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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프리마

1.

티치엘은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평소에 그녀는 고민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고민이 있긴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데 쓰는 시간을 그녀는 그 고민을 해결하는 데 쓴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학과 수석에 모두가 성적이 안 되어 들어가기 어려워한다는 제 2전공을 겸하고 덤으로 교직 이수 과정까지 밟고 있는 티치엘은 하고 싶은 것도,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그런 그녀가 고민 때문에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보내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라고, 그녀를 아는 학과생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티치엘에게는 아버지로부터 전달받은 막시민이라는 숙제가 있었다. 글쎄, 숙제일까? 엄밀히 말하면 의무는 아니었지만, 티치엘 특유의 책임감이라는 재료를 통해 막시민이라는 작품을 빚어나가고 있긴 했다. 다만 이 막시민이 조각상이나 요리 따위가 아닌 사람이라는 점이 특이사항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막시민은 그다지 상냥하지도, 인내심 있는 성격도 아니었고 심지어 딱히 부지런하지도 않았다. 티치엘과 나란히 놓고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란 두 사람이 같은 학과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같은 휴게실 테이블에서 공부하는 장면은 말 그대로 아이러니였다. 뭐, 대부분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다른 한쪽은 듣기 싫어하는 상태였지만. 그래서 현재 티치엘이 가진 고민의 유일한 장점은 바로 이에 대한 막시민의 반응이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뭐? 대학원?”

그래, 바로 이렇게 말이다.

티치엘은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응. 아빠가 지원은 확실히 보장해 준다고…….”

“난 싫다.”

막시민이 딱 잘라 말했다. 그는 티치엘이 우물쭈물하는 양을 잠시 보더니 시선을 돌려 카페 테이블 위에서 덩그러니 식어가던 홍차를 바라봤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원래 대학교 따위 올 생각도 없었다고. 온다고 해도 이렇게 전혀 관심 없는 분야를 공부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네 아버지한테 어쩌다 설득, 아니 강요당해서 오긴 했으니까, 뭐, 그건 그렇다고 쳐.”

그는 카페에서 제공하는 일회용 컵이 모든 원흉이라는 듯이 컵을 째려보다가, 이윽고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이젠 날 좀 놓아줘도 되지 않겠냐? 평생 부려먹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티치엘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나도 아빠 생각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 얘기를 전해달라고 부탁받았을 뿐이니까…”

그 말에 막시민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티치엘을 쳐다봤다.

“사실 너도 한패지?”

티치엘은 당황했다.

“응?”

“아무것도 모르니 이런저런 복잡한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어 줘도 반박도 못 하겠다, 마침 너랑 너희 아버지가 종사하는 분야도 같겠다, 입맛대로 부려 먹기 딱 좋으니까 내가 소유권을 주장한 그 ‘희대의 과학적 발견’이라는 옛날 바이올린을 빌미 삼아서 인생을 담보 잡힌 거 아니냐는 말이지. 네 아버지는 협박하고, 너는 살살 달래 가면서, 작당하기에 딱 좋은 2인조 아니냐?”

티치엘은 갑자기 쏟아진 막시민 특유의 열변에 눈만 조금 깜박이다가, 간신히 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나도 나름 내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건데, 그렇게 얘기하면…”

좀 서운한데, 라고 말하려다가 삼켰다. 티치엘은 거기까지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섭섭하다는 티를 내면 틀림없이 막시민은 자리를 피하거나 한 발짝 물러서려고 할 것이다. 대화가 이쪽으로 샐 때면 늘 그랬듯이. 그러나 막시민은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의자를 밀어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됐다. 너한테 얘기해서 뭘 하겠냐. 다음 교양 시간에나 보자. 루시안이 자리 맡아놨다더라.”

티치엘은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어디 가는데?”

“밥 먹으러 간다.”

