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바람
카람곰
아직 일교차가 큰 날씨였지만 아침 햇살이 따뜻한 어느 봄 날이었다.
오늘따라 잠에서 일찍 깨어나 창문을 바라보던 조슈아는 바깥에 있는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움직임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노래를 부르는 것에 맞게 손을 흔드는 것 처럼 나뭇잎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의 물소리가 들리다 조금 지나서 끊긴 뒤에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물기를 닦으며 옷장에서 옷을 고르던 조슈아는 조금 고민하더니 가벼운 티셔츠와 청바지를 골라 갈아입고는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깨끗했지만 막시민은 아직도 자고 있는지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나무늘보의 삶을 실천 중이라며 광고하던 막시민을 깨웠다가는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몰라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저대로 두면 오후 4시쯤 느즈막히 일어나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지 않을까.
아침은 아직 먹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먹어도 그만 안먹어도 그만이었기에 막시민이 깨지 않도록 현관 문을 조용하게 열었다가 닫았다.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나온 조슈아는 근처의 작은 카페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카페로 들어와 무인주문기로 주문을 한 조슈아는 주문표를 받아 잠시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문한 메뉴가 조슈아를 불렀다.
"에스프레소에 더블 샷 추가하신 분 계실까요~"
쓴 맛을 좋아하는 조슈아가 취향을 듬뿍 담아 주문한 커피를 받고 가볍게 목례를 한 뒤에 카페를 나섰다. 오늘은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왔기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익숙한 길을 향해 발길을 옮겼지만 방향을 바꿔 자주 다녀보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주변에 공원이 있었는지 반려동물들을 데리고 산책을 시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덩치가 작은 강아지부터 아까의 3배는 더 커보이는 강아지들까지 여러 크기의 강아지들이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히스파니에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에서는 무엇도 모르고 뛰어다니다가 막시민이 개한테 물렸던 순간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를 막시민에게 한다면 기억도 하기 싫은 일이라며 진저리를 칠까.
그냥 예전 일이 생각나 피식 미소를 흘린 조슈아는 재빨리 그 곳을 지나쳤다.
"조슈아!"
그 공원을 거의 다 지나오자 어디선가 조슈아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피를 마시던 빨대에서 입을 떼고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루시안이 손을 흔들면서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에서 뭐하고 있었어?"
"그냥, 산책하고 있었어."
"잘됐다! 근처로 이사했는데 집 구경하고 갈래?"
갑작스런 집 구경 제안에 당황한 조슈아는 이틀 전에 집들이 하자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거냐고 되물었다.
"아, 그 전에 미리 집 구경하는건데 괜찮지 않을까?"
"아냐, 다 같이 가는게 좋을것 같아."
루시안이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스레 거절을 하고는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요즘 근황에 대해 열렬하게 이야기 하던 루시안은 보리스 이야기를 꺼내려던 순간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것 처럼 탄성을 내더니 보리스가 혼내기 전에 방을 청소해야겠다며 부리나케 자취방으로 향해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담벼락을 구경하다 이번에는 보리스를 마추쳤다.
"... 안녕."
"어, 안녕."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냥 산책하다가 여기까지 왔어. 아까 루시안이 네 이야기 하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뭐. 매번 청소 안하고 어지르기만 해서, 안치우면 운동할떄 끌고 간다고 했더니 며칠 전부터 호들갑이야."
매일 아치미 쉬지도 않고 한 시간 씩 공원을 뛰는 건 싫었던 모양인지 루시안이 부리나케 뛰어 들어가던것이 갑자기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혹시 루시안 근처에서 봤어?"
"아까 만나서 이야기하다 청소해야한다면서 자취방으로 들어가버리던데."
아무래도 보리스는 루시안을 찾는 것 같아 보였다. 매번 수습 가능할 정도로만 사건을 만들고 보리스는 태연하게 수습하는 모습을 여러번 목겨했던 터라 이번에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예상이 되었다.
