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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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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좋고, 기온도 좋은 평온한 날은 역시 낮잠이지. 방에서 나와 거실에 편안한 자세를 잡고 누우니 금새 잠이 들락말락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러나 방문 밖에서부터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고, 막시민은 머리를 탈탈 털며 일어나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한쪽 머리가 눌린 탓에 비죽비죽한 머리카락이 까치집인 양 개성있게 솟구쳤다. 아무래도 낮잠 자기는 글렀네.

 

두다다다다. 가볍고 잰 발걸음 소리가 들리곤 이내 노크도 없이 문이 번쩍 열리며 쨍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게 뭐게?”

“낸들 알겠냐”
 

꿈뻑이는 눈을 두어번 비비며 시선을 주면, 루시안은 묻지도 않은 말을 와다다 쏟아낸다. 상대가 중요한게 아닌 듯 시선도 신경도 온통 물건에 쏠려있어, 금지옥엽 자주빛 상자에 든 물건에 절로 관심이 생긴다. 하지만 막시민은 뭐냐 묻지 않았다, 물으면 더 귀찮아질게 뻔하니까. 그러나 묻지 않아도 절로 상자가 열리고 대화가 이어진다.

 

“이거 진-짜 어렵게 구한건데, 좋은 꿈을 꿀 수 있대! 그러니까 좋은 꿈이란 건, 보고 싶었던 사람을 보게 해준다고 하더라고! “

 

꽤나 고급품인듯, 반질반질한 천에 폭 감긴 병이 손에 들려 세상에 나왔다. 딱 애기 손바닥만한 길이인 탓에, 혹여 떨어질 새라 두 손으로 조심조심 들어 보여주는 루시안의 손이 잘게 떨렸다. 유리병만 해도 어렵게 구할 수 밖에 없어보였다. 섬세한 유리세공품은 만드는데도 오래 걸리지만, 많이 만들지도 않기 때문에 고급품 일 수 밖에 없었으니까.

 

루시안의 설명은 유리병의 모양으로 이어졌다. 공 모양의 병은 서리얼음이라도 낀 것 마냥 눈꽃 모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눈꽃의 중심마다 가루처럼 작은 보석이 알알이 박혀있어 눈이 어지러웠다. 햇빛 없이도 절로 반짝일텐데,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탓에 막시민은 눈을 길게 감았다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이레나 기다려서 받아왔다니까! 원래 예약주문만 받아서 두 달은 기다려야 하는데, 어떻게 안 되냐고 물어보니까 잘 해주더라고! 물론 돈은 좀 더 들었지만.. “

“이거봐 병 모양도 진짜 예쁘지 않아? 분명 세공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을꺼야, 이거 하나 하나 손으로 그렸겠지?”

“이거만 있으면 불면증도 한 방에 해결할 수가 있대! 향기만 맡으면 금새 잠에 들 수 있다지 뭐야!”

“향기 한번 맡아볼래? 나 사실 아까 한번 맡아봤는데 완전 시원하고 솔직히 찌릿한 기분도 들었어. 어떻게 이런 향을 맡고 잠에 든다는 걸까?”

“…”

“그래서 말인데, 보리스 생일 선물로 주면 좋아할까?”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게 몰아붙이는 루시안에 막시민은 그냥 한 숨을 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보리스를 보고 깜짝 놀란 루시안이 손에 든 병을 놓치고, 보리스 앞에 떨어져 부서지며 루시안이 말했던 짜릿한 향이 퍼졌으니까. 과연 짜릿한 향이었고, 필름이 끊긴 것 마냥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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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 깼기 때문인지 드는 오한에 모포를 잡아 당겨 목 끝까지 덮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날이 깜깜했고, 옆에서 모닥불이 꺼져가며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조금 더 잠을 잘까 싶어 눈을 감아 보아도 또렷해지는 정신에 보리스는 그만 일어나 앉았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둑한 하늘을 한번,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익숙한 사람 한번. 제가 덮은 것과 똑같은 모포를 덮고 드르렁 코를 고는 사람의 인영에 보리스는 두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꿈인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보리스는 깜박거리며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고, 작게 타오르게 해서 공기를 데웠다. 그 후에도 가만히 앉아 어두운 너머를 보았다. 그새 하늘이 밝아져 푸르게 그리고 붉게 물들어 가고 해가 오르며 황야에도 천천히 빛이 내려앉았다. 대지가 데워지기 시작하고, 더 이상 해를 두 눈으로 보기 힘들어졌을 쯤에야 보리스는 상념을 깨고 일어났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꺼에요?”
 