그 길로 막시민은 카페 문을 열며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학교 안에 위치한 카페니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막시민이 갈 곳은 학교 내 식당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티치엘은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전공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쪽지 시험이 곧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티치엘은 알고 있었다. 사실 막시민은 다정하다. 말해도 아무도 안 믿겠지만. 그건 종종 사람들의 문젯거리를 그 자리에서 기가 막히게 해결해준다는 종류의 다정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막시민의 따뜻함을 믿었다. 조슈아가 극대본을 악의적으로 표절당했을 때 표절한 당사자를 지구 끝까지 쫓아간 사람이 바로 막시민이었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고 해도 몇 년 동안 연락이 끊겼다 만난 사이였다. 그러나 막시민은 조슈아가 관련되어 있다 하면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닥친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단 1할이라도 있다면 그 1할에 해당하는 것을 기꺼이 내줄 것이다.

그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쥬스피앙으로부터 전해 듣고 놀라워했던 티치엘은 처음 그를 만난 날 그녀의 직감을 확신했다. 그날은 오늘처럼 벚꽃이 막 피기 시작했고, 바람은 아주 조금 서늘했고, 곧 가장 높은 지점에서 햇살이 비출 예정이었다. 저녁에 비가 내릴 예정이라 입시생이었던 둘은 도서관으로 직행해야 했지만 막시민은 조금 투덜거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춰 벚꽃 나무를 감상하던 티치엘에게 막시민은 벚꽃 좋아하냐고 물었고, 저녁에 비바람 불어서 다 떨어지기 전에 지금 실컷 감상하라고 했다. 그리곤 우산은 있냐고 덧붙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2학년인 지금은 정말 있었던 일이었나 싶은 아득한 기억이었다. 티치엘은 저도 모르게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돈 안 되는 일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주의의 막시민이다. 시간이 지나 미화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티치엘 혼자만의 상상이었을 지도 모른다.

 

2.

C 학과의 교양 수업은 소위 사회악이라 불리는 팀플이 최종 점수의 60퍼센트를 차지했고, 중간고사 기간과 기말고사 기간에 각각 한 번씩 있었다. 남은 4할은 출석과 수업태도로 처리했다. 담당 교수는 평가를 까다롭게 하기로 악명 높았으나 보리스, 루시안, 막시민, 티치엘은 모두 이 수업을 피해 가지 못했다. 막시민은 옆에 앉은 기숙사 룸메이트 보리스와 루시안으로부터 그 연유를 듣게 되었는데, 루시안의 과장 섞인 경험담과 보리스의 차분한 정정 발언을 종합하자면 루시안은 지옥에서 천국 문 뚫기와도 같은 수강 신청을 실패했고, 보리스는 그런 루시안을 도와주다가 얼떨결에 같이 듣게 됐다는 것이다. 교수가 무슨 말을 해도 건성으로 듣던 막시민은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는지 둘에게 물어봤다.

“너희 학과 애들도 티치엘 아냐?”

물론 대답은 루시안이 했다.

“티치엘? 당연히 알지! 아참, 너랑 맨날 같이 다니지 않아? 둘이 친해?”

“맨날은 아니지만…….”

“저기, 쟤 아냐? 쟤는 이 수업 왜 듣는대? 으으, 나는 어쩔 수 없이 왔는데 교수님 평가가 너무 안 좋더라고.”

“루시안, 교수님이 들으시겠어.”

막시민은 대강 답했다.

“필교(필수 교양)라나. 나야 잘 모른다. 하는 게 워낙 많아서.”

수업이 끝난 후 루시안에 이끌린 보리스와 함께 막시민은 티치엘과 다시 인사를 해야 했고, 하여튼 그렇게 네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다.

티치엘의 입장은 별것 없었다. 어차피 들어야 하는 수업이고 평가는 교수가 하는 것이니 열심히만 하면 어떻게든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만사 노력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진 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최선을 다할 수는 있을 것이다. 티치엘은 열정적이고, 성실했다. 그건 남들이 보는 이미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밝고 투명하다는 표현이 그보다 더 걸맞을 수가 없었다.