"아무튼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보리스는 무심하게 루시안과 함께 살고 있는 자취방을 향해 걸어갔다.
길을 따라 쭈욱 걷다보니 이제는 익숙한 도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은 점점 사라지고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이 내리쬐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청량한 시야에 기분이 맑아지는 내 마음을 아는건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충동적으로 나온 산책이었지만 오늘같은 날이라면 멀리까지 나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하나였다.
[야, 조군. 어디냐.]
아무래도 방금 잠에서 깨어난 막시민이 집에 내가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어온 듯 싶었다.
"그냥 잠깐 밖에 나왔어."
[나가면 나간다고 이야기를 좀 하던가.]
"깨우면 돈 달라고 난리 칠게 뻔한데 무슨. 배고프면 냉장고에 우유 있으니까 시리얼 먹어."
[그걸 누구 먹으라고 먹냐. 알아서 뭐라도 먹으련다. 살아있는거 알면 됐어.]
저 한 마디를 끝으로 무심하게 통화가 마무리됐다. 역시나 막군다웠다. 전화가 걸려온 김에 이런 맑은 날씨에 보고 싶은 한 사람이 생각나 익숙한 전화번호를 누르고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무런 컬러링없이 울리는 연결음까지 귀가 간지러워지는 사람에게 통화를 걸었지만 지금은 바쁜지 다음에 전화해달라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조금 아쉬웠지만 3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그냥 목소리 듣고싶어서."
[......]
"이따 저녁에 바람 차다는데 데리러 갈까?"
[......알겠으니까 이따 전화할게, 지금 좀 바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통화가 종료되었다. 바쁘다고 했으니 나중에 연락이 오리라 믿고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낯선곳을 지나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는 감각은 언제나 새로웠다. 지나가던 길에 보였던 서점에 들러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한 권 사고는 근처의 카페에 들러 주문한 에스프레소 더블 샷과 함께 독서를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재미있는 책 속의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막시민에게 전화가 온 것도 모르고 지나쳤지만 상관 없겠지 싶어 나중에 전화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 쯤, 카페의 바깥을 쳐다보니 청량했던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있던것 같아 책을 덮고서는 컵을 반납하고 카페를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달이 보일 정도로 어두워진 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하나 없이 새까만 도화지가 펼쳐져 있었다. 어릴 적에 그렸던 일곱 별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전화를 꺼내 리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오래 걸리지 않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조금은 지쳐보이는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슬슬 퇴근할 시간인거 같아서 전화해봤어."
[아, 미안.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아서... 오늘은 혼자 들어가볼게.]
매일 일에 치여 살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붙이고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야, 목소리 들었으면 됐어. 무리하지 말고 아프면 이야기해. 데리러 갈게."
[...알겠어. 고생해.]
통화가 종료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화를 귀에서 떼기 싫었다. 오늘따라 이유없이 보고싶었던 사람이었는데, 미련이 남았던 건지 우두커니 서서 전화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던건지 모르겠지만 무한히 뻗쳐가던 상념에 브레이크를 걸어준 것은 다시 한번 울린 전화의 진동이었다.
나도 모르게 놀라 전화를 확인해보니 막시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여보세요?"
[야, 왜 아까 전화 안받았어. 아니 일단 너 저녁 안먹었지. 어디냐 밥 좀 먹자.]
"저녁? 안먹어도 괜찮은거 같은데."
[헛소리 하지 말고 그냥 먹으러 가. 보나마나 또 커피만 마시면서 헛배 채우고 안먹겠다는거 다 아니까 어디있는지 위치만 말해.]
커피만 마셨을거란 생각은 어떻게 했는지 어디있는지 말하라는 소리에 순순히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기다릴테니까 근처에 오면 연락해."
[저번처럼 또 어디로 새기만 해봐. 집에서 가만 안둔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기다리다 지루해서 잠시 다른 곳에 있던 그 이야기를 듣자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막군이 올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서 있어야 할 운명인 것 같았다. 분명 저녁 메뉴는 안 정한것 같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먹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