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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페이지

에시드

긴 세월이지만 돌이켜보면 짧은 시간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떠돌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현재는 이토록 평화롭다.

 

 네냐플 도토리 빌라의 어느 학생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따끈한 벽난로와 소복이 쌓이는 눈,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맛있는 냄새……. 어느새 이런 것들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게 되었을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난도 역경도 아득히 멀리도 느껴진다.

 

 한 해를 거의 떠나보내며 어느 학생이 잠시 감상에 젖는 사이, 좁은 빌라 거실이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졌다. 사람 6명이 겨우 앉을 자리를 찾자 비로소 작은 파티가 시작됐다.

 

 “우리 롤링페이퍼 쓰자!”

 

 몰래 들여온 술과 추억의 파이가 동날 때쯤 루시안이 갑자기 종이나 펜 같은 걸 들고 오더니 이견을 들을 새도 없이 각자에게 배분했다. 다들 뭔가 싶어서 얼떨떨하던 중 상황을 정리한 건 티치엘이었다.

 

 “아, 한꺼번에 편지 쓰는 그거?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어!”

 

 그렇게 이른 송년회를 하다가 느닷없이 편지 쓰기가 시작되었다. 펜 하나로 용케 이렇게 꾸몄다 싶은 화려한 편지지부터 구석에 이름만 적힌 편지지까지, 개성 넘치는 종이들이 빌라 거실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손에서 손으로 팔락거리며 넘어가는 종이 소리가 4번 정도 들렸을 무렵 막시민은 ‘이게 뭐 하는 짓거린지’라는 생각을 하는듯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보리스는 말을 고르느라 상당히 신중해져서 위압감마저 내비치는 모습이 됐다.

 

 

 편지지는 서로의 글로 빼곡히 채워져서 내용이 어떻든 멀리서 보기엔 꽤 괜찮은 우정의 증거물 같았다. 롤링페이퍼는 쓰는 것보다 받고 나서 후기를 남길 때 진짜 의미가 있는 법, 저마다 받은 편지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아하하, ‘아침에 작작 좀 깨워라’라니! 너무한 거 아냐? 앞으로 더 일찍 깨워야겠는걸.”

 

 “대마법사의 따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면 쓰나.”

 

 막시민이 아침잠의 중요성을 장황하게 늘어놓느라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조슈아는 루시안에게 본인이 받은 막시민의 편지를 슬쩍 보여주었다. 루시안은 한참을 웃더니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보리스에게 말했다.

 

 “보리스! 너도 밑에 답장 좀 남겨 줘! 쟤네 보니까 서로 웃기게 적어놨더라. 나는 진짜 잘 적었지?”

 

 보리스는 편지를 쭉 훑어보았다. 루시안의 글은 글씨체부터 자기주장이 확실해서 눈에 띄었는데, 검술을 더 가르쳐 달라느니 좀 재밌게 놀아달라느니 친구로 있어줘서 고맙다느니 하는 장문이 꽤나 감동적이었다.

 

 “고마워, 루시안. 정말 길게 적었네.”

 

 보리스는 루시안의 글 밑에 짧은 답장을 적다가 문득 구석에 적힌 한 문장을 보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뿐이었다. 보리스는 그 짧은 글을 잠시 보다가 그냥 넘겼다. 본인도 그 글을 쓴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연설이 끝난 막시민은 루시안이 들고 있는 조슈아의 편지지를 뒤늦게 발견하고 얼굴이 구겨지더니 곧 한바탕할 기세였다. 루시안은 재주 좋게 빠져나가 능청스럽게 다른 룸메이트에게 다가가서 답장을 받으려고 했다. 그의 빛나는 눈동자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으나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루시안, 안타깝지만 기계 구경은 함부로 시켜줄 수 없어. 연구용이기도 하고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 날 수도 있고.”

 

 “뭐? 진짜 안 돼? 저번에 연구실 들어가 보니 신기한 거 많아 보였는데 아쉽다. 보리스가 같이 가면 괜찮지 않을까?”

 

 “하이고, 나중엔 숯가마 놈이 자연재해도 막는다고 하지 그러냐.”

 

 보리스는 곤란해하는 란지에로부터 루시안을 떼어내고 답장을 적은 편지지를 다시 돌렸다. 루시안은 한껏 기쁜 얼굴로 앞으로는 뭘 하고 놀면 좋을 것 같다느니, 연말 파티를 기대하라느니 떠드느라 연구실 건은 깔끔하게 뒷전으로 넘겼다.

 

 “조슈아 편지엔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글을 워낙 시적으로 적어서……. 글은 정말 좋았어.”

 

 “그럼 다음에는 답변할 거리를 만들어 주도록 해볼게.”

 

 조슈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곧 본인의 편지지를 쳐다봤다. 귀족적인 고급스러움이 묻어나게 꾸며진 종이였다. 그 위엔 어울리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기도 한 글자들이 숨 막힐 만큼 빼곡히 줄을 지었으나 보는 사람에겐 오히려 편안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그런 기분을 느낀 건 한 명이 아닐 것이다. 롤링페이퍼 한 장을 갖고 떠드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친구와 온기와 소속감은 과거의 불안감을 잠시 잊게 해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세계를 혼자 짊어지는 고독감 속을 헤맬 수도 있고, 세상 모두를 적으로 여기느라 마음 편히 가면을 벗을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떠들며 웃고 있는 어느 사람들이 그랬듯이. 각자에게 주어진 종이를 최선을 다해 채워 나갈 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저마다의 페이지를 써 내려갈 것이다. 한순간의 평화가 빠르게 지나가더라도, 과거가 반복되더라도, 길고 뻔하고 지루하더라도, 제각기 책을 꿋꿋하게 집필할 것이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면 그것이 곧 역사가 되고 그들이 일군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생명들이 다음 장을 맡는다.

 

 햇빛이 뉘엿뉘엿 흩어져 가는 추운 겨울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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