티치엘은 오히려 막시민이 걱정되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수업에서 탈주할 때가 왔다고 선언할까 봐? 나는 됐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다 해 먹으라고 잠수할까 봐? 막시민이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팀플 때만 제 역할을 한 후 개인 점수는 전부 깎아 먹고 일부러 F를 받으려 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고는 그걸 자유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고 잠적할 것 같았다. 자기 신념이 확고한 사람은, 때론 그 앞이 내리막길이라 할지라도 브레이크를 잡지 않는 법이다.

“걱정 마라. 같은 팀에 보리스랑 루시안 있다.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들이 두 명이나 있다니 다행이지 뭐냐.”

티치엘의 걱정에 막시민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따지고 보면 그게 핵심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약간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서 생겼다. 막시민의 팀이 모이기로 한 날, 보리스와 루시안, 막시민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조원이 연락 두절되었던 것이다.

서로 안면을 튼 사이인 세 명만이 단체 손님 전용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날은 날씨가 조금 따뜻했고, 햇빛에 잘 달궈진 루시안은 열을 받아 길길이 날뛰었다.

“그 사람들, 단톡에서 대답은 잘 하더니 어떻게 단체로 안 나올 수가 있어! 우리 셋이서 다 하란 거야? 너무하잖아! 보리스, 그 사람들 누구였는지 기억해?”

평소보다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커피를 홀짝이던 보리스가 한마디 했다.

“3학년들이었지.”

막시민은 머리를 한바탕 긁었다.

“이해가 안 가는데. 앞으로 영원히 안 볼 거라면 몰라도, 이제 겨우 학기 초인데 그냥 증발하기를 선택해 버린다고? 설마 수업도 안 나올 생각인가?”

평소라면 막시민의 예상이 적중했을 테지만 이 문제의 3학년 팀원 셋은 다음 C 교양 수업에 그대로 얼굴을 들이미는 뻔뻔함을 보였다. 막시민은 첫째로, 이들이 위압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보리스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데 놀랐고, 둘째로 루시안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유들유들한 태도로 변명을 늘어놓는 데 놀랐으며, 마지막으로 막시민 본인에게는 사과조차 하지 않는 데 놀랐다. 그렇지. 잠시 티치엘의 대학원 얘기에 신경이 쏠려 잊고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아무리 정교하게 예측한다 해도 그 사람 마음과 백 퍼센트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는 거다. 그러다 막시민은 문득 멈칫, 했다. 그게 지금 이 상황에만 해당하는 얘기였던가?

“좋습니다.”

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시민은 말 없던 놈이 웬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상황을 확인했다. 5분만 쉬자던 교수는 무슨 일인지 10분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각 팀들은 각자 자기들 주제에서 슬슬 일상적인 담소로 넘어가고 있었다. 유독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른 팀 테이블에서 활발하게 얘기하던 티치엘이 이쪽을 흘끗 보는 것이 느껴졌다. 막시민은 황급히 보리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겠지만 사정이 있었다니 어쩔 수 없죠. 자료는 저희가 대부분 정리해 놨으니 남은 모임 때 나오셔서 피피티 정리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거의 다 해놓은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이제 빠지시면 안 돼요!”

루시안까지 가세하자 용의자 세 명은 막시민도 무슨 말을 얹지 않으려나 싶어 슬쩍 쳐다봤다.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반응을 대신했다. 보리스가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그러나 오래 지낸 친구답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루시안이 보리스를 붙잡았다.

“너 무슨 생각 있지?”

보리스는 무표정했지만 막시민은 왠지 얼굴에 웃음이 서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없는데.”

“그럼 왜 그렇게 길게 말했어? 내가 널 예전부터 봐 왔는데, 네가 길게 말할 때는 항상 뭔가 꿍꿍이속이 있었어.”

꿍꿍이라는 말의 어감이 웃겼다. 보리스도 피식 웃었다.

