것이 분한 마음까지 상쇄시키진 못했다. 빠드득, 하고 이가 갈렸다. 뮤치아는 제 코빼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포스터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만일 파냐나가 이 광경을 목도했으면 식은땀 뻘뻘 흘리며 대기실을 마련한 말단 직원이 누구인지 이 잡듯 색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재고할 여지도 없이 손짓 하나로 휙 잘라 버렸을 것이다. 조금 냉정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주 그릇된 처사라고는 할 수 없다. 하고많은 버전들 가운데 굳이 대기실 주인공이 쏙 빠진 포스터를 대문짝만 하게 걸어 놓은 건 상당히 안타까운 처세였다. 그런 눈치로 이 바닥에서 굴러 봤자 얼마나 오래 버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새로 먹고살 길을 탐색할 수 있도록 빨리 해고하는 게 그를 위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뮤치아는 이 무신경한 처사를 굳이 파냐나에게 고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데 낭비할 마음 한 톨조차 없을 만큼 불같은 질투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불꽃은 뜨겁고 환하게 활활 타올랐다. 뮤치아는 부드러운 촉감을 지닌 녹색 안락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고개를 한껏 젖힌 다음, 제 시선보다 높이 걸린 포스터를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매끄러운 유리판이 전등 빛을 반사하여 흐리멍덩한 왜곡을 만들었다. 액자 속에 갇힌 막스 카르디 또한 별수 없이 이지러진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흰 가면 아래 감춘 눈빛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뮤치아 베네벤토를 응시했다.
오만불손한 눈빛. 배우의 눈빛. 무대 위를 군림하며 수많은 관중들을 장악하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눈빛. 푸른 바다 대신 깊은 밤을 품었지만, 색까름 사소한 차이로 치부할 수 있을 만치 뮤치아와 흡사한 눈빛.
그 눈을 정면에서 대적하는 뮤치아의 얼굴 위로 사납고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지하 세계에서 열매 맺은 석류처럼 붉디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얀 이와 붉은 입술의 대조가 선명하다. 뭇사람들이 보았다면 흡, 하고 숨을 들이켰을 법한 아찔함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설령 극장주, 아니, 막스 카르디라 해도 노크 없이 발 들일 수 없는 뮤치아의 대기실이었다. 그의 공간이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관객 또한 없었고, 찬란한 아름다움은 누구 하나 매료하지 못한 채 덧없이 흩어졌다. 하지만 뮤치아는 이를 굳이 아까워하지 않았다. 매력은 마르지 않는 재화였다. 그러므로 아낄 필요도 없다. 훗날 시간에 스러져 시들지언정 아쿠아리안에 오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빛이 흐려질까 봐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순정과 관능의 경계를 애틋하게 오가는 미소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천 번도 넘게 재연할 수 있다.
뮤치아는 극을 다시 한 번 복기했다. 이 극은 어차피 전적으로 카밀로가 좌우한다. 아드리아나는 여자 주인공이라 해도 실상 카밀로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가깝고, 여차하면 풀비아가 대신해도 상영에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기본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기본만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투정 부리는 어린애 다루듯 어르던 파냐나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무리한 걸 요구했다며 당장 대본을 고치겠다던 막스 카르디의 빌어먹을 목소리도 귓가에서 어른거린다.
웃기고 있어. 둘 다 이 뮤치아 베네벤토를 뭘로 보고.
불꽃은 바다 속에서 너울거리며 춤춘다. 막이 오르기까지 이제 이십 분. 수많은 갈채는 막스 카르디의 몫이 될 것이다. 이것만큼은 자명한 진실이었다. 애초에 분량 자체가 그렇게 짜인 판이었기에 뮤치아는 단순한 사실을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가장 열광적인 박수는 이 뮤치아 베네벤토에게 쏟아질 거야, 막스. 두고 봐. 나는 마땅히 당신 것이었어야 할 뜨거운 숨을 내 두 손으로 낚아채고 말 거야.
그는 손톱이 손바닥 안쪽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 독하게 결심했다. 극중 카밀로는 수많은 그림자를 가졌는데, 그중 하나는 가난한 꼬마들을 열광케 하는 도둑이었다. 발칙한 계획을 떠올린 뮤치아는 왼쪽 입꼬리만 슬쩍 올려 생긋 웃었다.
당신이 쓴 그 대본 말이야, 흠 잡을 데 없이 재미있지만 내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 적더라고. 그러니 별수 없지. 내가 극중극을 새로이 연출하는 수밖에. 기대해. 내가 도둑 카밀로에게서 과연 무엇을 훔칠지, 그 가면 속에서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라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뮤치아는 들은 셈 쳤다. 어차피 이런 제 속내를 천재라던 막스 카르디가 모를 리도 없었다. 자아, 선전 포고는 끝났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한 번 제 삶이 적힌 예언서를 펼쳤다. 바다와 대륙을 뒤덮는 스펙터큘러spectacular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