진작부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게으른 사제님은 모포를 머리 끝까지 둘러쓴 채로 꿈틀거렸기에 보리스는 참지 못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딘가 그리우면서 정겨운 느낌이 드는 게, 흔히 이야기들 하는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이런걸까? 나우플리온의 모포를 잡아당겨 뺏으면서 다시 한번 소리치는 목소리에 리듬이 실렸다. 일어나세요 사제님!

 

“나이가 들면 잠이 많아진다는데, 너는 어떻게 된 놈이 잠이 없는거냐..”

 

비척비척 일어나 앉은 나우플리온이 길게 하품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젊으니까요. 이어지는 만담에 나우플리온도 화답했다. 너 그렇게 안자면 키 안 큰다. 이미 많이 컸는걸요~. 킥킥 웃는 보리스와 나우플리온은 간단히 채비를 정리하고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어디가는거에요?”

“가보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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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시간 정도 걸으니 저 멀리서부터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굉장히 넓은 호수였다. 끝이 보이지 않아 좁은 바다처럼 보이는 호수. 언덕 밑으로는 몇몇 오두막과 나룻배가 떠있는 잔잔한 마을이 보였다. 우와,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탄성과 함께 보리스는 반짝이는 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날이 맑아 흐르는 물결 마다 빛이 반짝거렸다.

 

나우플리온이 이끄는 대로 작은 언덕을 내려가자, 짧은 자갈 밭으로 물이 찰랑거렸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좀 더 다가가 두 손 가득 물을 손에 담았다. 더운 날의 영향인지 차갑진 않았지만 충분히 시원했다.

 

“여기도 와 봤던 곳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그렇다면 알고 있는 곳이라는 거군요”

 

그 때 저 멀리서 모자 쓴 사내가 다가오며 손짓했다.

 

“오늘 오기로 한 젊은이들이오? 어서 이리 오시오!! 서둘러 출발해야 하니.”

 

오기로 했다고? 보리스가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나우플리온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마주 씩 웃어주고는 사내에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금방 가겠소~!”

 

그러고선 먼저 달려가며 소리친다. 안 올꺼냐?

 

여기서 내가 당신을 따라가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천천히 발을 구르며 설렁설렁 뛰던 나우플리온은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더 크게 발을 구르며 속력을 높였다. 언뜻 보면 먼저 출발한 나우플리온이 더 유리해 보였으나, 보리스는 엎치락 뒤치락 거리며 나우플리온을 따라잡더니 쿡쿡 웃으며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옛날 생각나지 않아요? 물론 당신은 옛날 같지 않은 것 같지만,,”

“너…  나 아직 팔팔하다 이놈아”

 

짐짓 인상 쓰듯 미간을 약간 찌푸렸지만, 새어나오는 웃음은 막지 못해 피식거리며 답한 나우플리온은, 손을 들어 보리스에게 짧게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곤 앞으로 달려나갔다. 눈 앞을 덮쳐오던 손을 피하려던 보리스는 속력을 약간 줄였고, 그 바람에 사내 앞에 먼저 도착한 건 나우플리온이었다.

 

“이건 반칙 아닌가요?”
“진 사람의 변명일 뿐이지-“

 

넌 아직 멀었다, 그렇게 우쭐거리며 앞서는 나우플리온을 보는 보리스의 표정은, 어이가 없어 벙져있다가도 금방 풀려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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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호수 주변의 부유물을 정리하고, 부표를 바꿔 띄우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좀 걸렸어도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모자를 쓴 사내는 나우플리온이 배를 다룰 줄 알자 매우 흡족해하며 말을 이었다.

 

“일을 마치면, 저기 오두막에 들러 맥주 한 잔도 하고 가게. 참도 든든히 준비해 놓을 테니 그냥 가면 섭섭할꺼야,”

 

흥이 오른 목소리로 손님에겐 잘 안 내주는 자리라며 생색을 내는 사내에게 나우플리온은 한 술 더 떠 얼음 띄운 화채도 만들어 달라며 너스레를 피웠다. 사내는 어찌 아냐는 표정으로 한번 쳐다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이제 보니 처음보는 얼굴도 아니군 그래. “

 

술 한 통으론 부족하겠구만,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뜨는 사내를 보며 나우플리온은 천천히 배를 띄웠다.

