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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이카아나]

유리카


사흘간 끊임없이 비가 내렸던 때가 있었다. 지난해 4월이었다. 매번 그랬듯 누가 먼저 별장에 도착할지 내기를 했다. 걸린 건 설거지였다. 이기는 쪽이 하자고 얘기가 되었다. 아나로즈는 이카본이, 이카본은 아나로즈가 먼저 올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되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처럼 문앞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한참을 웃다가 실랑이를 한 끝에 이카본이 한 발 빠르게 문지방을 넘었다.
“우리 아씨 피곤하지 않게 제가 다 합지요.”
그런 말투는 또 어디서 배웠는지. 아나로즈는 눈을 흘기며 핀잔했다. 연기는 그만두고 얼른 청소 좀 하자고.
“그래서 재미없었어?”
“음, 아니.”
솔직히 얘기하자면 재미없다기보다는, 사랑스러워 보여서 큰일이었다. 아나로즈는 말을 아꼈다. 그러나 이카본은 금세 아나로즈의 눈빛을 읽어내곤 웃었다.
“어지간히 콩깍지가 씌였네. 우리 아가씨 어쩌나.”
“우리 공작 전하도 어쩌나. 콩깍지가 너무 단단한데?”
그렇게 둘이서 장난스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늦은 점심을 차려먹고, 이카본이 설거지를 하고, 2층에 올라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대단한 걸 하지는 않았다. 평소 각자의 의무 때문에 미뤄두었던 소소한 일거리를 했다. 이카본이 나무로 작은 꽃 모양이나 동물 모양의 조각을 만드는 동안 아나로즈는 골무를 끼고 천에 수를 놓았다. 서툰 바느질로 그려진 페리윙클 꽃은 작고 귀여웠다. 어김없이 상처가 생긴 손가락에는 이카본이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는 봄 장마답게 계속 내렸다.
다음날 낮은 테라스에서 머물렀다. 설탕을 뿌린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로 아침 식사를 하고, 테라스 밖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차양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불현듯 떠오른 가락을 흥얼거렸다. 가끔은 일어서서 절벽과 바다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절벽 머리에는 하얀 별꽃과 데이지가 피어 있었다.
별장에서의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다. 왜 이리 하루가 안 갈까 싶다가도 문득 시계를 보면 어느새 5시가 넘어 있곤 했다. 그치지 않는 장맛비가 지루하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더 오래 오길 바랐다. 서로가 서로의 태양같아서, 그게 좋아서였다. 휴가가 길어질 리가 없는데도 그랬다. 그토록 둘만의 시간이 아쉬웠다.

그러나 이젠 돌아오지 않을 얘기다.
약속은 끝났다. 그가 저를 떠나기 전에 제가 먼저 그를 떠났고, 마음 속 울타리에서도 내보내 주었다. 한 조각 남아있던 미련도 조금 전 별장 아래의 바다로 털어버렸다. 아나로즈는 무감한 표정으로 돌벽을 쓰다듬었다. 무덤 속은 고요했다. 기억이 바래지다 끝내 잊혀질 때까지 잠들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두 번 다시 그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대로 잠든 채 의무를 다하면 되리라.
하지만 자신이 정말 그러길 원하는가? 솔직히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오기를 기다릴지도 모르고, 시간이 멈춘 듯 아무것도 변치 않는 이 무덤에 누워서 기억을 베개삼아 꿈꾸다 보면 한 번쯤은 말랐던 눈물이 다시 차오를 수도 있을 테다. 언젠가 내렸던 빗물처럼 흐르진 않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닌 것이 기꺼울 뿐.

아나로즈는 눈을 감았다. 잠은 금방 찾아왔다. 온몸을 휘감은 마력은 덩굴로 변했다. 그리고, 꿈속도 마력에 잠겨들었다. 무의식이 펼친 세상에선 비가 내렸다.
끝이 없는 장마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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