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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File: Max Cardi

여름

규모가 웅장한 무대 한가운데에 소파 두 개가 마주 보게 놓였다. 빛이라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조명 하나뿐인 까닭에 사위는 흐린 달이 뜬 밤처럼 어두웠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은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댄 자세였다. 갸름한 턱을 뒤로 살짝 젖혀서 뒤통수까지 기댄 채 양손에 쥔 메가밍크스를 아무렇게나 돌리고 있었다. 여유로움을 넘어 권태가 느껴졌다. 곧 시작할 인터뷰도, 저 십이면체 큐브를 맞추는 놀이도 지루하다는 듯이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피로해 보였다. 대개 젊은이로 상상하지만, 그가 정말 청년인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는지는 불확실했다. 아무도 저 가면 너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무렴 한 명도 없겠느냐마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얼굴을 비롯한 모든 것이 모조리 베일에 싸였다. 그래서 별별 수식어를 다 몰고 다니는 만큼 그를 둘러싼 루머들 역시 그럴싸한 얘기부터 허무맹랑한 개소리까지 다양했다. 비밀 자체보다 비밀을 유지하는 방법이 더 신비로울 지경이었다. 하여튼 마주 앉은 상대방 입장에서 청년의 의욕이라곤 하나도 없는 모습은, 뭐라고 할까, 무례하기보다 매혹적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나른함이었다.

별개로 진행이 순탄치 않을 것을 우려했으나 막상 시간이 다가오자 청년은 한결 바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메가밍크스도 바닥에 내려놓았다. 뒤죽박죽으로 섞였던 색깔이 잠깐 눈을 뗀 사이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마법이었다. 아니, 마법이 아닌가? 일견 손이 가는 대로 돌리듯이 보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한 번도 고개 숙여 큐브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청년은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보면서 맞추면 너무 쉬워서요. 안 본다고 대단히 다를 바도 없지만요. 자, 시작합시다. 저는 막스 카르디입니다. 네, 대륙 으뜸가는 이야기꾼, 최후의 인형 극장 주인, 천재 작곡가이자 화가이며 작가인 동시에 가수인 예술가, 천사와 악마가 손을 잡고 축복한 자, 마법과 신비의 후원자 등등 자유로이 부르시길 바랍니다. 저를 무엇으로 칭하건 틀리지 않을 겁니다. 아, 검술의 계승자 같은 것만 빼고요. 애석하게도 운동 신경은 평범한 수준이라서. 그리고 얼굴을 가린 걸 이해해주세요. 예의가 아닌 줄은 아나 제게도 남에게 밝히기 싫은 개인 정보라는 게 있거든요. 음, 어차피 기대도 안 하셨겠죠? 인터뷰 요청도 당연히 거절하리라 예상하셨을 테니까요.

좋아요. 그 얘기부터 먼저 해야겠군요. 지금까지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으면서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 말이에요. 본질적으로는 단순한 변덕입니다. 멀쩡한 이유도 있으니 그렇게 실망하진 마세요. 올해는 기념적인 해니까 조금이나마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자리를 가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개인적으로 인터뷰 요청서에 적힌 단체명이 마음에 들었어요. ‘문화유산으로서의 앤틱 인형 보존 및 복원을 위한 연구회.’라니, 오랫동안 수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았지만 이토록 흥미가 동한 적은 없었답니다. 오늘 서로에게 즐거운 시간이길 기대합니다. 잠깐만요, 그렇다고 부담감에 짓눌려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시다니요. 긴장 푸세요. 아시다시피 저는 비밀을 좋아하는지라 대단찮은 소리밖에 안 할 거예요. 어쩌면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지난 며칠간 눈에 핏발을 세우고 준비한 보람 따위 하나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나실지도 모릅니다. 기념적인 해라는 게 무슨 뜻이냐고요? 흐음, 그렇죠,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막스 카르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장갑을 끼고도 기름해 보이는 손가락이 까딱까딱하며 무릎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막스의 불가사의한 점 수십 가지 가운데 하나. 그는 맨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가장 대중적인 추측에 따르면 피부에 끔찍한 자국이 있어 가린다고들 했다. 과연 그럴까? 구시대였으면 모를까 흉터든 뭐든 재생 치료만 받으면 깨끗이 사라지는데 막스처럼 부유한, 정확히는 부유하다고 추측되는 인물이 흉한 살갗을 어쩌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탄생 기념이에요. 우리 극장의 레퍼토리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 나온 지도 벌써……. 정확한 햇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까요?”