“꿍꿍이 없어.”

 

3.

티치엘이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해 온 것은 순전히 머리를 많이 써야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공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막시민을 바라봤다. 막시민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남들이야 멍 때린다고 생각하겠지만 티치엘은 이런 때 막시민이 엄청난 멀티 태스킹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한 번 떠볼까.

“막시민, 그 대학원 말인데…”

“아니.”

굉장히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티치엘은 왠지 집요해졌다.

“그게 아니라, 아빠가 너 지금 하는 공부 그만두면 그담에 뭐 할거냐고 물어보라 하셔서. 나도 궁금하기도 하고.”

바로 쥬스피앙 씨는 알 것 없지 않냐고 할 줄 알았는데, 즉각적인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티치엘은 본의 아니게 막시민의 얼굴을 깊게 들여다봤다. 고민. 허탈. 체념. 도피. 더 많은 단어가 보일까 싶어 저도 모르게 유심히 쳐다봤다. 체감상 영원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실제로 그다지 긴 시간 동안은 아니었다. 잠시. 아주 잠시였다.

“…나도 몰라.”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아주 낯선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막시민이 어조를 바꿔 재차 말했다.

“나도 모른다. 근데 내가 어떤 미래를 차근차근 설계해 놨다 쳐도, 어디 계획대로 일이 착착 잘 된 적이 있냐? 그럴 것 같으면 벌써 나는 벼락부자 건물주 됐다. 이 학교 구석탱이에서 남한테 책임 전가나 하는 양심 없는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관심도 없는 수업 듣고 있진 않겠지.”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티치엘이 진지하게 받아치자 막시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이거지.”

티치엘은 막시민의 진심이 궁금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으로 굴면서, 실제로 그렇게 말하면서, 어째서 돈 되지 않는 일에 뛰어들었을 시절의 얼굴에 더 생기가 감돌았는지 궁금했다. 쥬스피앙이야 사람이란 자극이 필요한 존재라 말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일 뿐인 걸까. 막시민과 티치엘이 같이 있을 때면 둘의 역할은 늘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는데.

티치엘은 화제를 돌렸다.

“너희 팀에 비협조적인 팀원들 있지.”

“아, 그 3학년 세 명? 그런 인간들, 다음 모임 때 안 나와도 하나도 안 놀랍다. 아니, 발표 날 안 나와도 그래.”

“근데 이렇게 태평해도 되는 거야?”

막시민이 입꼬리를 쓱 올렸다.

“준비야 우리가 벌써 거의 다 했는데 걱정할 게 있냐? 그리고 보리스가 뭔가 준비한 모양이던데.”

티치엘은 영문을 모른단 표정을 지었다.

“보리스가? 그것 참.”

“왜?”

“예감이 좋지 않아서.”

그리고 티치엘의 예감은 적중했다.

 

‘하나도 안 놀랍게도’, 세 명의 무임승차자들은 다음 모임 때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 다 해놨다고 괜히 말한 거 아니야?”

루시안이 울상을 짓자 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피피티나 만들자.”

이윽고 발표 전날 보리스가 마무리한 피피티를 본 막시민과 루시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루시안은 킥킥대며 웃고 있었고 막시민은 오, 제법인데, 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시 말해 정작 완성된 발표 자료를 보고 경악해야 할 당사자들은 자리에 없었다. 보리스가 피피티에서 3학년 세 명의 이름을 모두 빼 버린 것이다.

“역시! 내가 너 뭔가 생각이 있을 줄 알고 있었다니까.”

“생각만 했어. 실제로 행동에 옮기게 만든 건 그 사람들이지.”

막시민은 보리스를 위압적으로 만든 소문의 근거 하나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부당한 일을 당하면 보복을 서슴지 않는 성격이 아무래도 소문의 형성에 한몫한 듯했다. 이 경우에는 굉장히 합리적인 보복이 아닐까 싶었다. 역할을 다하지 않은 자, 점수도 챙기지 말라. 이보다 더 논리적인 조치가 있을까?