 

“와 봤던 곳이군요”

“큼,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거겠지”

 

장난에 심취한 꼬마가 비죽거리며 눈을 흘기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보리스는 이내 작업에 몰두했다. 한적한 배 위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 더 없이 평온했으며, 작은 나룻배에 앉아 뜰채로 부유물을 뜨는 일은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나뭇조각이나 뭉쳐있는 풀 무더기 같은 것을 건지다 보면, 가끔 작은 물고기들로 걸려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작업은 누가 더 많은 물고기를 잡는가의 경쟁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당신은 몇 마리 잡았어요?”

“얼마 못 잡았나 보구나, 나는 뜰채로 뜰 때마다 족족 걸리던데 말이다”

 

우쭐거리는 목소리를 마주하며 보리스가 볼멘 목소리를 터뜨렸다.

 

“내가 다 봤는데 거짓말이죠? 당당하지 못한 걸 보니 저보다 적게 잡았나 보군요.”

“내가 너보다 먹은 밥공기가 몇 개인데, 벌써 반 통은 채우고도 남았지”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물로 시선을 돌리는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보던 보리스는, 1/3도 안 찬 제 바가지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곤 피어오르는 호승심을 태우며 물을 뚫어버릴 듯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득도 없이, 단순한 흥미로만 열중하여 승부욕을 태우는 일만으로도 마음에 어떤 것이 충족되었다. 별 것 없는 일에도 단순히 즐거워지고,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아 웃음이 새어나왔다. 바로 지금처럼.

 

“이거 봐요! 방금 제대로 된 큰 거 잡았어요!”

 

뜰채로 낚아챈 물고기는 족히 두 뼘은 될만한 크기여서 하늘로 번쩍 들고 있는 보리스의 한 손이 흔들렸다. 나우플리온이 보는 소년의 모습도 빛이 났다. 물방울이 햇빛을 반사하는 탓에, 물고기가 털어내는 물방울 방울이 빛 방울이 되어 보리스 주변으로 떨어졌다. 뜰채를 한껏 들어 자랑을 하는 소년은 어느새 훌쩍 커서 청년의 면모를 보이기도 해서, 그새 각이 생기는 얼굴 가득 머금은 함박 웃음은 보는 사람마저 충족감을 들게 하는 어떤 공명(共鳴)도 느끼게 했다.

 

“잘했다, 보리스!”

 

그래서 이어 외치는 소리도 한껏 들떠있었다. 별다른 미사여구나 칭찬은 없었음에도 서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적막을 가득 매웠다. 그것만으로 서로에겐 굉장히 충분한 시간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보리스!”

 

제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의 나우플리온인가 싶어 고개를 들면 그는 입을 꾹 담고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누가 또 내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망망한 물가를 두리번거려도 짐작가는 곳이 없었다.

 

“보리스!”
 

좀 더 선명해진 목소리, 아는 목소리였지만 여기서 들릴 목소리는 아닌데. 눈을 두어번 깜박거리는 듯 했는데, 순식간에 눈이 떠졌다. 루시안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보리스!!! 걱정했다구!!”
 

몸으로 정신이 순식간에 빨려들어온 듯한 느낌. 갑자기 몸에 숨이 불어넣어진 듯 기묘한 감각에 보리스는 오른손을 들어 두어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손으로 뜰채를 잡아 들고 있었는데, 묘한 감각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걱정하지마, 아무렇지 않아.”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옆에서 쏟아지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보리스가 마신 것은, 근래 암암리에 도는 마법이 가미된 수면향이었고,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이었다. 한번에 과량의 수면향을 맡아 잠시 혼절한 것과 같은 상태였으며, 정신을 잃은 건 1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는 설명. 그리고 혹시 모르니, 교수님께 검사를 의뢰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티치엘의 말에 보리스는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피했다. 그럼 이제 씻으러 가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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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플리온, 너무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이 눈을 감자 한 눈에 그려졌다. 여기선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당신은, 잘 지내고있을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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