참으로 신비주의를 사랑하는 인물다웠다. 막스의 극장 레퍼토리는 세 개였다. 첫 번째는 윈터러, 두 번째는 데모닉, 세 번째는 블러디드. 비록 ‘문화유산으로서의 앤틱 인형 보존 및 복원을 위한 연구회.’라는 단체명을 달고 진행하는 인터뷰였으나 어떤 이들은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얻길 바라는 자리였다. 인터뷰이는 이 귀한 찬스를 허투루 소모할 수 없다는 공익적 사명감을 느꼈다.

“인형보다 레퍼토리에 더 관심이 있으셨던 건가요? 아니, 괜찮아요. 백 퍼센트 확률로 예상 가능한 질문이었죠. 다들 궁금해하시는 걸 압니다. 우선은 세 작품이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네, 극장 레퍼토리로 삼기 훨씬 이전부터 실재했던 이야기예요. 따라서 저는 무대를 제작하고, 연출하고, 결과물을 올리는 역할로, 말하자면 여러분 단체가 하는 활동과 비슷하게 이야기를 보존하는 거죠. 모든 내러티브는 꾸준히 회자되지 않으면 결국 사토에 묻혀 사라지는 법이니까요. 원시 필멸의 땅처럼 말입니다. 맞아요. 구시대의 실화라고 믿는 분들도 많지요. 실화일까요, 허구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저는 그걸 따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이야기로만 남은 실화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로만 남은 창작은,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먼 과거에 실재했던 일이라도 기록이 없으면 대체 무엇으로 허구와 실화를 구분하겠어요? 제가 실화라고 말해도 여러분에겐 ‘어떤 이야기’에 불과한데 사실 여부가 중요할까요? 아, 미안합니다. 더는 망할 질문 세례를 못 들어주겠다는 표정이시네요. 근데 꽤 재밌지 않아요? 우리의 명석한 탐정 친구가 끝내주게 잘하는 거죠. 그러니까, 네, 원형이 실존하는 레퍼토리이고, 까마득하게 긴 역사를 지녔다는 건 정말입니다.

많은 구시대 이야기가 유실됐죠. 기적적으로 남은 글과 그림, 간신히 복원에 성공한 데이터를 다 합쳐도 멸종 위기 생물 개체수보다 적어요. 그렇지만 기억하는 자에게서 기억하려는 자에게로 전해져 내려온 유산도 분명히 많습니다. 이렇듯 좋은 것은 오래 남아요. 인본적 가치가 그렇고, 선을 추구하는 신념이 그렇고,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네?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어떤 거냐니요. 제 입으로 꼭 말해야 합니까? 이런 작위적인 홍보는 선호하지 않는데……. 그래요, 맞아요, 좋은 이야기. 대표적으로 우리 극장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큼지막하게 제목을 적어 주세요. 윈터러, 데모닉, 블러디드입니다. 음, 제게 ‘좋은 이야기’를 정의하라면, '나'는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개개인의 삶이라는 필터를 끼우면 이야기 색깔도 가치도 달라지니까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만사에 무심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더니 말하는 동안에는 활기차고,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웠다. 막스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남들 앞에 거의 나서지 않는 터라 무슨 콤플렉스가 있을 거라느니 회피성 인격 장애가 분명하다느니 뒷말하는 작자들이 끝없이 튀어나와도 대부분은 그를 좋아했다. 인간 본성에는 비밀에 환장하는 속성이 새겨진 게 틀림없다. 잠시 목을 축이느라 인터뷰를 끊은 동안, 막스는 언제 물 흐르듯이 말했냐는 것처럼 고요했다. 질문은 마침내 인형극으로 넘어갔다.

“어째서 인형인가. 좋은 질문이에요. 아니, 오늘날에는 인간과 똑같은 형상에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를 창조할 수 있는데 굳이 구시대 유물에 마법의 실까지 매달아 힘들게 조종하느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받아서 질렸어요. 인형극이라서 유치한 인상을 주는 바람에 훌륭한 이야기까지 평가절하를 당한다나?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방을…미안해요, 당신 질문에 화내는 건 아닙니다.”

내내 나긋나긋하다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티를 내기에 당황했다. 무심코 입을 벌린 채 쳐다보았더니 막스가 멈칫하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뜻밖이었을 뿐,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니, 약간은 불쾌했는데 그 방향이 막스 카르디가 아니었다. 구시대 인형의 참된 가치와 매력을 모르는 작자들이 불쌍하다고 투덜거리자 막스는 낭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일순 심장에서 콰당탕 소리가 났다. 말할 때는 잘 몰랐는데, 은하수처럼 뭇별이 일제히 반짝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옛 시대의 인형을 고집하는 뾰족한 까닭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인형이란…적당히 조악한 편이 좋아요. 그게 다예요.”