그러나 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망의 발표 날, 가장 차분한 이미지라는 루시안과 막시민의 주장 아래 보리스가 대표가 되어 그들의 팀이 원래의 여섯 명이 아닌 세 명으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했고 누락된 세 명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막시민은 올바르고 슬기로운 생활을 자처하는 티치엘을 살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2조였죠? 진네만 군, 나머지 세 조원의 이름이 왜 발표 자료에 없는지 설명해 주겠어요?”

본래 발표 자리에서 전말을 밝힌다는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보리스는 어쨌든 물었으니 대답은 한다는 주의였다.

“두 번 있었던 조 모임에 사전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았고, 팀원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이름을 지웠습니다.”

“그래요…….”

막시민은 퍼뜩 직감했다. 말어미를 끈다는 것은 뒤에 할 말이 더 있음을 의미하고, 저렇게 명료한 설명에 교수가 덧붙이는 사항은 필시 학생을 곤란하게 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교수는 까다로운 강의평의 주인공답게 폭탄선언을 내뱉었다.

“2조의 나머지 여러분이 내린 결단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팀플레이 평가라는 건 말 그대로 팀으로서 함께 프로젝트를 잘 수행해 나갔느냐를 평가하는 거고, 그 안에는 비협조적인 팀원이라 할지라도 팀워크를 잘 다져 나갈 수 있느냐는 세부 항목도 포함이 됩니다. 발표 자료는 그걸 증명하는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죠.”

불안감을 느낀 루시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교수님, 그럼 설마…”

 

티치엘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막시민과 항상 앉던 카페 테이블에 이번에는 보리스와 루시안도 있었다. 보리스는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티치엘이 보기엔 평소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고, 아마도 차후 어떤 태도로 나갈지 선택하는 중인 것 같았다. 반면 루시안은 울상이었다. 막시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이었다. 티치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보고 잠깐 멈칫, 했던 막시민이 말했다.

“왜 그래?”

“어쩐지 좋게 끝날 것 같지 않더라.”

“우리인들 교수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겠냐. 하긴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이론을 아직까지 굳게 믿고 있으니 그런 판결을 내렸겠지.”

보리스가 말했다.

“내가 벌인 일이야. 내가 교수님께 가서 말씀드려볼게.”

그러자 루시안이 테이블을 탕탕 쳤다.

“너 혼자 그런 거 아니야. 우리도 동의했잖아! 다 같이 가자. 괜찮지, 막시민?”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티치엘은 막시민을 쳐다봤다. 루시안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다 눈이 마주친 막시민은 왜? 라고 말하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속이 타들어 갔다.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아 야속했다. 그래서일까, 조급하게 말이 나갔다.

“나도 같이 갈게.”

역시 반응은 루시안이 빨랐다.

“그럴 필요 없어. 너랑 관련된 일도 아니잖아! 우리끼리 가는 편이 나을 거야.”

그 무렵 티치엘은 제법 타당한 설명을 찾아내었다.

“그 교수님, 까다로우시잖아. 당사자들 말은 더 안 들으려 하실 수도 있어. 제삼자가 증언해주면 분명히 더 나을 거야.”

막시민이 한 마디 던졌다.

“제삼자까지 끌어들인다고 생각해서 아예 F를 주는 건 아니고?”

티치엘은 입을 다물었다. 막시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넌 다정한 사람이지만, 늘 그렇지 않다는 듯 있었지. 3년도 넘게 같이 있으면서도 속마음 한 번 털어놓은 적 없고, 좋은 시절 다 지나갔고 그게 괜찮다고 티치엘도 속이고, 심지어 가끔은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것 같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학과 공부라면 죽어도 하기 싫은 티를 내는 막시민을 미워하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 원인 중 하나에 티치엘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답지 않게 짜증이 났다.