유난히 짧은 답변이었다. 가볍게 다문 입술에서 더 보탤 말이 없다는 의사가 역력했는데 어떤 고집마저 느껴졌다. 문득 그의 입술 색이 조금 창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고 아득한 조명 때문일까. 극장이 서늘한 것 같기도 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얼른 다음 질문을 꺼냈다. 지금껏 그랬듯이 막스는 유연한 태도로 응했다. 그가 허공에 손짓하자 지나간 궤적이 그대로 문이 되어 인형을 전송했다. 일반인도 흔하게 사용하는 마법 장치였지만, 막스가 쓰는 모습이 괜스레 특별해 보였다. 정말로 마법사 같았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여기 있습니다. 등장인물 인형이 워낙 많아서 주인공 셋만 데려왔어요. 여기 가운데가 보리스이고 좌우로 조슈아와 이스핀입니다. 아, 역시 인형이 나오니까 얼굴에 화색이 가득하시군요. 가까이 와서 보셔도 됩니다. 설정에 맞게 신장 차이가 조금씩 있는데 평균적으로 헤드까지 포함해 사십 센티미터입니다. 연극을 위해 부드러운 관절 움직임에 공들였고, 옷도 구시대 방식으로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바느질했어요. 헤어와 안구색도 신경 써서 구현했죠. 특히 조슈아의 머리는 회색이면서 은발은 아니라 자칫 탁하고 지저분한 색이 나오기 십상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공작 얼굴을 허투루 만들어서야 관객의 지탄을 받지 않겠습니까? 아, 옷은 이스핀이 의외로 까다로워요. 우아하고 근사해 보이면서도 군인답게 활동성 있는 분위기를 살려야 해서…….”

그와 인형을 번갈아 가며 흘끔거렸더니 막스가 퍽 친절하게 미소했다.

“뭔가 궁금하신 눈치인데요. 말씀해보세요. 아, 바느질이요. 제 솜씨예요. 요새 누가 손수 바느질을 하겠어요? 비밀 하나를 밝히자면, 제가 좋아하는 취미입니다. 너무 놀라시네요. 자, 보리스는…세 주인공 중에 제일 수월했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확실히 밝히는데, 그에게 아무런 유감도 없습니다. 보세요. 유일한 장발이라 머리카락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다고요. 오히려 저는 보리스를 가장 좋아해요. 제게 참 친절했거든요.”

끝에 덧붙은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지나가서 한발 늦게 멍해졌다. 방금 막스 카르디가 그 막스 카르디라는 고백이었나? 충격적인 가설이 급부상해서 뇌리를 혼돈으로 물들였다. 곧이곧대로 듣고 의심하는 까닭은 막스와 그의 인형 극장이 너무 오래전부터 실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무’라는 부사는 ‘불가사의하고 비현실적이며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처음에 소개했다시피 제가 바로 막스 카르디입니다, 라고 말하려 했는데 안 되겠군요. 농담도 못 하겠어요. 제 이름을 레퍼토리에서 땄고, 당연히 가명입니다.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잘 알겠어요. 그 유명한 소문은 저도 잘 아니까요. 이야기 속 아르님 소공작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심지어 구시대부터 살아온 불로불사의 존재 같다고요. 이해합니다. 하필이면 이름도 ‘막스 카르디’를 쓰고 있으니 아주 수상쩍고 흥미로운 얘깃거리죠. 글쎄요, 살아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시작이 있으니 응당 마지막도 언젠가는 오겠죠. 더는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쉽지만 약속대로 인터뷰를 끝낼 시간이네요. 마지막 남은 질문은, 그렇군요, 이것도 백 퍼센트 확률로 예상했다고 말씀드리면 화내실까요? 똑같은 레퍼토리를 끝없이 보여주는 까닭은, 인간은 필멸하나 좋은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죠. 기나긴 세월 회자되어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언젠가 인간이 이 우주의 한 점 티끌로 소멸하는 순간까지 살아남을 거예요. 그러므로 이 극장, 이 무대에서 되풀이되는 이야기와 그 안에서 생생한 이들은 구시대와 신시대를 지나 불멸할 것이고 저는 영구히 살아남을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싶어요.

……고마워요. 모두가 떠나고 시대가 바뀌어도 여러분은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 주기를.”

의미심장하게 빙긋 웃고 말을 맺은 막스가 차분히 인사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따라서 몸을 일으키자 인터뷰 기념 선물이라며 메가밍크스를 건네기에 얼결에 받고 말았다. 잘 가요. 그는 천장 조명이 미치는 곳에서 벗어나 캄캄한 무대 끝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눴는데도 떠나는 막스의 뒷모습은 유령 같기도, 환상 같기도 하여 우두커니 응시했다. 어슴푸레한 어둠에 반쯤 묻혔을 때, 막스 카르디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미려한 실루엣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근데 당신, 제 친구를 꽤 닮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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