“네가 F에 신경을 쓰긴 했구나.”

감정이 담기자 말에도 무게가 실렸다.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는지 막시민이 컵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네 일에 쓸데없이 참견한다고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고 싶은 것 아니야?”

티치엘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싸우자는 소리, 본심도 아니었고 그녀가 원하는 대화도 아니었다. 멍청했다. 아무리 봐도 멍청했다. 하지만 엎지른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막시민은 잠깐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나 혼자만의 일이라면 몰라도, 보리스랑 루시안 모두의 일인데 내가 귀찮다고 빠지면 되겠어?”

뭔가 수많은 말들이 생략된 것 같았다. 티치엘이 조그맣게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지.”

“뭐?”

“여기 올 때도, 대학원 얘기 꺼냈을 때도 그랬어. 다른 사람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너는 항상 내 입장을 배제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무언가 물어봐도 분명하게 대답 안 하는 거지.”

그즈음 눈치를 보고 있던 루시안을 보리스가 툭툭 쳤다.

“루시안, 우린 가자.”

“응?”

“밥 먹으러 가자고.”

“어? 하지만……”

막시민은 보리스가 루시안을 끌고 가다시피 해서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싫으니까 싫다고 말하지 뭐라고 더 말해야 되겠냐?”

티치엘은 저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든 정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찌해도 미로를 끝없이 헤매는 것 같았다. 약간 어지러웠다. 단순히 친구 사이 신뢰의 문제로 치부하자니 힘이 들었다. 막시민을 이해하고 싶었다.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면 앞장서서 그 새로운 길을 개척해 놓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상대에 대한 존중의 부재가 아닐까. 그러므로 그녀가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여태까지 늘 해왔던 잔소리 선생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제는 진짜 어쩔 수 없나. 조슈아만큼 오래된 관계도 아니고…무엇보다, 둘은 본질부터가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냐. 됐어. 내가 방금까지 한 말은 잊어버려.”

막시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 내 미래든지 지금 이 상황이든지 간에.”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이보다 더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는데 이까짓 거 해결 못하겠냐. 너야 바로 정답이 안 보이면 불안하겠지만, 난 애초부터가 정답이 없는 사람인지라.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티치엘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아니, 책에 얼굴을 파묻고는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째서 막시민 앞에만 서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지 몰랐다. 그래놓고 정신 차리고 보면 아차, 싶은 심경만 가득했다. 너무 솔직했나? 아니면 너무 솔직하지 못했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왜 그랬지?

생각해 보면 막시민이 모를 리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사정만 듣고도 잘만 추리해내는데, 하물며 티치엘이 이렇게까지 다 드러내는데 설마 모를까. 공감이나 배려 같은 비논리적인 부분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모른다면 그게 더 어이없을 것이다.

기분이 최악이었다. 원래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방적으로 사과받은 지금은 더더욱 좋지 않았다.

“미안, 나 갈게.”

막시민의 복잡한 표정을 뒤로하고 티치엘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4.

보리스와 루시안은 나름대로 많은 얘기를 나눈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C 교양 수업 무임승차자 징벌로 인한 공동 최하 점수 처리’ 사태는 다음 시간이 되어서도 곧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막시민이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치엘은 불안해졌다. 아무리 미련이 없어도 그렇지 일언반구 없이 코빼기도 안 보이지는 않을 텐데. 거기다 루시안의 상상력까지 더해지자 더욱 안 좋은 시나리오만 떠올랐다.

“막시민, 그 3학년 선배들이 납치한 것 아니야? 점수 못 받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못 나오는 거 아냐?”

보리스가 말했다.

“그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벌어질 일인 것 같은데.”

“우리 인생이 그 영화나 드라마일지도 모르잖아!”

어쩐지 즐기는 모습이 루시안의 해맑은 표정을 악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보리스가 짧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너 무슨 생각 있지!”

보리스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 없어. 그리고 방금은 짧게 말했잖아.”

둘의 대화가 어느 만큼 산으로 가든 티치엘은 관심이 없었다.

“너희들 룸메이트 아니야? 막시민 방 안에 없었어?”

“우리가 아침에 나갈 땐 괜찮은 것 같았어. 이따 수업 때 보자고 그랬는데.”

티치엘이 눈을 깜박였다.

“그럼 납치 얘기는 왜 나와?”

“우리가 나와 있는 동안 기숙사에서 납치당했을 수도 있지!”

할 말이 없었다.

 

직접 막시민을 찾아간 결과 막시민은 그저 잠을 좀 많이 잤던 걸로 판명 났다. 어차피 2조 발표도 끝이 났고, 출석이야 개인 평가니 한 시간 지각할 바에야 그냥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후에 카페에서 만난 막시민이 해명한 바로는 그랬다. 약간 잠에서 덜 깬 상태였고, 그럼에도 이상하게 정신은 멀쩡해 보였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일회용 컵을 홀짝거리며 눈을 얇게 뜬 채 이리저리 생각 굴리는 모습이 보이는 게 평소의 막시민 그대로였다. 티치엘은 웃음이 나왔다.

“난 네가 바보가 됐나 싶었지.”

“바보라니?”

“네 말대로라면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며? 감기라도 걸려서 안 나오나 싶었다는 말이야. 루시안은 심지어 네가 3학년 선배들한테 납치당한 게 아니냐고 했다니까.”

막시민이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티치엘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막시민, 있잖아……”

막시민이 정색했다.

“안 간다니까.”

“그게 아니라,”

심호흡이 이어졌다.

“아빠한테 말씀드려볼게, 네 입장에 대해서. 그리고 나도 너무, 뭐랄까, 넘겨짚으려 한 게 있으니까…”

“우리 싸웠냐?”

“응?”

티치엘이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막시민이 계속 이었다.

“그냥 대화가 필요했던 것뿐이지, 싸운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억지로 사과하려 하지 마. 엄밀히 따지면 네 잘못은 없잖아.”

티치엘이 슬쩍 웃었다.

“사과하려고 한 거 아닌데?”

이번엔 막시민이 당황했다. 티치엘은 태연하게 말했다.

“나도 할 말은 해야지. 나라고 잔소리만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 넘겨짚으려 한 게 있으니까, 앞으로는 조금 더 차근차근 짚어보겠다고.

사실 할 말은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네 앞에서 바보같이 솔직하게 구는 것처럼, 너도 나에게도, 너 자신에게도 조금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 아마 그럴 수 없다는 건 네가 네 생각보다 내게 상냥한 사람이어서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지난번의 바보 같은 짓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막시민의 말이 맞다.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상관할 이유는 없다. 친구 아니라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결국 언젠가는 서로를 놓아주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상관하는 데서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한 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 만큼 더더욱. 왜냐하면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새싹을 피우던 나무에게 갑자기 눈을 맞으라 하면 못 견디겠지. 그러니까 당연했다.

막시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티치엘이 밝게 되물었다.

“뭐가?”

“잘 말해 보겠다며. 어차피 잘 안 될 게 뻔하지만.”

“무임승차 건이나 해결해, 그게 더 급하잖아.”

막시민은 결국 테이블에 엎어져 버렸고 티치엘은 킥킥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카페 창밖을 보았다. 지금이 한창 봄이라고 과시하듯 벚꽃 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벚꽃 예쁘다.”

“아직도 벚꽃 좋아하냐? 낭만적이구만.”

“맞아, 돈은 안 되고 치워야 할 것만 잔뜩 생기지.”

엎드려 있던 막시민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의 눈빛을 보니 지금 얘가 티치엘이 맞나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티치엘은 모른 체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훨씬 편했다.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을 잠재우는 수많은 방법들 중 한 가지였다. 막시민의 알 수 없는 내적 반경과 타협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지금은 정답이 보이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다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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